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
  • (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가. 요령식동검 유적

① 부여 송국리유적0119)韓國考古學會,<扶餘 松菊里出土 一括遺物>(≪考古學≫3, 1974).
金永培·安承周,<扶餘 松菊里 遼寧式 銅劍出土 石棺墓>(≪百濟文化≫7·8, 公州師大, 1975).
姜仁求 외,≪松菊里≫Ⅰ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국립중앙박물관, 1979).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1974년 마을 사람의 신고로 공주사대 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이 유적은 석관묘 유적으로 지표면에는 아무런 표지가 없이 작은 소나무가 덮인 언덕의 남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은 낮은 평야가 발달해 있고 구릉 사이에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어 농사에 좋은 곳이다.

 유물이 발견된 유구는 석비레층을 파고 만들었다. 지표 아래 20㎝되는 곳에 260㎝×120㎝ 크기의 장타원형 뚜껑돌이 관 전체를 덮고 있었는데 정북에서 동으로 35°기울어진 北枕이었다. 석관의 크기는 남북 205㎝, 동서 최대 폭 100㎝이며 바닥에 3장의 판석을 깔았고 네 벽은 높이 80∼90㎝의 판석을 몇 장씩 세워 조립하였다(<그림 1-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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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①>부여 송국리유적 석관묘
<그림 1-①>부여 송국리유적 석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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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장자의 왼쪽 팔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遼寧式銅劍 1점(길이 33.4㎝)·靑銅鑿(끌) 1점(길이 6.2㎝)·一段柄式 磨製石劍 1점(길이 34.1㎝)·磨製石鏃 11점(길이 19.8∼10.3㎝)·管玉 17점(길이 4.7∼3.0㎝)·飾玉 2점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는데 동검은 봉부가 발쪽을 향하고 있었고 동검 위에 관옥과 석촉들이 놓여 있었다. 주인공의 허리부분에서 봉부가 발치를 향한 마제석검이 놓여 있었고 석검보다 약간 위에서 동착이 발견되었다(<그림 1-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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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②>부여 송국리유적 출토유물
<그림 1-②>부여 송국리유적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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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고흥 운대리유적0120)有光敎一,≪朝鮮磨製石劍の硏究≫(京都大 文學部 考古學叢書 2, 1959).
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1926년 주민이 집을 짓기 위하여 터를 고르던 중 유구가 발견되었다. 지하에 놓여 있는 커다란 돌을 들어내자 석관 구조가 나왔고 여기에서 마디가 일단인 석검 1점이 묻혀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4기의 고인돌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원래는 주변에 32기의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운대리유적의 유구는 모두 개석의 아래에 매장부가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었으며 커다란 개석 아래에 네 벽을 할석으로 쌓았다. 별다른 유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고인돌떼의 서쪽 끝부분에서 지하유구의 일부가 노출되어 조사한 결과 동검 1점(현재길이 14.0㎝)이 나왔다. 그런데 이 동검은 요령식동검으로 하반부 파편으로 날부분이 깨져나가 형태를 알 수 없었으나 원래부터 부러진 동검을 부장한 듯하며 정확한 유구에서 동검이 나온 최초의 예가 된다(<그림 2>). 유구는 길이 185㎝, 폭 130㎝, 깊이 40㎝ 정도의 석곽으로 네벽을 할석으로 쌓았으며 바닥은 판석을 깔았다. 이 석곽의 바닥 중간에서 동검편이 나왔다. 조사 당시에는 지상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으나 주변 상황으로 보아 남방식 고인돌이 개석을 잃어버린 하부구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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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운대리유적출토동검
<그림 2>운대리유적출토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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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여천 적량동 상적유적0121)李榮文·鄭基鎭,≪麗川 積良 상적 支石墓≫(全南大 博物館·麗川市, 1993).(전남 여천시 적량동 전 392번지)

