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Ⅰ. 청동기문화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3) 일본
  • (2) 한·일 청동기문화의 교류관계

(2) 한·일 청동기문화의 교류관계

 우리 나라 청동기 출현기에 해당하는 신암리 제3지점 제2문화층에서는 청동도자와 동포가 출토되었으나0563)리순진,<신암리 유적 발굴 중간 보고>(≪고고민속≫1965-3).
김용간·리순진,<1965년도 신암리유적발굴보고>(≪고고민속≫1966-4).
이 시기 일본에서는 청동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또 경북 예전동0564)金鍾徹,<慶尙北道 梅田里 禮田洞出土の滿洲式銅劍>(≪東アジアの考古と歷史≫, 岡崎敬先生退官紀念論集, 1987).이나 부여 송국리 석관묘0565)金永培·安承周,<扶餘松菊里 遼寧滿洲式銅劍出土 石棺墓>(≪百濟文化≫7·8, 公州師大, 1975).와 같이 남부지역에서 고조선식 동검이 출현하는 시기에도 일본에서는 이것과 병행하는 청동기는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 청동기가 나타나는 시기는 우리 나라에서 변형 古朝鮮式銅劍이 나타나는 시기와 같다고 생각된다. 즉 야요이 전기전반의 이마카와(今川)유적 출토 청동제 유경식양익촉은 김해 무계리,0566)金元龍,<金海 茂溪里支石墓의 出土品>(≪東亞文化≫1, 서울大, 1963). 황해도 상매리,0567)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황해북도 사리원시 상매리 석상묘 조사 보고>(≪고고학자료집≫2, 1959). 대아리 석관묘0568)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각지고대유적 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6, 1983).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대아리에서는 변형 고조선식동검이 동반되고 있다. 또 이마카와유적에서 함께 출토된 동끌은 전기한 동촉과 같은 시기의 것이고 고조선식동검의 경부를 재가공한 것이므로 이 유적이 고조선식동검 말기에 해당하는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변형 고조선식동검이 출토된 경남 진동리,0569)沈奉謹,<慶南地方出土 靑銅遺物의 新例>(≪釜山史學≫4, 釜山史學會, 1980). 전남 우산리 8호 지석묘,0570)宋正鉉·李榮文,<牛山里支石墓>(≪住岩댐 水沒地域文化遺跡發掘調査報告書≫Ⅱ, 全南大 博物館, 1988·1989). 황해도 고산리 토광묘,0571)황기덕,<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고고학자료집≫4, 1974). 요령 정가와자 6512묘0572)瀋陽古宮博物館·瀋陽市文化管理辯公室,<瀋陽 鄭家窪子的兩座靑銅器時代墓葬>(≪考古學報≫75-1, 中國科學院考古硏究所, 1975).도 같은 시기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가와자의 경우, 춘추 말기∼전국 전기에 해당하는 차마구도 함께 출토되어 그 시기 추정이 가능하다.

 다음 시기인 대전 괴정동 석관묘0573)李殷昌,<大田市 槐亭洞出土 一括遺物調査略報>(≪考古美術≫86, 韓國美術史學會, 1967). 출토품과 같은 초기 한국식동검과 다뉴조문경이 동반되는 단계의 유물은 일본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동검·동모·동과·다뉴세문경이 세트관계를 이루어 출현하는 단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에 청동기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즉 야요이 전기 말∼중기전반의 후쿠오카현 요시타게타가기 3호 목관묘에서는 한국식동검·동모·동과·다뉴세문경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세트관계는 전남 초포리 석곽묘0574)李健茂·徐聲勳,≪咸平 草浦里遺跡≫(國立光州博物館學術叢書 14, 1988). 일괄 출토품과 유사하다. 또 함남 이화동 토광묘 출토유물0575)박진욱,<함경남도 일대의 고대유적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에서도 같은 세트가 나타나고 있어 동일 시기로 편년 가능하다. 따라서 이 시기는 중국의 전한 전기, 우리 나라의 위만조선시대에 해당될 가능성이 많다.

