•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2) 신석기시대의 유적
  • (3) 무덤

(3) 무덤

 무덤이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한 시설물로서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은 생활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즉 시체를 바위나 나무 위에 얹어 놓음으로써 짐승에게 처치를 맡기는 風葬, 강변이나 해변에서는 물속에 가라앉힘으로써 물고기에게 처치를 맡기는 水葬, 열대지방에서는 급속히 진행되는 시체의 부패에 대처하거나 또한 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火葬 등이 있다.

 그러나 땅을 파서 만든 무덤이라는 시설물 안에 시체를 묻는 매장방법도 발생하게 되었다. 무덤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그러한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동양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유적 가운데 조개더미유적에서 인골이 출토된 예는 극히 일부로서 함경북도에서 몇 예가 보인다. 아직 정식보고서가 나오지 않고 있으며 간혹 민무늬토기시대의 것들로 보는 견해531)황기덕,<함경북도지방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1)>(≪문화유산≫ 1957-1).도 있으므로 신석기시대의 무덤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예를 들면 웅기 龍水洞조개더미532)황기덕, 위의 글.에서는 14구의 인골이 東枕伸展仰臥葬되어 묻혀 있었는데 양다리 사이에서 10여 개의 돌살촉이 발견되었고 머리 부근에서는 채색토기가 출토되는 등 껴묻거리(副葬品)가 묻혀 있는 예이며, 또한 모래땅에 묻은 것과 조개더미 아래의 생토층을 파고 묻어 마치 조가비무덤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경성 地境洞533)榧本杜人,≪朝鮮の考古學≫(同朋舍, 1980).에서는 평탄한 구릉 위에 강돌로써 긴네모꼴로 돌리고 그 안에 시체를 펴묻기한 후 석기류를 껴묻었으며, 회령 鳳儀里534)榧本杜人, 위의 책. 拘山南畔에서는 그 경사진 면에 계단모양으로 단을 만든 후 껴묻거리와 함께 동침신전앙와장되어 있었다고 전하는 예도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무덤으로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는 춘천 교동의 동굴유적,535)金元龍,<春川 校洞穴居遺蹟과 遺物-校洞文化의 性格과 年代->(≪歷史學報≫ 20, 1963). 시흥 시도536)韓炳三,≪矢島貝塚≫(1970). 및 부산 동삼동조개더미537)及田民次郞,<南朝鮮牧ノ島東三洞貝塚>(≪考古學≫ 4-5, 1931).
橫山將三郞,<釜山絶影島東三洞貝塚報告>(≪史前學雜誌≫ 5-4, 1933).
Sample, L. L., Tongsamdong : A Contribution to Korean Neolithic Culture History, Arctic Anthropology Ⅺ-2, 1974.
의 돌무덤, 울진 후포리538)國立慶州博物館,≪蔚珍厚浦里遺蹟≫(1991).의 洗骨葬무덤, 부산 범방의 토장묘,539)金東鎬,<韓國東南海島嶼の先史土器とその文化>(≪考古學ジャナル≫ 183, 1980).
釜山直轄市立博物館,≪凡方貝塚≫Ⅰ(釜山市立博物館遺蹟調査報告書 9, 1993).
통영 연대도540)韓永熙·任鶴鍾,<煙臺島조개더미 斷崖部 Ⅱ>(≪韓國考古學報≫ 26, 1991).
國立晉州博物館,≪煙臺島≫Ⅰ(國立晉州博物館 遺蹟調査報告書 8, 1993).
·욕지도541)國立晉州博物館,≪欲知島≫(國立晉州博物館 遺蹟調査報告書 3, 1989).·상노대도 산등조개더미542)金東鎬·朴九秉,≪山登貝塚≫(釜山水産大博物館 遺蹟調査報告 1, 1989). 등에서 보이는 집단土葬墓 등이 있다.

