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3) 철기시대의 유적
  • (3) 무덤

(3) 무덤

 철기문화가 언제 어디로부터 들어온 것인지에 관하여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0735)철기시대의 상한을 북한에서는 서북지방은 5세기경으로, 두만강유역은 기원전 7∼5세기경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남한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김정배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늦어도 기원전 6세기임을 밝힌 바 있고(金貞培,≪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6, 30쪽), 김정학은 기원전 1세기로 늦추어 잡고 있으며(金廷鶴 編,≪韓國の考古學≫, 東京;河出書房新社, 1972, 68∼105쪽), 김원룡은 초기 철기시대를 기원전 300년∼0년으로 편년하였다(金元龍,<鐵器文化>,≪한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1973, 389∼390쪽). 대체로는 기원전 4∼3세기 무렵 중국의 燕(기원전 323∼222) 나라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철기문화가 처음 들어온 지역은 중국에서 가까운 북부지역이며 이것이 남부지역에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철기가 남부지역에로 파급되는 과정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도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철기가 등장할 무렵의 특징적인 점의 하나는 遼寧式銅劍文化를 이어받은 韓國式銅劍文化가 질적 양적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적 청동기의 특징이 확립되고 있는 것을 꼽을 수 있다.0736)李健茂,<論考 韓國의 靑銅器文化>(≪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 國立中央博物館·國立光州博物館, 1992), 125∼137쪽.
우리 나라의 청동기문화는 전기의 遼寧式銅劍文化, 후기의 韓國式銅劍文化로 대별되는데 요령식동검은 만주식동검·비파형단검 또는 曲刃靑銅短劍 등으로도 불러왔으며, 한국식동검은 세형동검·좁은놋단검으로 불러왔다. 이 가운데 유물이 출토된 중심지역의 이름을 좇아 명명되는 중국식동검·오르도스식동검 등과 같이 요령식동검·한국식동검으로 부르는 것이 다른 동검과 대별하기 쉽다는 점에서 매우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철기가 등장하는 이른 시기에는 각종의 청동기속에 주조된 쇠도끼만 끼어 있었으나 점차 철기의 종류와 양이 증가하면서 儀器化된 청동기는 철기에 밀려 형식적으로 퇴화하다가 사라지게 된다.

 철기가 등장할 무렵에는 무덤쓰기(墓制)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의 무덤쓰기와는 다른 새로운 무덤쓰기가 보태진 것이다. 즉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이 새로 나타난 토광묘 계통에 중심적인 위치를 내주면서 점차 사라지거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토광묘 계통과 더불어 등장하는 또 하나의 무덤쓰기는 독무덤인데 청동기시대의 세워 묻는 외독무덤과는 달리 이음식독널(合口式甕棺)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이 시대의 무덤 유적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하지는 않으며 일정지역에 편중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무덤쓰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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