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1)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1)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시베리아지역0482)엄밀히 말한다면 ‘시베리아’라는 지역은 서쪽으로는 우랄산맥, 동쪽으로는 바이칼 연안지역을 포괄한다. 그리고 ‘극동지역’은 바이칼 이동쪽에서 태평양에 맞닿는 지역을 포괄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을 나누어서 살펴보겠다.과 우리 나라 문화의 관련성에 대한 주목은 일본인 학자에 의한 빗살무늬토기의 기원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되었다0483)藤田亮策,<櫛目文土器の分布に就きて>(≪靑丘學叢≫2, 1930).. 이후 카라수크의 석관묘와 아파나시에보에서 따가르에 걸치는 시기의 토기유사성에 주목한 것도 있다.0484)金貞培,<韓國의 靑銅器文化>(≪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3). 북한에서도 1950년대에는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와 시베리아의 관련성을 주장하였으나,0485)그러한 상황은 공귀리·지탑리 등의 발굴보고서와 도유호,≪조선원시고고학≫(과학원출판사, 1960)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도유호가 학계의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면서 그러한 관련성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되지 않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주장하면서 시베리아 기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시베리아지역은 우리 문화의 기원과 관련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에 비해서 정치적인 상황, 자료의 제약, 언어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서 시베리아지역과 우리 나라 문화와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英譯된 일부 자료를 단편적으로 이용하여 피상적으로 논의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최근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와 함께 러시아학자들과 자유롭게 고고학적인 지식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상호협조하에 공동으로 심도있는 연구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은 현 러시아의 우랄산맥 근처에 위치한 췌라야빈스크를 경계로 그 이동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에는 오브·예니세이·레나·아무르 등 4대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들의 여러 지류 상에 우리의 문화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보인다. 이 곳에 위치한 유적들에 대해서 국내에서도 최근 활발히 소개되고 있다.0486)최몽룡,≪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學硏文化社, 1993).
―――,<시베리아 고고학의 최근 성과>(≪알타이 문명전≫(국립중앙박물관, 1995).
데. 아. 아브두신 저;정석배 역,≪蘇聯考古學槪說≫(學硏文化社 考古學叢書 7, 1993).
崔夢龍·李憲宗 編著,≪러시아의 고고학≫(學硏文化社 考古學叢書 8, 1994).

 시베리아의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 전기 유적은 각 지역마다 다양하게 분포하지만, 특히 우리 나라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지역은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분지를 비롯하여 서시베리아와 우코크지역을 중심으로 한 알타이 전역이다. 이 지방은 다시 각 지역별로, 시기별로 다양한 문화기가 있다.0487)서시베리아 오브강지역을 중심으로 한 청동기시대의 지역별·시기별 문화상은 최몽룡·李憲宗 編著, 위의 책과≪韓國上古史學報≫17∼20(1994∼1995)에 실린 V. I. Molodin의 일련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최근에 발굴자료가 증가함에 따라서 새로운 문화기가 설정되고 또는 기존에 나뉘어진 문화를 하나로 묶기도 하여서 이 지역의 문화를 일목요연하게 묶어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문화기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시베리아 청동기시대의 기원을 밝힐 수 있는 아파나시에보문화기(기원전 3000∼2000년), 청동발전기의 안드로노보문화기(기원전 1500∼1000년), 페도로보문화기(기원전 1600∼1300년),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카라수크문화기(기원전 1000∼700년), 철기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스키타이문화의 한 갈래인 파지리크문화기(기원전 700(?)∼200년) 및 타가르문화기(기원전 700년∼기원후 100년) 등이다. 이들 문화가 분포하는 남시베리아는 우리 나라와 지역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두 지역 사이의 고고학적 유적이 많지 않은 탓에 전반적인 유물조합상에 따른 비교분석은 아직 이루어지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의 관련성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즐문토기이다. 이 토기는 핀란드에서부터 스웨덴, 북부 독일, 서북러시아의 카렐리아, 흑해 북안의 오카와 볼가강 상류에까지 걸쳐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고 있어, 일찍이 우리 나라의 빗살무늬토기와 관련을 지으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토기는 주로 북위 55도선을 잇는 環北極지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많이 보이고, 최근 레나강 지류인 알단강 상류의 벨카친스크(기원전 4020년)와 바이칼호 동쪽 흑룡강 상류의 쉴카동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또 카자흐의 잠푸르, 시베리아 아무르강 하류의 사카치 알리안 가샤지구, 오브강 상류인 고르노 알타이의 우코크지역 등에서도 발견된다. 