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4) 철기시대의 유물
  • (2) 철기유물

가. 철기 사용의 여러 단계

 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한반도 선사시대 시기구분에 의거하면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까지의 300년간은 初期鐵器時代이고, 기원후 1세기에서 3세기까지 300년간은 原三國時代에 해당된다. 그러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시대 설정 자체를 문제시하기도 하고0854)崔夢龍,<韓國考古學의 시대구분에 대한 약간의 提言>(≪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787∼788쪽. 특히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를 구분하는 것의 모호성을 지적하기도 한다.0855)崔盛洛,<韓國 鐵器文化의 形成過程에 대한 硏究>(≪韓國上古史學報≫7, 1991), 384∼386쪽. 마찬가지로 철기문화의 단계적 발전과정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도 위와 같은 시기구분에는 문제점이 없지 않다. 이 글에서는 한반도 초기 철기시대 철기유물의 변천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하는데 이는 전반적인 遺物複合體의 변화과정과도 맞물려 있다.

 한반도내에 철기문화가 부분적으로 수용되고 완전히 정착하는 과정은 청동기시대적인 물질문화의 요소가 완전히 소멸하고 철기시대적인 요소로 대체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물복합체의 단계적 변화과정을 살펴보더라도 기원 전후의 시점은 유물복합체의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시점도 아니고 청동기시대적인 요소가 소멸하는 시점도 아니다. 따라서 철기시대 유물의 단계적인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원삼국시대 전반 일부가 포함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청동은 도끼·끌·비수 등 일부 工具類로도 제작되기도 하지만 주로 武器類(실용성이 의심스럽지만)와 儀器類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이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청동기시대에는 청동기가 住居址(집터)에서 발견된 사례가 극히 드물고 당시 실생활용 도구는 대부분은 石器로 제작되었으며 청동제 공구가 발달하지 못하여 목기의 제작과 사용도 제한되었지 않았나 한다. 이에 비하여 철은 사용 초부터 공구류나 농구류와 같은 실생활용 도구를 제작하는 데 이용되었고 분묘에서 발견되기도 하지만 주거지와 기타 생활유적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감에 따라 처음부터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하여 사용되었다기보다 주로 석기의 용도를 대체하여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철기시대 이른 시기에는 여전히 청동기가 무기류와 의기류로 제작 사용되었고 점차적으로 철기의 사용범위가 확대되면서 청동제 무기와 의기가 소멸하고 철제품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철기의 종류, 형태, 제작기술의 단계적 변화과정으로 서술해 보고자 한다.0856)최종규,≪삼한사회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3), 105∼130쪽.
박순발,<한강유역의 청동기·초기철기문화>(≪한강유역사≫, 민음사, 1993), 201∼216쪽.

가) 제1단계(기원전 3∼2세기)

 전국시대 燕의 철기문화가 한반도 서북한지역으로 파급되고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치는 시기이다. 이 단계에는 지역에 따라 철기사용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시간적인 위치도 다르다. 즉 ① 청천강 이북과 요령지방, ② 두만강유역, ③ 평안남도, 황해도, 함경남도지역, ④ 충청남도와 전라도지역 등 크게 4지역에 따라 제1단계의 개시기와 철기사용 내용은 다르다. 연나라의 철기문화가 파급되어 철기사용이 시작되지만 대체로 몇 종류의 농공구류만이 철기화된다. 청천강 이북지역에서만 철제무기를 볼 수 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여전히 銅劍·銅鉾·銅戈가 무기의 주종이며 精文鏡이나 靑銅儀器가 제작된다. 농공구류에 있어서도 기능적으로 다양화된 연나라의 농공구류가 모두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3∼4종의 농공구류만이 철기로 제작될 뿐이다.

