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2) 사회
  • (2) 의식과 신앙·예술

가. 의식과 신앙

 무문토기문화나 한국식청동문화가 모두 농경사회의 문화였다는 점에서 농경행위와 관련된 의식과 신앙행위에 대한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 나타난 사례는 빈약하다. 또한 요령청동문화의 경우는 기마와 유목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어 한반도의 정착 농경문화의 의식과 신앙행위와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무문토기-지석묘사회의 의례행위와 연관된 고고학적인 증거로는 우선 지석묘를 들 수 있다. 지석묘 자체가 무덤이고 이는 동시에 血緣親族共同體에서 바로 자신들의 祖上墓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나타나는 조상 숭배사상이 바로 지석묘에 반영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지석묘의 상석이 매우 거대하다는 점에서 그 밑에 묻힌 자의 사회적인 권위와 존경심의 정도도 짐작할 수 있는 동시에 거기에 묻힌 조상의 위엄과 그에 대한 숭배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농사의 주기와 관련하여 마을 단위의 공동 의례행위가 실시되었을 것이다. 경남 고령 양전동에서 발견된 암각화의 태양과 조상의 얼굴 및 천체를 추상화한 것 같은 조각들은 그러한 농경의례 행위시의 제단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0469)李殷昌,<高靈良田洞岩畵調査略報>(≪考古美術≫112, 1971), 24∼40쪽.
―――,<內谷洞 무문토기유적의 발견조사>(≪韓國考古學年報≫8, 서울大 박물관, 1981), 22∼28쪽.
金元龍,<藝術과 信仰>(≪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321∼329쪽.

 한편 요령청동문화의 청동기 가운데는 마면장식이나 마구부속품에 사슴이나 말같은 각종 초원동물들을 장식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는데0470)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조선유적유물도감≫2;고조선·부여·진국편(1989). 이러한 요소들은 요령청동문화의 북방유목민족인 요소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시베리아 일원의 수렵민과 유목민족들의 동물 숭배사상과 토테미즘 전통을 이어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식청동문화의 시기에는 요령청동문화보다 비교적 많은 숫자의 청동유물에서 의식행위의 증거를 엿볼 수가 있다. 먼저 잔줄무늬거울과 동령 등에 각선된 방사상의 선문들은 태양과 태양빛의 방사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서 이는 농경사회에서의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태양에 대한 숭배신앙의 발로로 보인다.

 또한 소위 劍把形銅器0471)韓炳三·李健茂,≪南城里石棺墓≫(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0, 1977), 도면 5·12·13. 안에 새겨진 사람의 손이나 사슴은 요령식동검문화의 동물상징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토템신앙의 유습이라 할 수 있다. 즉 손은 당시 마을지배자의 명령과 권위 또는 그러한 지배자에게 위임된 부족신이나 血祖의 상징이며, 사슴 또한 과거의 토템 숭배사상에서 비롯한 특정 동물을 그대로 지배자나 부족의 상징으로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표현들은 농경민 사회의 조상 숭배신앙으로 이어져서 자기들이 속한 혈족의 시조나 혈통 자체에 대한 계승의 징표로서 부족 안에서 승계되어 갔을 것이다.

 따라서 마을의 전주민이 모여 마을의 운명이나 전주민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의식행위를 실시할 때 이러한 상징이 함축된 청동기를 당시의 마을지도자가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잔줄무늬거울을 패용하고 의식행위를 시행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農耕文靑銅器0472)尹武炳, 앞의 책(1975), 24쪽.로 알려진 동기에는 솟대신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새 두 마리가 나무가지 위에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과 그 이면에 농부가 따비로 밭을 경작하는 장면의 조각을 담고 있다. 이 조각품은 당시 사회의 농경신앙의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이것을 패용하고 의례행위를 시행하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의 신앙과 의례의 전통은 기본적인 농경전통 안으로 유목전통이 들어와서 안주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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