이들 토기에는 한반도의 즐문토기에서 보이는 문양의 대부분의 요소가 보이며, 태토 또한 아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의 토기가 북유럽에서 출발해 시베리아를 거쳐 왔다는 종래의 견해를 재빨리 수용하기에는 좀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와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요령성과 길림성을 포함하는 만주지역과 북경시를 포함하는 하북성지역에서 나오는 즐문토기의 연대가 시베리아에서 나오는 토기들과 비슷하거나 좀더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중국 요령성 新樂(기원전 5300∼4800년), 금주시 성내 제2유치원 근처(기원전 3500년, 금주박물관 소장), 하북성 무안현 磁山(기원전 5300년)과 천서현 西寨(기원전 6500∼4550년, 이상 하북성박물관 소장)를 들 수 있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무문토기가 쓰여지는데 반해 시베리아지역은 청동기시대, 나아가서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즐문토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전체적인 기형이나 문양의 특징만으로 관련성을 논하기 이전에 자연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베리아지역에 자주 나타나는 석관묘라는 묘제로 보아 우리의 청동기시대의 기원을 카라수크기와 타가르기와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있으나, 석관묘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 오르도스 등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비슷한 형태로 존재한다. 또한 우리 나라 및 중국 동북지방의 석관묘에서 나오는 비파형동검 및 조문경은 시베리아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타가르문화에서 보이는 청동거울을 보면 거울의 배면에 꼭지가 하나인 단유이며 무늬도 다르다. 청동단검도 비파형의 형식을 가진 것은 발견된 바 없으며 검파부분의 장식도 다르다. 그런데 우리 나라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300∼1년)에 쓰인 세형동검 중에는 손잡이에 새 두 마리가 있는 형태의 것이 있다(이를 안테나식동검 또는 촉각식동검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손잡이 형태는 남시베리아의 스키타이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안테나식동검은 한반도뿐 아니라 길림지역의 세형화된 동검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서의 구체적인 전파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서부·남부시베리아의 철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스키타이문화와 우리 문화와의 관련성은 쿠르간, 즉 봉분이 있는 적석목곽분으로 대표된다. 이것은 스키타이문화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파지리크, 베렐, 울란드릭, 우스티드, 시베, 투에크타, 바샤다르, 카란다를 비롯해 우코크분지에서 모두 수천 기 이상 발견되었다.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9∼7세기부터 초원에 거주해 왔는데, 기원전 2세기경이 되면 흑해 북안에 왕국을 세울 정도로 강성해진다.

 쿠르간은 땅을 파고 안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시체와 부장품들을 안치한 후에 위에는 돌로 둘레를 쌓고(護石) 흙으로 커다란 봉분을 만들었다. 그것은 신라의 수혈식 적석목곽분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단지 쿠르간의 경우는 기원전 6∼4세기이고 신라의 것은 기원후 4∼6세기의 것으로 연대적인 차이가 많이 나며, 또 중앙아시아와 우리 나라 남부지방 사이의 중간지역에서 연결고리로 볼 수 있는 비슷한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으나, 그 관련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쿠르간에서 발견되는 銅鍑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 많이 사용한 것으로 淨化儀式(purification rite)을 행할 때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동복은 스키타이뿐 아니라 중국의 북부초원지대에서도 보이며, 특히 길림지역의 老河深(일부 학자들은 부여의 문화라고도 본다)유적에서도 발견된 바가 있다. 그런데 이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동복이 최근에 경남 김해의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우리 나라에서도 북방계 유목문화의 요소가 어느 정도 흡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유물은 스키타이뿐 아니라 북중국에서도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북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스키타이문화는 기원전 9∼7세기에 발생한 것으로 신라의 적석목곽분과는 적어도 수백 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스키타이와 한반도의 지리적, 시간적인 차이를 메워줄 수 있는 유물이 없는 한, 섣불리 문화의 전파를 논하기는 어렵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베리아에는 우리 나라의 청동기문화 또는 그 이후 시기의 유물·유적과 유사성이 상당히 많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우리의 기원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철기시대 전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분적인 문화적 요소의 유사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보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바탕을 가지고 러시아측의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후에야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청동기문화의 기원을 남부시베리아에 두려던 그 동안의 시도는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극동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르지역은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적·유물이 적은 탓에 청동기시대라고 뚜렷히 구분할 만한 유적이 발견된 예는 아직 없고, 부분적으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기 유물은 안로강 하구, 스테파니하 골짜기, 칸돈·사르골지역 등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청동기와 함께 원저토기 및 청동기를 모방한 마제석기가 공반된다. 아무르강 하류의 에보론 호수를 비롯한 그 주변에서 청동기를 포함한 일련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칸돈유적의 신석기유적 주변에서 청동기들이 처음 발견되었다.0488)Arxeologia SSSR, Bronze Period of Forest Region in USSR, Moskva(露文), 1987, p.357. 이 유적들을 묶어 에보론문화기로 부르기도 한다. 철기시대 전기는 우릴기(기원전 20세기 후반∼10세기 초반)와 폴체기(기원전 5세기)로 대표된다.0489)A. P. Derevianko, Early Iron Age in Priamurie, Novosibirsk(露文), 1973.
