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2) 인골 및 편년

2) 인골 및 편년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인골자료는 그 성별, 나이, 영양 및 질병 상태 등을 추론할 수 있고 나아가서 당시의 사회성격을 아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즉 주로 매장유적에서 출토되는 인골자료는, 자연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당시인들의 영양상태와 식량공급에 관한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제도의 성격을 추론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토양이 산성이기 때문에 인골이 유적에 잔존해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으며, 게다가 인골을 연구하는 形質人類學(Physical Anthropology)의 연구성과 마저 그리 많지 않다.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뼈의 계측치 소개와 주변지역 인골의 평균치와의 대입 등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도 자료의 축적이 되어 있지 않아 문화의 연구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에는 인골에 대한 단순한 계측치의 보고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인골의 분석과 해석을 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0050)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 동향에 대하여는 崔夢龍,<韓國考古學에 있어서 自然科學的 硏究>(≪韓國上古史學報≫13, 韓國上古史學會, 1993), 7∼92쪽 참조.

 청동기시대의 인골 역시 그 출토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함북지방의 3지역, 그리고 남한에서는 충북 제원 황석리와 춘천 중도0051)중도의 경우, 탄소연대를 참조한다면 철기시대 전기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나 지석묘라는 묘제가 주로 청동기시대에 사용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포함시킨다.의 예가 유일하다. 각 유적별 인골출토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유 적 유 구 성별·나이 및 출토상황
서포항 패 총 성인남자 3개체분, 두개골은 초단두형
신장은 151.3∼163.4cm
범의구석 주거유적 성인여자·노년남자
두개골·안면골·사지골 일부가 잔존
황석리 지석묘 남자, 동침앙와장, 174cm의 장신
두개는 장두형
중 도 지석묘 여성 유아(4∼7, 8세)
화장 흔적, 앙와굴절장
송평동 패 총 동서방향으로 신전앙와장
4기중 3기는 단장, 1기는 합장됨
초 도 패 총 14개체분 발견(유아뼈 1개체 포함)
반굴신장으로 매장

<표 1>우리 나라 청동기시대 인골 출토 일람표

 위의<표 1>에 보이듯이 서포항유적에서는 완형에 가까운 두개골 2점과 함께 300여 점의 인골편이 출토되었다. 그 신장은 보통 크기인 151.3∼163.4cm로 추정된다. 두개골의 형태는 머리 길이가 상당히 짧은 초단두형이며 머리의 높이로 보면 고두(높은 머리)에 속한다.0052)백기하,<웅기 서포항 원시유적에서 나온 인골>(≪고고민속≫1966-2).

 무산 범의구석의 경우 그 출토지가 매장유적이 아니라 주거지 내부였다. 이처럼 우리 나라에서 주거지 안에서 인골이 출토된 것은 범의구석이 유일한 경우이다. 주거지 내의 출토 인골은 2호 집자리에서 나온 것으로 그 정형으로 보아서 정상적인 매장으로 보기는 어려운 상태이다.0053)황기덕,<무산읍 범의구석 원시유적 발굴 중간 보고>(≪문화유산≫1960-1), 56쪽. 범의구석의 인골은 성인여자와 노인남자인데 이들의 특징은 중국·일본과는 다른 한국인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0054)백기하,<무산 범의구석 원시유적에서 나온 인골에 대하여>(≪고고민속≫1965-3).

 나진 초도유적에서 발견된 인골 가운데 제1호 인골은 60∼70세의 여성으로 신장은 155cm인데, 심한 근육운동의 흔적이 보인다. 제10호 인골은 160cm 정도의 성인남성으로 보인다. 그 골격을 볼 때 오늘날의 한국인과 큰 차이가 없다.0055)최명학,<라진초도 원시유적출토 인골감정보고>(≪라진초도원시유적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 사회과학원출판사, 1956).