 1989년 3월 호남정유공장 확장공사 중 부지 안에 있는 고인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장 확장으로 지형이 바뀌어 지금은 공장부지의 최남단에 해당한다. 자연 지형은 영취산(표고 510m)에서 광양만쪽으로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산줄기 사이에 형성된 계곡 평지중의 하나이다. 남북으로 내려온 얕은 산기슭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는 3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듯하나 개석이 이동되고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7호 고인돌:괴석형의 상석 아래에 6개의 지석이 있었는데 원래는 10여 개가 있었던 듯하다. 그 아래에서 적석이 깔려 있고 가운데 할석을 이용해서 만든 석실이 나왔다. 석실 중앙에서 서쪽에 치우친 바닥에서 목제의 칼집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령식동검 1점(길이 33.6㎝)이 출토되었다(<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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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여천 적량동 상적 7호 고인돌과 출토동검
<그림 3>여천 적량동 상적 7호 고인돌과 출토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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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호 석곽형 석실:상부의 상당부분이 깎여나가 원상을 알 수 없다. 표토 아래에서 적석시설이 노출되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할석의 평면을 이용하여 만든 석곽형 매장부 윤곽이 나왔다. 내부에서 요령식동검 1점(추정길이 35.0㎝)·동모 1점(복원길이 28.0㎝), 관옥 5점(길이 0.76∼0.95㎝)이 나왔고 주변의 적석 사이에서 有溝石斧 1점, 숫돌 2점과 약 200여 편의 민무늬토기편들이 나왔다.

 4호 석곽형 석실:표토를 제거하자 바로 석곽 구조가 나왔다. 바닥에는 먼저 판석과 잔자갈을 이용하여 깔고 그 위에 할석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는데 벽의 일부는 잔자갈을 이용하여 쌓았다. 내부에서 원래의 길이가 35㎝ 정도되는 긴 요령식동검 편 1점과 민무늬토기·홍도 등의 토기편들이 나왔다.

 9호 석곽형 석실:표토 제거작업 중 적석이 노출되어 조사하였다. 비교적 큰 할석을 써서 장축이 남북인 곽을 만들고 할석 사이를 자갈돌로 채웠다.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지석이 있었고 그 위에 상석이 있는 고인돌로 추정된다. 내부에서 동검 파편 1점(현재길이 10.0㎝)이 나왔고 주변 적석층에서 민무늬토기 바닥과 홍도의 胴體部 1점, 그리고 적석 외곽에서 숫돌(길이 4.5㎝)과 石鑿 1점(길이 5.0㎝)이 나왔다.

 13호 석곽형 석실: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지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보이지않는데 만약 상석이 있었다면 지석이 없이 적석 위에 상석이 놓여 있었을 듯하다. 장축이 북동-남서이고 자연석과 할석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으며 자연석을 바닥 전면에 깔았는데 바닥 돌틈을 진흙으로 메웠다. 12호 유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검 1점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동검은 돌기부 바로 아래부분만 남아 있어 전체 형태를 알 수 없으나 꼬다리나 하반부의 확장상태로 보아 요령식동검으로 보인다(현재 길이 18.0㎝).

 21호 석곽형 석실:단면에서 석실을 확인하여 조사되었다. 지석으로 쓰였던 괴석들이 보이지 않고 뚜껑돌로 쓰였음직한 판석만 5개 보인다. 석실은

 할석으로 쌓은 석곽형이며 장축은 동서방향이고 바닥에는 자갈을 깔아 놓았다. 내부에서 요령식동검 1점, 셰일 계통의 석재편이 몇 점 나왔다. 동검은 돌기부와 봉부가 없어졌는데 일부가 부러지고 심하게 굽어 있다. 짧은 꼬다리 한쪽에 홈이 나 있고 돌기부에 해당하는 등대 단면은 타원형에 가까운 6각형으로 양면이 돌출되어 있으나 그 이하는 타원형이다. 꼬다리에는 자루에 끼워 결박하였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밑바닥을 수습 처리한 결과 목질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무자루를 쓴 것 같다. 하반부가 둥글게 기부에 이행하고 있다(현재 길이 25.8㎝).

 22호 위석형 석실:표토작업 중 돌들이 원형으로 돌려져 있었는데 표토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동검 1점이 발견되었다. 결실이 심하여 원형을 알 수 없으나 꼬다리 한쪽에 홈이 파여져 있으므로 요령식동검의 파편인 것을 알 수 있다. 등대의 단면이 타원형이고 갈린 흔적이 없다(현재 길이 7.8㎝). 상석이나 지석이 없어 석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하부에는 자연석 10여 개가 둥글게 놓여 있을 뿐 바닥에도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④ 여천 평려동유적0122)李榮文·崔仁善·鄭基鎭,≪麗川 平呂洞 산본 支石墓≫(全南大 博物館·麗川市, 1993).(전남 여천시 평려동 산본마을 137·158·197번지)

 제일모직 여천공장 확장공사에 따라 1989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36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다. 영취산 아래 계곡의 골짜기에 형성된 퇴적층에 3군의 고인돌이 있었다. 동검은 나군 2호 고인돌에서 나왔다. 상석 아래 지석이나 뚜껑돌이 없이 할석으로 축조한 석실만 드러났는데 대부분이 유실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장축을 동서방향으로 두고 할석으로 곽을 축조하였다. 발굴된 동검 1점은 부식상태가 심하여 등대와 날 일부만 남았는데 등대 단면이 타원형일 뿐 아무런 특색이 없으나 전남지방의 고인돌에서 나오는 요령식동검의 파편으로 추정된다(현재 길이 14.5㎝). 주변에서 민무늬토기가 몇편 수습되었다.