―――, Priamurie -B.C.1st Millenium, Novosibirsk(露文), 1976.

 연해주지역, 특히 그 이동쪽에는 시니가이기(하린스코이 근처, 시니가이유적,키로브스코에 I유적), 마르가리토브카기(페름스키 II유적, 시니 스칼르이유적, 마략-릐바로프유적, 키예브카유적 등), 리도브카기(블라가다트노예 II유적, 리도브카 I유적,쿠르글라야 달리나유적, 루드노예강 둔덕에 있는 유적군) 등이 있다. 연해주지역의 초기 철기시대의 문화기로는 얀코브카기(중국에서는 錫桀米·Sidemi문화라고도 함. 3000∼2500년전), 크로우노브카기(2500∼1800년전), 라즈돌리기(기원 전후) 등이 대표된다. 극동의 연해주에서의 마르가리토프카문화기에서는 다양한 석재 용범과 청동무기가 발견되었다. 평저의 심발형·단지형·호형토기들이 주를 이루며 빗살문·점열문 등의 문양이 있다. 이 문화기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전통을 이은 양면잔손질을 한 석촉이 출토되었다. 시니가이문화기도 역시 평저의 단지형·발형·심발형의 토기가 주를 이루며, 이들 토기 표면에는 삼각문·뇌문·점열문·솔잎문 등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그 밖에 방추차, 부정형의 반월형석도 등도 이 문화기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리도브카문화기에서는 반월형석도, 방추차, 돌괭이, 손잡이가 있는 석도, 청동기를 본뜬 석창을 비롯하여 단지형·장경호의 토기가 대표적이다.0490)Arxeologia SSSR, ibid., 1987, pp.353∼355. 이들은 한반도의 동북지방의 유물들과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극동지역 및 서시베리아의 암각화도 최근에 남한에서 암각화의 발견이 많아지면서 그 관련성이 주목된다. 시베리아·극동의 대표적인 암각화로는 예니세이강의 상류인 순두기·우코크의 베르텍과 아무르강의 사카치 알리안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상응하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암각화(국보 147호)를 들 수 있다. 그 외에 울주 반구대(국보 285호), 여수 오림동, 고령 양전동(보물 605호), 함안 도항리, 영일 인비동·칠포리, 남해 양하리·상주리·벽연리, 영주 가흥리, 남원 대곡리 등을 들 수 있다.0491)岩刻畵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李殷昌,<高靈良田洞岩刻畵調査略報>(≪考古美術≫112, 1971), 24∼40쪽.
崔夢龍,<原始採石問題에 관한 小考>(≪考古美術≫119, 1973), 18∼21쪽
金元龍,<藝術과 信仰>(≪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306∼333쪽.
文明大,<大谷里 岩壁彫刻>(≪盤龜臺岩壁彫刻≫, 東國大, 1984).
황용훈,≪동북아시아의 암각화≫(민음사, 1987).
정동찬,<울주 대곡리 선사바위그림의 연구>(≪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知識産業社, 1988), 329∼434쪽.
장명수,<영주 가흥동 암각화와 방패문암각화의 성격고찰>(≪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宋華燮,<南原 大谷里 幾何文岩刻畵에 대하여>(≪白山學報≫42, 1993), 95∼134쪽.
任世權,≪韓國 先史時代 岩刻畵의 性格≫(단국대 박사학위논문, 1994).
宋華燮,<先史時代 岩刻畵에 나타난 石劍·石鏃의 樣式과 象徵>(≪韓國考古學報≫31, 1994), 45∼74쪽.
경주문화재연구소,≪경주서악지역지표조사보고서≫(학술연구총서 7, 1994).
한국역사민속학회,≪한국 암각화의 세계≫(1995).