 일제시대에 발굴된 송평동의 인골에 대하여 당시에는 석기시대로 비정하였으나,0056)今村豊,<朝鮮咸境北道雄基附近て發掘された石器時代人骨に關て>(≪人類學雜誌≫17, 1932). 일제시대에는 청동기시대라는 시기를 설정하지 않은 채 석기시대로 통칭되었다. 북한에서 이를 오동유형의 청동기문화로 보고 있다. 이 인골들은 머리를 북동쪽에, 다리는 서남쪽에 두었으며, 伸展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같이 발굴된 유물로는 彩文土器·石斧·石鏃·管玉·骨針·貝輪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유적의 인골 4구는 각기 신장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유적의 주인공은 고아시아족과 알타이족이 혼재한 혼혈인종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에 대해 북한에서는 우리 민족의 단혈성 기원을 부정하고 혼혈집단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0057)장우진,<송평동 유적 주민들을 통하여 본 우리나라 원시시대의 족속문제>(≪조선고고연구≫1986-4,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신장의 차이는 같은 인종간에서도 사람에 따라 심하기 때문에 신장만으로 인종의 귀속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남한의 충북 제원군 황석리의 고인돌에서 나온 인골은 우리 나라 인골의 일반적 특징인 단두가 아니라, 초장두형으로 밝혀져 흥미를 끌고 있다.0058)羅世振·張信堯,<黃石里 제13號 支石墓에서 출토한 古墳骨의 一例>(≪韓國支石墓硏究≫, 國立中央博物館, 1967). 초장두형 두개골은 서양인계통의 특징이지만, 유골이 땅의 압력, 지석의 무게 등 여러 변수에 의해서 매장 후 변형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근래에 발견된 북한의 인골자료 가운데 만달인과 승리산인(승리산인은 후기 구석기시대, 만달인은 중석기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이 장두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0059)장우진,≪조선사람의 기원≫(사회과학출판사, 1989), 95∼98쪽.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장두형머리가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 나라 사람들의 두개골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알려진 단두형의 머리 외에도 장두형의 형태가 어느 정도 존재했는지의 문제는 더 많은 자료가 확보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1983년에 발굴된 춘천 중도의 1호 지석묘에서도 인골이 출토되었다. 이 춘천 중도 인골0060)崔夢龍,<春川中島와 義城塔里 出土人骨>(≪閔錫弘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三英社, 1985), 697∼705쪽.의 출토상황을 보면 동·서 길이 77cm, 너비 50cm, 깊이 20cm의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그 자리에 놓고 화장한 다음 다시 그 위에 깊이와 너비 각각 90cm, 두께 9∼20cm의 흑운모 편마암의 덮개돌과 판돌로 이루어진 돌널을 만들어 하나의 지석묘를 이루었다. 여기에서는 인골의 부스러기와 숯덩이들만 나왔으며 그 밖의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석관을 둘러싼 적석에서 석촉과 무문토기가 발견되었다. 인골과 같이 발굴된 숯덩이의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B.P.1935±90이라는 연대가 나왔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추정연대보다는 약간 늦다. 발굴 당시의 숯덩이들과 뼈부스러기를 경화 처리하여 매장상태를 재현한 결과 시신은 측신굴절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그 위에 나무를 쌓아올려 화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화장한 인골에서 보이는 동심파상문이나 잘게 갈라터진 흔적이 이 인골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성별은 골반에 있는 대좌골절흔(greater sciatic notch)의 폭이 넓고 깊지 않은 점에서 여자로 추정되며, 뼈가 얇고 색깔은 아직 노랗고 뼈의 굵기와 크기가 가늘고 작아서 어린아이로 추정된다. 기타 여러 뼈의 특징을 종합한다면 4세 이상에서 7∼8세 정도의 어린아이로 보여진다. 이 밖에 대퇴골 안쪽에 나타난 병상의 흔적은 뼈가 녹아서 엉겨붙은 것인지 병으로 인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만약 대퇴골이 안쪽으로 자라서 생긴 흔적이라면 보행이 어려울 정도의 병을 앓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중도의 인골은 그 나이가 많아야 7∼8세 정도되는 어린아이가 지석묘와 같은 묘제에 매장된 것으로, 지석묘를 만든 사회에서 지위가 세습되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예는 전남 나주 판촌리 지석묘의 묘실구조에서도 보인다. 아울러 이 시기의 매장방식 가운데 하나가 화장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화장한 위에 지석묘를 설치한 것도 당시의 묘제연구에 하나의 자료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주변지역의 인골자료와 비교해 보자. 청동기시대에 우리 나라 주위의 여러 문화를 담당한 주민들의 형질상 특징에 대한 문제로는 크게 중국 동북지역의 琵琶形銅劍文化와 吉林 西團山文化 주민들의 족속문제와 일본지역의 죠몬(繩文)-야요이(彌生)교체기에 등장하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이는 渡來人 문제를 들 수 있다.

