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Ⅱ. 신석기문화
  • 4. 주변지역 신석기문화와의 비교
  • 3) 서북한·동북한지역과 요동반도의 신석기문화
  • (4) 신암리 Ⅰ기층, 농포·호곡동 Ⅰ기층과 우가촌 하층기

(4) 신암리 Ⅰ기층, 농포·호곡동 Ⅰ기층과 우가촌 하층기

 요동반도지역의 토기 편년상으로 소주산 상층기의 다음에 후속되는 것은于家村 하층기로써 그 대표적인 유적은 우가촌 하층과 雙砣子 Ⅰ기층이다.834)許玉林, 앞의 글(1982), 26쪽. 이 시기는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이다. 요동반도지역에 있어서 우가촌 하층유형과 전시기인 소주산 상층유형과의 층위상의 관계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나, 유물의 형태상 두 유형의 선후관계는 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두 유형의 유적에는 산동 용산문화와 관련되는 磨光黑皮陶·鏤孔豆·帶把杯가 있고, 弦文·乳釘文이 있는 점에서 상호관계되는 것은 분명하나, 곽가촌 상층에는 卵殼黑皮陶·鬹 등이 있으나 우가촌 하층에는 보이지 않고, 재지계토기에 있어서도 소주산 상층기까지는 주류를 이루던 심발형의 평저토기가 우가촌 하층기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835)許玉林,<略談郭家村新石器時代遺址>(≪遼寧大學報≫ 1980-1), 45∼46쪽.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북한과 압록강 북안지역에서 소주산 상층에 대비되는 것은 쌍학리와 석불산유적이고, 여기에 후속되는 것은 신암리 Ⅰ기층이다. 한편 소주산 상층기에 후속되는 것은 우가촌 하층기이나 우가촌 하층과 신암리 Ⅰ기층의 상호관계는 층위상으로는 해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두 유적의 토기를 보면 문양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평저심발토기와 구연융기대문토기(이중구연·첩순토기)가 완전히 소멸되고, 외반구연호와 유경호가 주류인 점, 현문·유정문·彩繪陶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두 유적 상호간의 관계는 밀접하고 시기도 근접한 것으로 보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836)白弘基, 위의 글, 89쪽.

 우가촌 하층기와 신암리 Ⅰ기층에 병행되는 동북지방의 유적은 농포와 호곡동 Ⅰ기층이다.837)白弘基, 앞의 글(1993), 116∼124쪽. 농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는 평저심발의 기형이나 빗살무늬의 전통이 여전히 존속되고 기하문으로 「농포형뇌문」이 나타나는데, 「농포형뇌문」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석불산과 쌍학리유적에서도 동일한 문양이 보이고 신암리 Ⅰ기층에서도 보이지만, 신암리 Ⅰ기층에서는 「농포형뇌문」의 변형으로 보여지는 「신암리형뇌문」이 주류를 이룬다. 호곡동 Ⅰ기층에서는 평저심발이 보이기는 하나 소멸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쌍학리에서 볼 수 있었던 외반구연의 유경호가 많아지고, 신암리 Ⅰ기층의 굽이 높은 그릇과 유사한 굽손잡이 그릇이 출토되며 신암리 Ⅰ기층 유형의 뇌문도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서 호곡동 Ⅰ기층의 토기문양은 퇴화상이 뚜렷하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신석기시대 최말기에 있어서 요동반도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의 평저유형토기는 상호간에 접촉되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각개 지역의 변천양상은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면 요동반도의 우가촌 하층기의 토기 중에는 평저심발형토기가 보이지 않고 재래의 문양기법도 소멸되는데 비해서, 병행기의 서북한의 신암리 Ⅰ기층에서는 역시 평저심발형토기는 소멸되나 재래의 문양기법은 존속되며, 동북한의 호곡동 Ⅰ기층에서는 재래의 기형이나 문양기법이 모두 존속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각개 지역간의 차이는 문화의 본질적 차이라기보다는 유적의 지리적 위치의 차이에서 초래된 결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동북아지역의 토기문화는 주민들의 장기 토착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인식된다.

<白弘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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