울주 천전리의 경우 人頭(무당의 얼굴)를 비롯해 동심원문, 뇌문, 능형문(그물문)과 쪼아파기(啄刻;pecking technique)로 된 사슴 등의 동물이 보인다. 이들은 예니세이강 상류의 순두기, 고르노알타이 우코크지역의 베르텍과 아무르강의 사카치 알리안에서도 보인다. 이들은 고대인들의 사냥에 대한 염원, 어로의 풍요, 다산 등 여러 가지를 희구하는 매체로 사용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무르강의 사카치 알리안에서 보이는 동심원문은 ‘아무르의 나선문’(Amur spiral)으로 태양과 위대한 뱀 무두르(mudur)의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뱀의 숭배는 또한 지그재그문에 반영된다. 하늘의 뱀과 그의 자손들이 지상에 내려올 때 수직상의 지그재그(번개)로 표현된다. 이 두 가지 문양은 선의 이념(idea of good)과 행복의 꿈(dream of happiness)을 구현하며 석기시대인의 염원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물문(Amur net pattern)은 곰이 살해되기전 의식과정 중에 묶인 끈이나 사슬을 묘사하며, 이것은 최근의 아무르 예술에도 사용되고 있다.0492)Alexei Okladnikov, Art of Amur, Harry N.Abrams., Pb. New York, 1981. 이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4000∼3000년경으로 현재 그 곳에 살고 있는 나나이(Nanai)족의 조상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후 300년에 靺鞨, 700∼900년에 肅愼, 900∼1200년에는 女眞이 교대로 점거하다가 14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나나이족이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여진-말갈-숙신-읍루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상의 종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연해주지역에는 얀코브카기(페스찬느이유적, 말라야 파투웨치카유적 등), 크로우노브카기(크로우노브카 유적, 알레니A 유적, 페트로브섬 유적, 세미파트노이유 유적 등), 라즈돌리기 등의 문화기들이 있다. 이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들은 서로 문화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유적들의 주거양식 및 다양한 유물군은 비슷한 시기의 한반도 선사시대 문화상과 유사한 것들이 많아, 앞으로 활발한 연구가 기대된다. 아무르지역에 형성된 우릴기와 폴체기의 골각기, 석기, 방추차, 철부 등을 근거로 회령오동 유적 및 나진 초도유적과의 관련성을 밝힌 연구가 있듯이0493)극동지역의 초기 철기시대의 여러 유적과 한반도의 연관관계를 밝힌 논문에 대해서는 E. I. Derevianko,<Cultural Ties in the Past and Development of Cultures in the Far Eastern Area>(≪韓國上古史學報≫16, 1994), 참조. 실제로 폴체-우릴문화는 우리 나라 동북지역과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어서 비슷한 문화를 영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 우리 나라에서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시기를 러시아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규정하고 있어서 이와 같은 시대구분의 문제에도 양국간의 토론 및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와 극동의 수많은 유적들을 이 짧은 글에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한 유적들의 문화적 성격도 모두 검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를 검토해 볼 때 생각보다 많은 요소에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더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더욱 많은 요소가 발견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화는 시베리아로부터 단순히 단선적으로 전파되어온 것이 아니며 문화공동체적 구조속에서 이동과 역이동을 통한 상호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였다고 보여진다. 극동지역을 중심으로 전시대에 걸쳐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석기, 신석기시대, 최근세에 들어와 보다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화적인 교류를 확인하는 데 있어서 그 동안 양측이 제시한 시대구분과 연대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양측의 연대차에 대한 검토 및 정리가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우선 두 지역의 자료를 양측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검토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자료를 통하여 대체적으로 문화적 교류경로를 정리하여 본다면 제1경로는 바이칼-중국 동북지방(혹은 동부몽고-중국 동북지방)-한반도 서북지방-한반도 중부지방, 제2경로는 바이칼과 아무르지역-연해주-한반도 동북지방-동해-제주도-일본 규슈(九州)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교류경로는 단선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온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끊임없는 문화적 교류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별로 나타나는 성격들은 대단히 복합적이며 혼합적인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일부 문화적 요소에 주목해서 문화적 상관관계를 단정하기보다는 시베리아와 극동지역 문화의 본질적인 속성을 찾는 기초적인 연구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동 경로를 설정하는 데에는 앞으로 많은 공동조사를 진행함으로써 보다 명확히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그 경로를 이어주는 유적들에 대한 자료 점검도 미흡했으며, 발굴된 유적도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유적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후일 그 밖의 주변지역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 공동조사라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단순히 정치적인 경계선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역사적 복원이라는 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문화적 유사성과 상이성을 지역에 관계없이 잘 검토함으로써 선사시대의 문화적 공동체를 찾아내야 하며 결국은 각 시대별로 선사시대의 인류역사의 지도는 다시 그려져야 할 것이다.

<崔夢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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