 일본에서 도래인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50년대에 규슈(九州) 야마구치현(山口縣) 도이가하마(土井ケ浜)遺蹟에서 기존의 인골들보다 신장이 훨씬 크고 두장·두폭·두장폭 지수 등에서도 기존의 죠몬시대 인골과 차이가 있는 인골들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이 인골자료를 우리 나라 남부와 연결시켜 이 시기에 한반도로부터 대량의 이주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0061)金關丈夫,<彌生時代人>(≪日本の考古學≫Ⅲ-彌生時代篇, 和島誠一 編, 東京;河出書房新社, 1972). 뿐만 아니라 규슈에서 새로 발견된 니이마치(新町)유적에서는 우리 문화의 영향이 명백히 보이는 유구라고 할 수 있는 지석묘에서 죠몬시대의 전통이 보이는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우리 나라 남부지방의 예안리나 늑도에서 발견된 인골의 신장이 반드시 크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0062)春成秀彌,<朝鮮半島における戰亂と人ケの移動>(≪彌生時代の始まり≫, 考古學叢書 11, 東京大學出版會, 1989). 한편 우리 나라 남부지방인 늑도의 철기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일본 인골에서 많이 보이는 발치된 인골과 야요이 토기편이 발견되어서0063)김진정 외,<삼천포시 늑도인골 출토 인골예보>(≪伽耶通信≫17, 釜山大, 1989). 남부지방과 일본과의 인적·물적인 교류가 상당히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죠몬인과는 형질상 차이가 보이는 집단이 한반도에서 직접적으로 많이 이동해갔기 때문인지, 아니면 야요이시대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 밀려온 선진문화의 여파에 의해서 발생한 생업경제의 변화에서 비롯된 자체적인 변화인지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비파형동검이 많이 출토되어 우리와 관계 깊은 중국 동북지방에서도 몇몇 인골출토가 보고되었으므로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골은 비파형동검 출토 유적인 沈陽 鄭家窪子,0064)韓康信,<瀋陽鄭家窪子的兩具靑銅時代人骨>(≪考古學報≫42, 中國科學院 考古硏究所, 1975). 赤峰 夏家店과 紅山後,0065)濱田耕作 外,≪赤峰紅山後≫(東亞考古學會, 1932). 南山根,0066)中國科學院考古學硏究所 體質人類學組,<赤峰, 寧城夏家店上層文化人骨硏究>(≪考古學報≫43, 1975). 등지에서 보고되었다. 요동에 위치한 심양 정가와자유적의 M6512호와 M659호에서 2구의 인골이 보고되었는데, 단두형에 머리 높이도 고두여서 우리 나라 두개골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므로 우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중국측에서는 이 지역에 山戎·東胡·貊 등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으므로 이 인골들도 동일한 민족에 속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북한에서는 이들이 현대 북중국인의 특징을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고두·눈확의 크기 등의 형질적인 자료와 비파형동검·석관묘·세문경 등의 유물이 여타 요동지방 문화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서 고대 조선족의 일부라고 보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편 吉林省 西團山遺蹟0067)賈蘭坡·顔 誾,<西團山人骨的硏究報告>(≪考古學報≫32, 1963).에서는 2구의 인골이 보고되었는데, 그 형질적인 특징이 몽고인계의 특징을 보이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인골과 달리 퉁구스계에 근접하고 있어, 우리 민족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것으로 보여진다. 북한에서는 서단산의 인골이 한국인과 많이 상이한 점은 사실이나 다른 바이칼호 부근의 퉁구스족보다는 우리와 가깝다고 본다.

 그런데 이상의 연구는 각 유적에서 나온 극소수의 인골에 대한 분석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과연 이 인골들의 수치가 각 유적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대표할 만한 타당성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자료를 종합해 본다면, 정가와자를 포함한 요동지역의 문화가 비파형동검·미송리형토기·세문경과 석관묘·토광묘 등이 보이는 古朝鮮의 문화와 가장 근접하고 있다. 그리고 정가와자의 인골이 우리 나라 두개골의 중요 특징인 단두형과 고두형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형질적인 특징과 가장 관련이 많으며, 같은 갈래의 인종으로 보아도 큰 잘못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밖에 요서지방의 비파형동검문화와 서단산문화의 인골들도 어느 정도 형질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0068)공통적으로 고두(높은머리)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고두라는 특징 하나만으로 형질적인 동질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성급하게 이들이 한국민족에 귀속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에 우리 나라의 민족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인골에 대한 연구는 우리 나라 민족형성기의 형질적인 특성을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대로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는 너무 적은 상태이어서 우리 나라의 민족형성에 대해 어떠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발견되고 다방면의 연구가 요구된다. 또한 민족형성의 문제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중도인골의 분석에서 보듯이 영양상태·질병 등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줄 수 있는 증거들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崔夢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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