 춘천 교동유적은 강원도 춘천시 鳳儀山의 동쪽 완경사지대에 있는 긴 山尾의 북쪽 경사면의 풍화화강암반을 파 들어가 만든 동굴유적으로서 1962년 옛 성심여자대학(현 한림대학교)의 신축공사중에 발견된 것이다. 신석기시대 말기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동굴은 해발 105m이며 굴 입구는 서쪽으로 치우친 북향이다. 굴의 평면은 지름 4m 정도의 둥근 형태이고 천장은 반달모양이며 가장 높은 중앙부의 높이는 2.1m이다. 서쪽에는 바닥이 높아지면서 위로 올라가는 돌출부가 있는데 저장시설로 생각된다. 굴의 바닥은 흙을 깔고 다졌으며 입구 가까이에 있는 천장에는 그을음이 남아 있다.

 이 유적은 주거로 사용되다가 폐기된 후 다시 무덤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3구의 인골은 똑바로 누운 자세에 각각 발을 모아 중앙으로 향하고 있는데, 머리는 각각 동·서·남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입구 쪽의 인골 2구는 머리를 입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인골 밑에서 화덕자리가 발견되었는데 흙을 제거하자 석기류가 출토되었으며 토기는 입구 쪽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소형의 납작바닥토기 5점을 비롯하여 도끼·망치·화살촉·낚싯바늘·칼 등의 석기류와 대롱옥·수정조각·白瑪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시도조개더미에서 발견된 돌무덤은 이 섬의 최북단의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조개더미와는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무덤은 풍화화강암인 생토층에 1.5m×1.2m, 깊이 30㎝ 크기의 타원형구덩이를 먼저 파고 그 위에 지름 10㎝ 내외의 깬돌(割石)을 1.65m×1.45m, 높이 20㎝ 정도의 타원형으로 쌓아 놓은 것이다. 주변의 돌은 지름 25㎝ 정도로서 중심부의 것보다는 큰 것이었다. 돌과 구덩이 사이에는 많은 숯과 부식된 흑색토가 깔려 있었고 돌 사이에는 빗살무늬토기의 조각이 섞여 있었다.

 특히 숯이 많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구덩이에 시체를 넣고 나무로 덮은 다음 돌을 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실제 숯을 깔았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으로는 이 유구를 무덤이 아니라 서울 암사동의 대형 돌무지시설과 같은 야외조리시설로 보는 견해543)橫山將三郞,<ソウル東郊外の史前遺蹟>(≪文學論叢≫ 5·6, 1953).
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 第3版(一志社, 1986), 44∼45쪽.
도 있다.

 울진 후포리유적은 경북 울진군 평해읍 후포리의 바닷가에 면한 언덕 꼭대기에서 발견된 세골장의 집단토장묘유적으로서 지름이 약 4m 내외의 불규칙한 둥근 구덩이 안에 인골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특히 석기들과 함께 겹쳐져 있었다. 이로 보아 여러 번 改葬이 있었던 듯하다. 신석기시대 본격적인 매장시설로서 매우 희귀한 예이다.

 여기에서는 간돌도끼(磨製石斧) 130여 점과 돌대롱옥, 주걱모양의 돌판 등이 출토되었는데 돌도끼는 길이 20∼30㎝ 내외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50㎝가 넘는 것과 5㎝ 미만의 것도 있다. 이러한 대형의 도끼는 함경도지방이나 춘천 교동의 동굴유적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연대도유적은 다량의 인골이 출토된 집단매장유적으로서, 적당한 크기의 무덤구덩이를 얕게 파고 시체를 펴묻기 또는 굽혀묻기하여 안치하였는데 다량의 껴묻거리를 함께 넣었으며 그 위에는 잔돌과 흑색부식토 또는 조개가루를 덮은 다음, 보다 큰 돌을 다시 덮어 놓은 형태가 대부분이므로 이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무덤형식으로 생각된다. 한편 돌도끼를 깐 위에 시체를 안치한 특이한 경우도 있으며 자갈돌로 만들어진 돌널무덤(石棺墓)의 것도 발견되고 있어 당시의 다양한 매장방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이다.

<韓永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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