⑤ 여천 오림동유적0123)李榮文·鄭基鎭,≪麗水 五林洞 支石墓≫(全南大 博物館·麗川市, 1992).(전남 여수시 오림동 오림정이 마을 묘 77·103, 전 135-2번지)

 1989년 진남체육공원 조성을 위한 지표조사 중 여러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즉 77번지에 5기, 103번지에 5기, 135-2번지에서 1기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체육공원내에 포함되어 있다. 8호 고인돌과 5호 석곽에서 동검편들이 나왔다.

 8호 고인돌:塊石形의 상석 아래 주변에 6개의 지석이 있고 그 주위에 적석시설이 있었다. 장축이 동서방향인 석곽을 판석과 할석으로 쌓고 그 위에 4개의 판석으로 뚜껑을 덮었다.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사이를 잔자갈로 채웠다. 여기에서 요령식동검의 파편으로 동질이 나쁜 동검편 1점(현재 길이 6.7㎝)과 석촉 2점(길이 9.2㎝)이 출토되었다. 석촉은 몸의 단면이 마름모꼴이고 꼬다리의 단면이 6각형인 버들잎모양의 편암제였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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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여천 오림동 8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그림 4>여천 오림동 8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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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호 석곽:원상이 크게 파괴되어 지석이나 상석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뚜껑돌로 추정되는 판석이 주위에서 발견된다. 적석 일부가 주변에 남아 있고 동벽과 남벽 일부만 남아 있는데 장대석을 이용하여 구축한 석곽형이다. 내부에는 잔자갈이 섞인 부식토로 채웠는데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여기에서 동검편 3점과 벽옥제로 양쪽에서 구멍을 뚫은 관옥 2점(길이 0.5㎝, 1.6㎝)이 바닥에서 나왔다. 동검편의 꼬다리 부분은 한쪽에 홈이 나 있고 유기물질로 묶은 흔적이 보이고 있어 나무자루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검신은 등대의 단면이 6각형이고 날부분이 조금 붙어 있으나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⑥ 여천 봉계동유적0124)李榮文,≪麗川市 鳳溪洞 支石墓≫(全南大 博物館·麗川市, 1990).(전남 여천시 봉계동 전 164·528번지)

 대곡마을과 월앙마을의 경지정리 공사가 계기가 되어 1988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虎郞山(해발 401.6m)과 戰鳳山(해발 379.3m)에서 뻗은 구릉 사이에 형성된 충적대지 위에 고인돌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월앙 10호 고인돌:전 538번지 경지 정리지구 서쪽에 있었다. 괴석형의 상석 옆에서 석곽이 발견되었는데 상석이 이동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석곽은 남동모서리가 없어졌는데 할석으로 쌓았으며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바닥 동쪽과 중앙에서 관옥 14점이, 서쪽에서 천하석제 소옥 1점과 벽옥제 관옥 1점, 동검편 1점(현재 길이 3.8㎝)이 나왔다.

⑦ 승주 우산리유적0125)宋正鉉·李榮文,<牛山里 내우 支石墓>(≪住岩댐水沒地域 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Ⅱ, 全南大 博物館·全羅南道, 1988).(전남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

 1988년 주암댐 수몰지구 유적을 조사하던 중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내우마을에서 북으로 약 600m 떨어진 산기슭 아래 구릉 위에 있다. 이 일대에는 120여 기의 고인돌이 4개의 무리를 지어 분포하고 있었는데 남북방향으로 열을 지어 놓여 있었다. 8호와 38호 고인돌에서 요령식동검이 출토하였다.

