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3) 철기시대의 유적
  • (2) 패총

가. 조사현황

 지금까지 알려진 철기시대 패총은 모두 60개소로 주로 남해안지역에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발굴조사된 패총도 20여 개소에 이른다(<표 1>).0724)崔盛洛,<原三國時代의 貝塚文化-硏究成果 및 諸問題->(≪韓國考古學報≫29, 1993).

유적명 입 지 출 토 유 물 조사연대
토 기 류 청동기·철기 석기·골각기 장신구 및 기타
김해
회현리
구릉
20m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부, 도자, 낫, 촉, 칼 도자병, 골촉, 골침, 석부 화천, 동물뼈, 탄화미, 방추차 1907∼1935
김해
회현리
봉황대
구릉
20∼30m
경질무문토기, 무문토기 도자 골각기, 숫돌 목제빗 1992
김해
부원동
평지
5∼10m
타날문토기, 경질무문토기 도자, 창, 촉, 낚싯바늘 도자병, 골촉, 첨두기, 복골, 석부, 석검 토제곡옥, 관옥구슬, 방추차, 어망추 1980
양 산 85m 타날문토기 도자 도자병, 숫돌   1992
부산
조도
해안 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도자, 낫, 낚싯바늘 첨두기, 골촉, 도자병, 석촉, 석검, 석착 어망추 1972
부산
동래
평지 무문토기, 흑도편 철제소환   유리곡옥 1930,
1967∼1969
창원
성산
(동구)
구릉
30m
무문토기, 홍도,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소형부 첨두기, 골촉, 골침, 도자병, 반월형석도, 석부, 석봉 등 골제뒤꽂이, 수정제곡옥, 방추차, 어망추, 오수전(서남구) 1974
창원
내동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도자병   1988
마산
현동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골각기   1989
진해
웅천
산지
210∼220m
타날문토기 도자, 칼, 도끼촉, 낚싯바늘, 낫, 창, 작살, 철편 도자병, 골촉, 彫骨, 석부 토제곡옥, 관옥, 아제곡옥 1959,
1961,
1964
삼천포
늑도
해안 경질무문토기       1985,
1986
고성
동외동
구릉
60∼61m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細形銅劍 着裝具, 廣形銅鉾, 漢鏡 골촉, 도자병 방추차 1969∼1970
해남
군곡리
구릉
20∼22m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도자, 낚싯바늘, 부, 철편 도자병, 골촉, 골침, 작살, 뒤지개, 복골, 첨두기, 숫돌, 홈돌, 석촉, 석창 토제곡옥, 골제 뒤꽂이, 유리·수정제·토제옥, 어망추, 방추차, 화천 1986∼1988
보성
척령리
금평
구릉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부, 낚싯바늘, 촉 부, 끌, 반월형석도, 숫돌, 송곳, 화살촉, 바늘, 장식품 토제어망추, 토제곡옥, 토제구슬, 토제방추차, 토제조소품 1992
제주
곽지
해안
30m
무문토기, 타날문토기 도자, 끌형철기, 자루형철기, 철편 도자병, 첨두기석부, 홈돌, 숫돌, 연석 어망추, 방추차, 원판형토제품 1979

<표 1>철기시대 패총의 조사현황

 이외에도 철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패총은 경기도 시도패총, 안산 별망패총, 전남 여천 송도패총, 경남 창원 가음정동패총, 김해 수가리패총, 부산 다대포패총 등이 있다.

 최초의 발굴은 김해패총에서 이루어졌다. 김해 회현리패총은 1907년에 시굴조사된 이래로 일본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발굴 조사되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학자들이 이 유적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데 이를 근거로 일본학자들은 ‘금석병용기’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하였고, 김해지방과 일본지역이 서로 관계가 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특히 이 유적은 1920년에 조사된 패각층 부분과 1934∼1935년에 조사된 지석묘, 석곽묘 및 옹관묘 등 무덤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들간의 연대적인 관계가 논란이 되고 있다. 즉 이 패총의 상한을 옹관과 연결지으면서 기원 전후로, 하한을 고분의 유행기로 보는 입장0725)有光敎一,<金海貝塚土器の上限と下限>(≪考古學雜誌≫40-1, 1954);金正基 역,<金海貝塚의 上限과 下限>(≪考古學≫1, 韓國考古學會, 1968).과 패각층이 무덤 이후에 퇴적되었을 것으로 보아 상한을 여전히 기원 전후로 보면서 패각층이 단일층이므로 그 형성기간이 300년을 넘지 못한다고 보아 하한을 기원후 3세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0726)金元龍,<金海貝塚年代에 대한 再檢討>(≪歷史學報≫9, 1955). 그리고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무덤과 패각층의 연대를 기원전 천년기 전반부터 기원후까지 여러 시기의 것이 섞여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0727)김용간,<김해 조개무지에 대하여>(≪고고민속≫1967-1).

 우리 나라 학자에 의해 최초로 조사된 웅천패총은 그 연대가 기원전 1세기 이래의 유적으로 주장되면서 남해안에 분포하는 이 시기의 패총들은 기원 전후로부터 3세기간에 걸친 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인식되었다.

 그 후 조도패총의 발굴을 통해 김해문화의 시작(다시 말하면 김해식토기의 시작)이 기원전 2세기경까지 올라갈 수 있음이 주장되었고, 성산패총 발굴보고서에서도 기원전 3세기경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0728)韓炳三·鄭澄元,<東區貝塚 發掘調査報告>(≪馬山外洞城山貝塚發掘報告≫, 文化財管理局, 1976). 김해 부원동패총이 발굴되자 이 패총을 철기시대에서 고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0729)金元龍,<金海 府院洞期의 設定>(≪韓國考古學報≫12, 1982). 그리고 삼천포 늑도패총과 해남 군곡리패총이 발굴되면서 철기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의 문화상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 초에는 이상의 견해에 반박하면서 패총의 중심연대가 기원전 3∼2세기까지 올라갈 수 없고 또한 이들 패총의 중심연대가 기원후 4세기대로 떨어지는 고분기의 유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0730)申敬澈,<釜山·慶南出土 瓦質系土器>(≪韓國考古學報≫12, 1982).
崔鍾圭,<陶質土器 成立前夜와 그 展開>(≪韓國考古學報≫12, 1982).
이에 대하여 패총에서는 (경질)무문토기 다음에 반드시 와질토기의 단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없으며, 패총의 연대를 지나치게 내려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0731)崔盛洛,<原三國期 土器의 變遷과 問題點>(≪嶺南考古學≫5, 1988). 그 밖에 패총의 형성시기의 환경에 대한 연구도 일부 이루어졌다.0732)吳建煥·郭鍾喆,<金海平野에 대한 考古學的 硏究(1)>(≪古代硏究≫2, 古代硏究會, 1989).
郭鍾喆,<洛東江河口域에 있어서 先史∼古代의 漁撈活動-貝塚貝類를 중심으로 본 一側面->(≪伽倻文化≫3, 伽倻文化硏究院,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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