 다음 시기에는 한사군 설치에 따라 전한 중기의 거울이 일본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그러나 전한 후기 단계의 것은 출토예가 있다. 예를 들면 타테이와 10호 옹관묘는 야요이 중기후반으로 편년될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전한 후기의 異體字銘帶鏡과 중세형동모가 출토되었다. 그 중 이체자명대경은 경주 조양동 38호 목관묘0576)崔鍾圭,<慶州市 朝陽洞遺跡發掘調査槪要とその成果>(≪古代文化≫35-8, 1983).에서도 출토되었고, 중세형동모는 창원 다호리 1호묘0577)李健茂 외,<義昌 茶戶里遺蹟 發掘展報告(1)>(≪考古學誌≫1,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89).에서 출토되어 모두 같은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 예상된다. 다호리의 경우 전한 중기의 星雲文鏡이 동반되고 있어 남부지방에는 전한 후기 단계에 그 이전 시기의 漢鏡이 유입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시기의 후쿠오카현 수구오카모토 D지점 옹관묘나 미쿠모 1호 옹관묘에서도 나타나고 평양 정백동 2호분 및 37호분에서 출토된 이체자명대경도 마찬가지이다.0578)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락랑구역일대의 무덤떼>(≪고고학자료집≫5, 1978).
―――,<락랑구역일대의 고분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6, 1983).

 야요이 후기전반의 시기에는 사가현 사쿠라노바바(櫻馬場) 옹관묘, 미쯔나가타(三津永田) 104호 옹관묘 등과 같이 전한 말에 출현한 방격규구경이나 細線式獸帶鏡을 부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대구 평리동,0579)尹容鎭,<韓國靑銅器文化硏究-大邱坪里洞出土一括遺物檢討->(≪韓國考古學報≫10·11, 韓國考古學會, 1981). 김해 양동리,0580)朴敬源,<金海出土靑銅遺物>(≪考古美術≫106·107, 1970). 영천 어은동 등지의 일괄출토 유물이 같은 시기로 편년되고 있다. 그 중 영천 어은동 출토 동경 중에서 사가현 후타쯔카산 46호 옹관묘 출토경과 동범경이 있다. 또 사가현 야스나가타 유적에서는 이 시기의 토기와 함께 중광형동모의 용범이 출토되었으므로 같은 중광형 형식의 동과가 출토된 대구 만촌동 일괄출토품0581)金載元·尹武炳,<大邱晩村洞出土의 銅戈·銅劍>(≪震檀學報≫29·30, 1966).도 같은 시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요이 후기중반이 되면 한경 유입이 감소되는 반면 방제경이 제작된다. 이 시기의 방제경은 후쿠오카현 이이우지바바 석관묘 출토 거울이나 김해 양동리 55호 목관묘 출토의 日光鏡系倣製鏡Ⅱa식 등이다.

 야요이 후기후반에서 종말기에는 한경이 다시 증가하는데 후쿠오카현 노카타나카바루(野方中原) 1호 석관묘에서는 半肉彫獸帶鏡이 부장되어 있어 중국 후한 후기와 병행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동경은 후쿠오카현 미쿠모테라구찌(三雲寺口) 2호 석관묘나 히라바루 분묘의 예와 같이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동안 전래되어 부장되는 경우가 많아 후한 전기·중기의 內行花文鏡이 출토되는 수가 많다. 김해 양동리 162호 석곽묘 출토 내행화문경도 동일 현상일 가능성이 많다. 양동리 162호분에서는 일광경계방제경Ⅱb식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Ⅱb식은 쓰시마키사카(對馬木坂) 5호 석관묘나 하로우 B지점 석관묘 등과 같이 주로 야요이 후기후반에서 종말기에 해당하는 것임을 참고한다면 그 병행관계가 뒷받침된다. 한편 하로우 B지점 석관묘나 쓰시마키사카 5호 석관묘에서는 광형동모도 동반 출토되고 있어서 광형동모가 출토된 양동리 200호분도 이 시기에 해당될 가능성이 많고, 반육조수대경이 출토된 평양 채협총(남정리 116호분)0582)小泉顯夫,≪樂浪彩篋塚≫(朝鮮古蹟硏究會 古蹟調査報告書 1, 1934).도 같은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 청동기문화를 야요이문화 편년에 맞추어서 우리 나라와의 관계를 유물을 중심으로 설명하여 보았다. 그 결과 동일 특징의 청동기가 출토되더라도 한일 양국간의 편년이나 불확실한 傳世 기간 때문에 시기적으로 같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자료 증가와 연구 결과에 따라 다른 해석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의 청동기문화가 야요이문화 전기에는 그 기원을 우리 나라에 한정시켰으나 중기중반 이후부터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직수입 또는 일본에서 자체 생산하는 등 그 입수 방법이 다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본 열도 내에 倭國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인 세력 구도가 변화하고 국제화되어 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데 있었다고 하겠다.

<沈奉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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