 청천강 이북지역에서는 이 단계의 철기들은 明刀錢과 함께 출토되는데 요령지방의 蓮花堡유적,0857)王增新,<遼寧撫順市蓮花堡遺址發掘簡報>(≪考古≫6, 1964), 286∼293쪽. 寬甸유적,0858)許玉林,<遼寧寬甸發現戰國時期燕國的明刀錢和鐵農具>(≪文物資料叢刊≫3, 1980), 125∼129쪽. 高麗寨유적0859)東亞考古學會,≪貔子窩≫(東方考古學叢刊 1, 1929), 57∼61쪽.을 비롯하여 渭原 龍淵洞유적,0860)藤田亮策,<朝鮮發見の明刀錢と其遺跡>(≪朝鮮考古學硏究≫, 京都;高桐書院, 1948), 196∼292쪽. 寧邊 細竹里유적0861)김영우,<세죽리 유적 발굴 중간 보고(2)>(≪고고민속≫ 1964-4), 40∼50쪽. 등에서 발견된 유물을 들 수 있다. 괭이로 사용되었을 몇가지 형식의 주조철부(鐵钁)와 鐵鑿·鐵鎬·鐵鋤·鐵鎌·鐵金㐌·半月形鐵刀·鐵鋤 등의 공구류와 鐵鉾·鐵刀·銅鏃鐵鋌 등의 무기류가 출토된다. 물론 연나라의 철기문화가 청천강 이북지역까지 밀려오게 되는 시기는 명도전도 함께 공반되기 때문에 시기를 기원전 5세기까지 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계기가 연나라 장수 秦開의 고조선 경략이라고 보고 제 1단계의 상한 연대를 기원전 3세기 초0862)尹武炳,<韓國 靑銅短劍의 形式分類>(≪震檀學報≫29·30, 1966), 42∼51쪽.
최종규, 앞의 책.
쯤으로 보는 것이 이후의 철기문화 편년이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두만강유역에서는 무산 호곡유적과 회령 오동유적 등 취락유적에서 확인된다. 대체로 청천강 이북지역의 철기문화와 상당한 공통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청천강 이북지역의 다양한 농공구류 중 주조철부·철겸·반월형철도·철추 등 4종 정도만이 철기화되고 철제무기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지역의 철기문화 개시기를 기원전 7세기까지 올려보는 견해도 있고0863)황기덕,<두만강 류역 철기 시대의 개시에 대하여>(≪고고민속≫ 1963-4).
리병선,<압록강류역에서 철기시대의 시작>(≪고고민속≫ 1967-1).
연나라의 철기문화와는 계보를 달리한다고 하여 시베리아나 연해주 지역의 철기문화와 관련시켜서 상한 연대를 올려보는 견해도 있다.0864)金貞培,<韓國의 鐵器文化>(≪韓國史硏究≫16, 1977). 그러나 요령지방이나 청천강 이북지역의 철기문화와의 공통성을 부인하기 어렵고 상기의 연대관은 불확실한 연대결정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청천강 이북지역보다 약간 늦은 시점에서 상한 연대를 결정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평남·황해·함남지방에서는 움무덤, 돌곽움무덤에서 세형동검과 함께 철기가 출토된다. 하지만 주조철부와 검파두라는 두 종류만이 철기로 제작될 뿐이다. 함흥 이화동 움무덤,0865)박진욱,<함경도 일대의 고대유적 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165∼182쪽. 봉산 송산리 솔뫼골 돌곽움무덤,0866)황기덕,<황해북도 봉산군 송산리 솔뫼골 돌돌림 무덤>(≪고고학자료집≫3, 1963), 77∼81쪽. 배천 석산리 움무덤0867)황기덕,<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고고학자료집≫4, 1974), 161∼163쪽. 등에서 주조철부가 1점씩 출토되었고 시흥 천곡리 돌상자무덤0868)백련행,<천곡리 돌상자 무덤>(≪고고민속≫ 1966-1), 27∼28쪽.에서는 검파두가 출토되었다. 북한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세형동검이 출토되는 움무덤의 시작을 기원전 5세기까지 올려보지만 세형동검 움무덤은 철기를 동반하는 것과 그 이전 시기의 철기가 동반되지 않는 단계의 것으로 구분된다. 철기가 동반되는 세형동검 움무덤은 연나라의 동방경략으로 인하여 청동단검묘가 청천강 이남지역으로 국지화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세형동검-주조철부-움무덤의 유물복합체는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는 올라가기 어렵고 이 지역에서 나무곽무덤(木槨墓)이 출현하는 기원전 2세기 후반대까지 계속되리라 추측된다.

