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3) 청동유물의 분포와 사회
  • (3)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3)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古朝鮮의 문화변천 과정을 정리할 때, 무엇보다도 문헌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의 시공간적인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에 따라 변하는 고조선 영역이 기록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헌기록에 고조선의 영역 변동을 추적하는 데 단서가 되는 중요한 지리적 경계는 강이다. 여러 강이 정치 혹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일정의 경계로 이용되고 표현되어 왔다. 문제는 그 강이 오늘날 어느 강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는 점이다. 고고학 측면에서도 종종 강은 유적·유물군을 구분하는 문화적인 경계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정치·군사와 경제 또는 문화와의 관계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므로,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한다.

 시공간적인 틀이 분명하지 않아서도 그러하지만, 고조선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규정도 명확해야 그에 맞물리는 고고학자료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문헌기록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고, 다만 후기에 이르러서 초보적인 관료와 법체계의 내용을 통하여 일부 확인될 뿐이다.0080)≪漢書≫권 28 下, 地理志 8 下 및≪史記≫권 115, 朝鮮列傳 55. 이 정도의 문헌 자료로서는 고조선 전기 단계에 어떠한 사회체제를 갖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고학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고조선에 속한다고 추정되는 것으로서, 삼국시대의 귀중한 각종 금속공예품을 부장한 왕릉 혹은 귀족급의 대형고분에 비견되는 무덤유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고조선이 불평등 계층사회라 하더라도 고구려·신라·가야·백제 등의 기원후 국가사회보다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아울러 기원후 高塚古墳時代의 국가 영역보다 너른 범위를 단일한 정치체로 하여 통치하는 권력층이 존재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고조선의 지리적 영역은 상대적으로 보다 작은 영역의 정치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의 시기구분은 기원전 300년경 燕 침입 이전을 고조선 전기, 그 이후를 후기로 하며, 衛滿朝鮮은 따로 떼어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조선과 청동기문화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문헌사학자의 입장이 대체로 이러하므로,0081)盧泰敦,<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韓國史論≫23, 서울大, 1990), 4쪽. 이 글에서도 이를 따르고자 한다.0082)한편 북한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의 고조선 전체를 후기 고조선으로 이해하고(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조선고고학개요≫, 1977), 후기 고조선의 분기점을 기원전 5∼4세기경으로 잡고 있으나 이 연대는 초기 좁은놋단검문화에 대한 막연한 편년을 기초로 한 것이므로 따르기 어렵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