 8호 고인돌:뚜껑돌 아래에 석관이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다. 남북 길이 310㎝, 동서 폭 180㎝의 커다란 뚜껑돌 아래에서 하부구조가 나왔는데 바닥에 얇은 판석 16장을 깔고 네 벽은 할석으로 쌓았으며 뚜껑은 길이 60∼80㎝정도의 판상석 6장으로 덮었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147㎝, 폭은 50∼56㎝로 남쪽이 더 넓으며 깊이는 55㎝이다. 장축은 남북이며 북에서 동으로 11°기울어져 있다. 벽석의 상면 주위로 할석을 한겹 깔았는데 그 범위는 210㎝×280㎝ 정도이다. 요령식동검 1점과 식옥 2점, 소옥 5점이 나왔다(<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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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승주 우산리 8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그림 5>승주 우산리 8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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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검은 곽의 북쪽 서벽아래에서 서벽과 15m 정도 떨어져 벽과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동검의 끝을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끝을 양쪽에서 갈아 뾰족하게 만들었는데 부러진 파손품을 다시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현재 길이 17.8㎝·대폭 5.5㎝·다리 길이 4.0㎝).

 식옥은 남벽 아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타원형의 바닥돌 양쪽에서 나왔다. 천하석제로 서쪽에서 나온 것은 머리와 꼬리부분이 뾰족하고 배가 오목하게 파여 있으며 머리쪽이 약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구멍은 몸체 거의 중앙에 양면에서 뚫었다. 동쪽 것은 머리와 꼬리부분의 끝이 절단되었고 배가 오목하게 파여 있다.

 그리고 소옥(지름 0.4∼0.6㎝)은 모두 곽의 남쪽 부분에서 나왔다. 원형에 가까우며 구멍이 뚫려 있다.

 38호 고인돌:남북 장축 길이 190㎝, 동서 폭 130㎝인 상석 아래에 장대석 1개로 뚜껑을 마감한 남방식 고인돌이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150㎝, 폭 43㎝, 깊이 20㎝인데 바닥에는 두께 10㎝ 정도의 작은 냇돌과 잔자갈이 깔려 있었고 네 벽은 모두 판석을 세워 석실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요령식동검은(1점) 양쪽 날부분이 거의 부식되어 떨어져 나갔는데 꼬다리 한쪽에 홈이 나 있다. 꼬다리 부분에는 주조 때 생긴 주조흔적이 두껍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부러진 동검의 상반부를 다시 가공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현재 길이 18.5㎝).

⑧ 보성 덕치리유적0126)尹德香,<德峙里 신기 支石墓>(≪住岩댐水沒地域 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Ⅲ, 全南大 博物館·全羅南道, 1988).(전남 보성군 문덕면 덕치리)

 덕치리 신기마을과 척치마을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즉 이 유적은 척치마을 남쪽 해발 324.6m에 있는 산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언덕에 있는데 마을에서 동북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1호 고인돌:괴석형 상석 아래 지석이 있는 형식이다. 주변에 적석부가 있었고 가운데 빈 공간이 석곽부분이었다. 장축이 동-서 방향이었는데 편마암과 냇돌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고 바닥에는 납작한 냇돌과 편마암을 섞어 깔았다. 서쪽으로 치우친 중앙부분 남쪽 벽 아래에서 동검 1점과 홍도 파편이 발견되었다.

 동검은 칼 끝을 서쪽으로 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칼 아래쪽에서 목질부분흔적이 있다. 이는 나무 칼자루가 썩은 흔적인 듯하다. 한쪽 날 대부분이 결실되었고 꼬다리 일부도 부러져나갔다. 동질이나 형태로 보아 요령식동검의 파편인 것으로 확인된다(현재 길이 23.0㎝).

 석곽내 바닥에서 수습된 홍도 파편의 목부분은 두께가 0.2㎝ 내외로 매우 얇고 바깥에 암적색의 칠이 칠해져 있다.

 15호 고인돌:개석 아래에 뚜껑이 보이지 않는 석곽이 있다. 북이 터진 ㄷ자형 석곽인데 북으로 20°기운 동서향을 장축으로 하고 있으며 냇돌로 벽을 쌓았다. 바닥 군데군데 넓적한 냇돌을 깔았다. 서쪽으로 치우친 곽의 중앙부에 석검 1점(길이 28.5㎝)이 있었고 석검에서 남벽에 걸쳐 석촉 21점(길이 6.3∼12.5㎝)이 한꺼번에 나왔으며 또 동쪽에 8점의 석촉과 동촉 1점(길이 8.2㎝)이 나왔다(<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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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보성 덕치리 15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그림 6>보성 덕치리 15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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