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1)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청동기시대의 개념

(1) 청동기시대의 개념

 청동기시대가 되면 전세계적으로 사회조직과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가로 발전된 사회에 대해서 학자들은 크게 도시·문명·국가로 나누어 고찰한다. 특히 미국 고고학계에서는 1950년대에는 도시, 1960년대에는 문명,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국가에 중점을 두어서 연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사회변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어 신석기문화를 농업혁명, 청동기시대를 도시혁명으로 명명하고 청동기시대에 도시가 발생하며 문명이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0001)Childe, V. Gordon, Man Makes Himself, London, Watt, 1936.
―――, What Happened in History, Harmondsworth, Penguin, 1942.
그 구체적인 증거로 문자의 사용, 畜力의 이용, 바퀴달린 마차와 쟁기의 사용, 야금술, 규격화된 도량형, 배의 건조, 잉여생산, 직업의 분화와 장인의 발생, 관개기술, 그리고 수학의 발달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집트와 수메르문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문명에 충족되는 조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수메르문명의 경우는 도시국가의 발생이 문명의 발생과 일치하지만 마야문명과 같이 도시가 발생하지 않은 채 국가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어서 도시·문명·국가의 정의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각 지역적 특성에 맞는 여러 가지 수정안이 제시되었다.

 문명에 대한 연구 초기에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예처럼 ‘灌漑文明’이라고 명명할 만큼 관개를 중요한 요소로 보았으나 세계 각지의 여러 문명에 대한 조사 연구가 축적되면서 현재로는 문명의 발생요인이 한두 가지의 요소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한편 국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무력의 합법적인 사용과 힘의 중앙집권화를 들기도 하듯이0002)Sahlins, Marshall D., Tribesmen, Englewood cliffs, Prentice Hall, 1968.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국가에 대한 정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계층이나 계급 분화, 무력의 합법적 사용, 제도화 등을 그 요소로 꼽고 있다. 문명은 도시보다는 포괄적인 의미로 문자나 도시화에 기반을 둔 인간문화의 한 단계로 볼 수 있으며, 국가는 그러한 문명을 배경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크게 도시·문명·국가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지고 있다. 이들 개념간에는 세부적인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인류문화의 발생과 전개에 대하여 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고고학적인 자료를 이용하여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해내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하겠다.

 청동기시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청동기시대’라는 용어의 사용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선사시대를 이해할 때 단지 ‘石器時代’라고 통칭하던 것에서 석기-청동기-철기의 3시기로 나눈 것은 고고학이 호고적인 딜레땅띠즘에서 학문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3시기법은 스칸디나비아지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수립되어0003)대표적인 인물은 톰센(Thomsen;1788∼1865)과 월사에(Worsaae;1821∼1885)이다. 톰센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무기나 공구가 동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인간이 이용한 최초의 금속은 구리라고 보았다. 톰센의 뒤를 이어서 덴마크 국립박물관장이 된 월사에는 석기-청동기-철기의 3시기가 덴마크지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보편적인 편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실제 유적의 층서양상을 통해 입증하였다.
Thomsen, Christian J., Ledetraad til Nordisk Oldkyndighed, Copenhagen, 1836.
―――, translated by Lord Ellesmere, A guide to Northern antiquities, London, 1848.
당시 유럽 각국에서 소장하고 있던 수집유물들에 대한 정확한 편년적 위치를 결정하게 해준 고고학적 시기구분의 방법론적 근거가 되었다. 물론 아프리카 일부지역이나 아메리카지역과 같은 경우에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은 채 식민지화되고 동시에 철기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예외가 있으나 3시기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고학적 편년방법이다. 우리 나라 역시 이 3시기법에 기초하여 선사시대의 편년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 일부지역에서는 ‘純銅時代’(The Copper Age;The Chalcolithic)를 거쳐서 청동기시대로 진입했다. 순동시대란 아직 청동이나 기타 금속 가공기술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연동을 이용하는 시기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과도기적 시기이며 문화상은 대체로 후기 신석기문화에 속한다.

 최초의 純銅(紅銅) 사용 흔적은 터키 아나톨리아고원의 차이외뉘유적에서 보이며, 그 연대는 기원전 7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의 차탈휘윅유적도 기원전 6500∼5650년이나 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신석기시대에서도 발견되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로 B.P.6840±250, 6620±250년(수륜보정을 할 경우 1000년 정도 더 올라감)이 나왔다. 이집트를 비롯한 서아시아의 순동시대는 3기로 나뉘어지는데,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하라프(Halaf)문화,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가장 먼저 에리두(Eridu)문화가 발생했으며 그 다음 시기가 되면서 우바이드(Ubaid)문화가 메소포타미아의 전지역에 분포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경우 아나톨리아·코카서스·이란 등 주변지역에서도 순동시대가 있었다.

 중국에서도 馬家窯文化와 齊家文化에서 紅銅(순동)을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夏家店 下層文化의 大成山遺址에서도 홍동패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처럼 하나의 시기를 설정할 만큼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순동시대에는 자연동을 그대로 두들겨 도구를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홍동의 경우 용융점이 1,083℃나 되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는 제련 등의 가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청동은 순동과 주석의 합금으로 용융점은 700∼900℃ 정도로 낮은 데다가, 홍동보다 훨씬 강해서 더 넓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이러한 순동시대를 일컬은 영어의 ‘The Chalcolithic’을 ‘金石倂用期’라 번역하였다. 즉 김해패총을 발굴한 일본인 학자들은 석기·골각기 등과 함께 철기가 공반된 것을 들어서 그 문화를 금석병용기에 속하는 문화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가 석기를 사용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를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철기사용의 시기로 이어졌으며, 중원대륙이 청동기시대를 영위할 때에도 석기시대의 상태로 정체되어 있었다고 보았다.0004)梅原末治·濱田耕作,<金海貝塚發掘調査報告>(≪大正九年度古蹟調査報告≫1, 朝鮮總督府, 1923), 45∼47쪽.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금석병용기시대(순동시대)는 청동기 사용 이전에 순동을 사용한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에도 석기를 매우 많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서 순동 사용의 증거가 전혀 없는 한, 순동시대 혹은 금석병용기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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