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4. 주변지역 신석기문화와의 비교
  • 2) 동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이동
  • (2) 남해안계와 규슈지역의 신석기문화

(2) 남해안계와 규슈지역의 신석기문화

 아직 확실한 유적에서의 출토된 예가 없는 短斜線文系 아가리무늬토기를 설정하여 중·서부지방 초창기토기로 명명한 바 있다. 따라서 口緣短斜線文·胴部魚骨文·底部放射線文의 고전식 토기인 암사동 Ⅰ식토기를 전기 전반에 편년하고, 이 시기의 늦은 시기에 이 토기양식이 중부 동해안지방과 남부지방으로 널리 퍼져 나가 두 지역의 토기문화에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때 중부 동해안지방은 덧무늬토기문화권에서 벗어나 지역적 특징을 보여주는 오산리 평저 Ⅱ식에, 남해안지방은 刺突文·押引文·沈線文이 베풀어지는 영선동식토기가 전단계의 토기양식인 덧무늬와 침선문이 결합된 말기형덧무늬토기와 병존하는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기는 중·서부지방의 신석기시대 전기 중반인 BC4,500∼4,000년 무렵으로 생각된다(<표 1> 참조).

시 기 초 창 기 전 기 중 기 후 기 민무늬토기시대
지 역
대 동 강
재 령 강
短斜線文系口緣
文樣土器(未發見)
岩寺洞Ⅰ式
   岩寺洞Ⅱ式
 
岩寺洞Ⅱ式·金灘里Ⅰ式
金灘里Ⅱ式 팽이形土器
한 강   〃
      〃
       岩寺洞Ⅱ式 岩寺洞Ⅲ式
內坪式(?)
팽이形土器
紅陶
孔列土器
서해도서
 
서 해 안
  〃
      〃
        矢島式
      岩寺洞Ⅱ式
 
 
矢島式
岩寺洞Ⅲ式
栗里式
北村里式
漢江式無文土器
중 부
동 해 안
隆起文土器
-鰲山里平底Ⅰ式
鰲山里平底Ⅱ式
 -岩寺洞Ⅰ式
岩寺洞Ⅱ式(?)
      鰲山里Ⅲ式
?
?
孔列土器
紅陶
금 강 隆起文土器(?) 岩寺洞Ⅰ式   岩寺洞Ⅱ式 錦江式 漢江式無文土器

<표 1>한반도 중·서부지방 토기편년

韓永熙,<新石器時代 中·西部地方 土器文化의 再認識>(≪韓國의 農耕文化≫5, 京畿大 博物館, 1996), 140∼145쪽.

 영선동식토기는 목단지·바리·둥근바닥 깊은바리형의 기형을 갖추고 있는데 남해안 일대는 물론 서해안의 부안 界火島, 군산 앞바다의 모래섬을 비롯한 서해 중부지방과 동해안의 경주 하서리799)洪鎭根,<慶州市 陽南面 下西里 新石器時代遺蹟>(≪國立慶州博物館年譜≫, 1995), 133∼146쪽.·양양 오산리를 비롯한 중부 동해안지방에까지 널리 분포하는 토기양식으로, 처음에는 덧무늬토기와 공존하나 후기가 되면 독립된 지역토기로 성립되는 한 시기를 긋는 토기양식이다. 이러한 영선동식토기가 남해안 일대에서 제작되고 있을 때 규슈지방으로의 진출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니시가라츠(西唐津)토기라는 새로운 양식의 토기를 성립시킨다.800)李相均,<東아시아 속에서의 韓國 新石器時代文化>(≪第9回 韓國古代學會 學術發表要旨≫, 1996), 66∼67쪽. 한편 토도로키 B식토기는 단순한 깊은바리형의 전통을 갖는 여러 줄의 橫隆帶文토기로의 변천과 함께 자돌문·압인문·침선문과 덧무늬가 결합되는 토기, 이들 무늬 중 덧무늬가 생략되는 토기, 민무늬토기 등이 같이 출토되는 토기양식인 후카호리(深堀)식·노구치(野口)식토기로 변화해 간다.801)水ノ江和同,<曾畑式土器の成立>(≪季刊考古學≫38, 雄山閣出版, 1992), 75∼78쪽. 이러한 양식의 토기들이 서북규슈에 존재하고 있을 때 남해안으로부터 세 부위 무늬에 기본을 두고 있는 빗살무늬토기가 전해져 새로운 토기양식인 소바타식(曾畑式)토기로 성립되는데 그 연대는 BC4,000년 전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소바타식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구연부·동부·저부의 세 부위에 서로 다른 내용의 무늬가 베풀어져 기본적으로 빗살무늬토기의 한 지역양식으로 여겨지나 貝殼條痕文에 의한 기면 조정이 토기제작의 기본적인 방향이 되며 한편 동부에 횡문양구획대를 돌리고 그 안에 무늬를 채우고 있어 토도로키 B식토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출되는 석기와 골각기에도 규슈지역 이른 시기 이래의 문화전통을 갖고 있어 지역적 특성을 지니면서 변화하였음이 인지된다.

 이제까지 남해안 덧무늬토기와 규슈지역 토도로키식토기가 각각 영선동식토기와 침선문계빗살무늬토기로, 니시가라츠식토기·후카호리식·노구치식토기와 소바타식토기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덧무늬토기와 규슈지방 덧무늬 및 토도로키식토기는 서로 유사한 문화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계통을 달리하는 지역적 토기양식인 것으로 보았으나 규슈의 니시가라츠식토기는 남해안의 영선동식토기의, 소바타식토기는 침선문계빗살무늬토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규슈지역의 토기양식인 것으로 밝혀 보았다. 그렇다면 전시기 깊은 교류 속에도 서로의 독자적 문화를 유지해 온 두 지역 주민들이 영선동식토기를 사용하는 시기에 왜 남해안계의 문화가 갑자기 규슈에 대거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에 접하게 된다.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 아카호야화산재설이 아닐까. 아카호야화산재설은 BC4,500∼4,000년 사이에 가고시마(鹿兒島)縣 三島村의 硫黃島에서 화산이 폭발할 때 쌓인 화산재로 인해 서북규슈의 내륙부와 먼 섬지역을 제외한 규슈 전역의 인간과 동·식물이 사멸되었고 이후 식생이 회복되는 시기에 한반도 남해안 쪽에서 대거 주민의 유입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선 영선동식토기와 빗살무늬토기의 전래시기가 화산폭발시기와 멀지 않다는 점에서 논리적 뒷받침이 주어진다. 한편 규슈에 인간이 살아 남아 있던 서북규슈에서는 가장 오랜 소바타식토기가 출토되는 반면, 화산재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던 가고시마현과 그 주변 섬들에서 가장 늦게 소바타식토기가 등장하는 점, 그리고 일단 성립된 소바타식토기가 빠른 속도로 남진하는 모습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겠다.

<韓永熙>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