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3. 신석기시대의 생업과 사회
  • 2) 사회
  • (2) 교역

(2) 교역

 신석기시대에는 아직 씨족사회내에서 자급자족에 의한 생활이 기본적이나 후기에 농경이 시작되고 생활내용이 다양해짐에 따라 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을 다른 씨족과의 교류를 통하여 얻었으며 이러한 행위를 물물교환이라 한다. 또한 이러한 교역행위는 생각보다 광범위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역은 첫단계로서 물물교환을 통해서도 가능하였지만 식량·재료 등을 구입해 옴으로써 현지에서 제작하여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물물교환도 이루어졌던 바, 이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에서 시작되어 외국으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점판암이나 기타 특수한 석재를 구하기 위해서는 물물교환에 의한 교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꾸미개류인 옥제품이나 옥의 원석은 반드시 교역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옥제품의 경우 한반도 신석기시대에는 두만강유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옥의 원석은 지리적으로 시베리아·만주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두만강유역과 이들 지방과의 교역활동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는 자료로 중요하다.706)金元龍,<新石器文化-生業經濟>(≪한국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73).

 또한 춘천 교동유적707)金元龍,<春川 校洞穴居遺蹟과 出土遺物>(≪歷史學報≫ 20, 1963), 1∼27쪽.에서도 백색의 대롱옥(管玉)이 출토되고 있는데 대롱옥과 함께 납작바닥〔밑〕의 빗살무늬토기는 당시 이 지역과 두만강유역의 함경도지방과의 교역활동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함경도지방에서 재료를 구해 와서 스스로 가공했던 제품으로 생각되어진다.

 단양 상시바위그늘유적708)손보기,<단양 상시유적 발굴중간보고>(≪韓國古代史照明≫, 忠北大, 1981).
홍현선,<상시 3바위그늘의 문화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7).
은 내륙 깊숙한 남한강안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으로 여기에서는 동남해안의 깊은 바다 모래땅에서만 서식하는 전복과 투박조개가 출토되었다. 이들 조개류는 여기에서 출토된 덧무늬(隆起文)토기와 함께 이 내륙지방과 동남해안지역과의 교역활동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서울 암사동유적709)金元龍,<岩寺里遺蹟의 土器·石器>(≪歷史學報≫ 17·18, 1983).
―――,<岩寺洞江岸遺蹟 發掘報告>(≪歷史敎育≫ 13, 1970).
金光洙,<岩寺洞櫛文土器遺蹟 發掘槪要>(≪考古美術≫ 9-11, 1968).
金鍾徹,<서울 성동구 암사동 선사시대 유적발굴>(≪박물관뉴우스≫ 18, 1971).
―――,<서울 岩寺洞先史聚落址>(≪韓國考古學年報≫ 2, 1975).
―――,<岩寺洞新石器時代 住居址調査>(≪韓國考古學年報≫ 3, 1976).
李白圭,<岩寺洞新石器時代 住居址調査>(≪박물관신문≫ 51, 1975).
任孝宰,≪岩寺洞≫(서울대 고고인류학총간 11, 1985).
―――,≪岩寺洞遺蹟 緊急發掘調査報告≫(1983).
이기길·황선옥,<암사동유적의 신석기시대 뾰족밑토기연구>(≪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에서의 물결점줄무늬(波狀點線文)가 새겨진 토기의 바탕흙(胎土)은 활석이나 석면이 섞인 점토질로서, 이는 운모가 섞인 사질계의 바탕흙으로 만들어진 빗살무늬토기가 우세한 이 지역에서는 다른 전통의 토기제작기술이 유입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 기술은 주로 대동강유역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곳과 대동강유역과의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암사동유적에서는 강안유적이지만 담수산과 바닷산의 조개가 함께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한강을 통하여 서해안 도서지방의 주민들과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710)金元龍, 앞의 글.
島津義昭,<日本の文物交流>(≪季刊考古學≫ 38, 1992), 54∼58쪽.

 미사리유적711)金元龍,<廣州 渼沙里櫛文土器遺蹟>(≪歷史學報≫ 14, 1961).
崔淑卿,<渼沙里遺蹟의 一磨石器>(≪考古美術≫ 4-6, 1963).
金鍾徹,<廣州 渼沙里櫛文土器遺蹟에 對한 小考>(≪韓國考古≫ 1, 1967).
任孝宰,<渼沙里緊急發掘調査>(≪韓國考古學年報≫ 8, 1981).
尹世英,<渼沙里住居址>(≪史叢≫ 25, 1981).
渼沙里遺蹟은 1988∼1992년에 걸쳐 숭실대를 주관으로 하여 경희대·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한양대가 합동으로 발굴하여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渼沙里先史遺蹟發掘調査團,≪渼沙里≫Ⅰ∼Ⅳ(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 1994).
은 한강 중류지역에 위치하는 유적이지만, 여기에서 두만강유역의 동북지방에서 유행했던 번개무늬(雷文)토기가 출토된다는 사실은 이 지역과 동북지방이 서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산리712)서울대박물관,≪鰲山里遺蹟≫(서울대 考古人類學叢刊 9, 1984).
―――,≪鰲山里遺蹟≫Ⅱ(서울대 考古人類學叢刊 10, 1985).
―――,≪鰲山里遺蹟≫Ⅲ(서울대 考古人類學叢刊 13, 1988).
와 동삼동유적713)金元龍,<新石器文化-各地方의 土器·石器·骨角器>(≪한국사≫ 1, 1973).
及川民次郞,<南朝鮮牧ノ島東三洞貝塚>(≪考古學≫ 4-5, 1931).
橫山將三郞,<釜山府絶影島東三洞貝塚報告>(≪史前學雜誌≫ 5-4, 1933).
Sample, L. L., Tongsamdong : A Contribution to Korean Neolithic Culture History, Arctic Anthropology Ⅺ-2, 1974.
을 비롯하여 한반도 동북부와 남해안지역 각 유적에서는 흑요석제 석기가 다량 출토되고 있는데 흑요석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생산되는 곳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 석기의 원석을 어느 다른 지역으로부터 교역을 통하여 구입하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흑요석의 산지로 밝혀진 곳은 백두산·시베리아·일본 五島諸島 등으로서 남해안지역의 흑요석기는 한반도 동북부지방과의 교류를 통하여 구하였을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남해안지역의 유적에서는 흑요석기와 함께 간혹 일본 죠몬(繩文)토기조각도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일본 북규슈지방과의 교역활동을 통해 이키섬(壹岐島) 등에서 흑요석의 원석 자체를 가져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의 활발한 교역이나 물물교환은 특히 남해안지역과 일본의 규슈지방과의 사이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흑요석 외에도 남해안지역의 빗살무늬토기가 북규슈지방에 전해져 일본 죠몬시대의 토도로키식(轟式)토기 또는 소바타식(曾畑式)토기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것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흑요석과 같은 희귀한 광물 등은 교역이나 문화전파의 경로 등을 추정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교역활동 등에 사용된 물자로는 모피·건어·특수석기·목기·꾸미개·뼈 또는 뿔제품 등이었을 것이고 그물이나 직물 따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고기잡이 위주의 집단과 농경 위주의 집단이 분리되어 상호간 필요한 물품을 교역활동을 통해 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