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3. 신석기시대의 생업과 사회
  • 2) 사회
  • (1) 사회구성

(1) 사회구성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발전은 인간의 개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사회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고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류의 원초적인 집단은 「무리(群)」 또는 씨족이라 한다. 그 후 차츰 인구가 증가하여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씨족이 확대되고 일정한 영역내에 여러 씨족이 모여 地緣 중시의 부족사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693)金廷鶴,<韓國民族 및 文化의 起源>(≪韓國上古史硏究≫, 범우사, 1990).

 현재로서 신석기시대의 사회에 대한 내용은 신화·전설·유습 등을 통해 살펴볼 수밖에 없으나 후대의 신화·전설·유습 등은 신석기시대의 원초적인 모습을 그대로 전하지는 않으므로 이들 자료를 통한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인류학이나 언어학 등 실증적 과학의 힘을 빌리거나 다른 미개사회의 사회상태에 대한 연구694)金廷鶴,<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 Ⅰ,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64).의 도움이 필요하다.

 신석기시대 사회의 기본단위는 여러 움집(竪穴住居)이 모여서 이룬 취락이었다.695)高承濟,<原始聚落의 形成과 展開過程>(≪李瑄根紀念韓國學論叢≫, 1974).
―――,≪韓國村落社會史硏究≫(1977).
이 마을은 4∼5기의 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움집의 면적으로 보아 하나의 움집에는 대개 4명 정도의 식구가 살 만한 조그마한 크기의 것으로, 구석기시대의 무리와는 다른 사회적 구성단위가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장년부부와 성장한 자녀 2명 정도, 때로는 성인부부와 미성년 자녀 2∼3명 정도의 식구로 구성된 가족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696)金正基,<韓國竪穴住居址考(1)>(≪考古學≫ 1, 韓國考古學會, 1973).
―――,<新石器文化-住居址와 墳墓>(≪한국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73).
―――,<住生活>(≪韓國史論≫ 17, 國史編纂委員會, 1987).

 신석기시대에는 가족이 없었다고들 흔히 믿고 있지만, 이것은 고고학적인 조사결과에 나타난 집터의 상황과는 일치되지 않는 현상이다. 이렇게 여러 가족으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였지만, 취락은 모두 혈연을 중심으로 뭉쳐진 혈연집단으로서 이 집단을 사회조직면에서는 흔히 씨족이라 부르고 있다.

 씨족을 구성하는 취락의 주민들은 혈연집단으로서 그 공동의 조상을 동물로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을 보통 Totemism이라고 한다.697)李萬烈,<韓國古代에 있어서의 토테미즘적 요소에 대하여>(≪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0). 토테미즘은 자기 자신을 남과 구별하고자 하는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취락을 단위로 하는 씨족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중요한 일을 공동으로 처리해 나가는 원시공동체였다. 원시공동체는 씨족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노동과정에서의 공동노동, 그리고 거기에서 생산된 물자의 공동분배 등을 바탕으로 형성된 평등한 인간관계를 특징으로 하였다. 즉 원시공동체내에서는 구성원 사이에 계급관계가 성립되지 않았으며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지배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지도자」에 불과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씨족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서 이 씨족을 단위로 취락을 형성하였는데 고기잡이·사냥·농경 등의 중요한 생산활동은 주로 씨족 전체의 공동노동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자연히 분배와 소비도 그 속에서 공동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현재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두레」는 신석기시대의 공동노동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698)李丙燾,<古代南堂考>(≪韓國古代史硏究≫, 1976), 621∼623쪽. 신석기인들은 생산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도 씨족 전체가 공동으로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들 씨족은 대체로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일정한 영역내에서 자급자족의 경제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경제적 독립체였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 영역을 벗어난 지역, 즉 다른 씨족의 영역 안에서의 경제적 활동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씨족은 상당히 고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교역이나 결혼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상호 접촉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대의 결혼은 씨족원내에서는 허락되지 않았고 반드시 다른 씨족원과 결혼을 해야 하는 족외혼이 성행하였다.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동성불혼의 관습은 후대에 유교의 영향으로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그 근원은 신석기시대의 족외혼에서 찾아볼 수 있다.699)李基白·李基東,<新石器時代의 社會와 文化>(≪韓國史講座≫1 古代篇, 一潮閣, 1982).

 한편 가족이 모여서 씨족을 형성하듯이 씨족이 모여 부족을 구성하였다.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분열된 씨족 혹은 혼인관계로 인하여 가까운 사이가 된 씨족들이 결합하여 부족이라는 보다 큰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부족은 지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회구성의 원칙은 씨족과 거의 유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신석기시대의 일정한 시기에는 자식이 아버지의 씨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씨족에 속하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700)崔在錫,<韓國古代 家族에 있어서의 母系·父系의 문제>(≪韓國社會學≫ 4, 1968), 75쪽.
金毅圭,<新羅母系制社會說에 대한 檢討>(≪韓國史硏究≫ 23, 1979), 42∼43쪽.
李基東,<新羅 中古時代 血族集團의 特質에 관한 諸問題>(≪震檀學報≫ 40, 1975).

 이상으로 사회구성면에서 볼 때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세 번 변화·발전해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701)李基白·李基東, 앞의 글. 즉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신석기인은 둥근바닥의 무늬없는 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 다만 현재 알려진 유적의 분포상태나 조사결과만으로써는 그들의 인종계통을 말하기가 힘든 형편이다.

 그 후에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해안과 강줄기를 따라 등장하였으며, 이들이 신석기시대의 주인공으로 오랜 기간 살고 있었다. 구석기인과는 달리 신석기인은 끊이지 않고 계속 계승되어 오면서 한민족의 형성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오랜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서로 융합되고, 또한 이후 청동기시대의 새로운 주민들과 결합되면서 한민족의 조상으로서 발전되었던 것이다. 즉 종래에는 이 빗살무늬토기인들을 퉁구스족 혹은 알타이족의 한 갈래인 것으로 흔히 생각해 왔었다.702)金貞培,≪韓國民族文化의 起源≫(高麗大 出版部, 1973). 그러나 최근에는 이 빗살무늬토기인을 옛 기록에 나오는 濊人으로 보기도 하고,703)三上次男,<東北アジアにおける有文土器系社會と穢人(2)>(≪朝鮮學報≫ 3, 1952).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혹은 고아시아족으로 보기도 한다.704)金貞培,<古朝鮮의 民族構成과 文化的 複合>(≪白山學報≫ 12, 1972). 그러나 두 견해는 종래와는 달리 최근 고고학·인류학 등의 연구성과에 기초를 두고 제시되었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전자의 경우 濊와 貊을 갈라서 예는 빗살무늬토기인으로, 맥을 민무늬(無文)토기인으로 보고 있으나, 예와 맥의 구분이 타당한 것인지 또는 예가 맥보다 앞서는 신석기인인지 등은 문제점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 신석기시대를 단군조선에 해당하는 시기로 보면서 곰숭배사상이 단군신화나 고아시아족에 모두 나타나고 있으므로 결국 한반도 신석기인과 고아시아족과는 일치한다고 보았으나, 알타이족에도 곰숭배사상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705)李基白·李基東, 앞의 글.

 다만 새로운 토기의 사용이 단순한 문화의 변화만이 아니라 새로운 종족의 출현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체로 학계에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따른다면, 신석기시대에 있어서는 세 차례에 걸쳐서 종족의 이동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같은 종족 안에서도 여러 다른 계통이 있을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종족의 변화에 대한 문제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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