 서남부지방인 충청·전라지역의 초기 철기시대는 북부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부터 시작되리라 생각된다. 정식 발굴조사되어 확실한 유구의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움무덤 혹은 토광목관묘 계통의 유구에서 세형동검과 함께 철기가 출토된다. 주로 주조철부와 철착이 공반되며 그 기본형은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발견되는 농공구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이 지역에 철기가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은 세형동검문화가 완숙된 단계에 도달하면서부터라고 추측된다. 당진 소소리,0869)李健茂,<唐津 素素里遺蹟 出土一括遺物>(≪考古學誌≫3, 韓國考古美術硏究所, 1991), 112∼134쪽. 부여 합송리,0870)李健茂,<扶餘 合松里遺蹟出土 一括遺物>(≪考古學誌≫2, 1990), 23∼67쪽. 장수 남양리0871)池健吉,<長水 南陽里出土 靑銅器·鐵器 一括遺物>(≪考古學誌≫2), 5∼22쪽. 등 세형동검-정문경과 동반되는 철기류는 북부지역의 움무덤과 비교하여 철착이 추가된다는 점이 다르고 청천강 이북, 두만강유역과 비교해서는 반월형석도가 철기화되지 않는다는 점이 차이가 난다. 현재의 자료로서 이 지역의 철기 사용 개시기는 북부지역과 비교하여 약간 늦은 시기에 속하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라고 보는 것이 안전할 듯하고 서북한 목곽묘와 관련된 철기문화가 파급되는 기원전 1세기경이 하한일 것으로 보인다(<그림 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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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초기 철기시대 제1단계 철기유물
<그림 1>초기 철기시대 제1단계 철기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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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2단계(기원전 1세기∼ 기원후 1세기 중엽)

 철제 농공구류 외 다양한 철제무기가 제작되는 단계이다. 기존의 동검·동모·동과를 대체하여 철검·철모·철과가 제작되고 기능적으로 세분된다. 예를 들어 철부의 경우에도 주조철부·단조철부·판상철부·소형 단조철부 등으로 세분되고 도·검류도 철검·소환두도·장검 등으로 분화된다. 또 이 시기에 들어와서 새로이 철제 마구류가 등장하고 반월형철도가 없어지는 대신 철겸의 사용이 보편화된다.

 이 시기에는 한반도 내에서 세 개의 지역군별로 철기문화가 전개되었다. 먼저 서북한지역에는 나무곽무덤의 축조시기에 해당되는데 평양시 정백동,0872)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락랑구역 일대의 무덤떼>(≪고고학자료집≫ 5, 1978). 대안시 태성리,0873)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태성리 고분군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5, 1959), 11∼69쪽. 은율군 운성리,0874)리순진,<운성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 200∼227쪽. 재령군 부덕리,0875)리순진,<재령군 부덕리 수역동의 토광무덤>(≪고고학자료집≫3, 1963), 82∼86쪽. 안악군 복사리,0876)전주농,<복사리 망암동 토광무덤과 독무덤>(≪고고학자료집≫3), 91∼101쪽. 은파군 갈현리0877)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황해북도 은파군 갈현리 하석동 토광묘 유적 조사 보고>(≪고고학자료집≫2, 1959), 30∼35쪽. 등의 유적과 영흥군 소라리유적0878)박진욱, 앞의 글, 170∼173쪽. 등에서 발견된다. 대동군 상리,0879)榧本杜人,<平安南道大同郡龍岳面上里遺跡調査報告>(≪朝鮮の考古學≫, 京都;同朋舍, 1980).
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 34∼35쪽.
황주군 흑교리0880)梅原末治·藤田亮策, 위의 책, 30∼32쪽. 등의 출토유물도 이 단계에 해당된다. 이 지역의 목곽묘에서는 세형동검이 여전히 출토되지만 정문경이 탈락되고 회색 배부른 단지와 화분형토기 등 용기류와 함께 車馬具와 동촉 등이 동반된다. 이 단계의 이른 시기에는 세형동검을 비롯한 청동제 무기류가 출토되는 반면 늦은 시기가 되면 철겸이 부장되고 철제장검도 출현한다. 나무곽무덤과 관련되는 진전된 철기문화가 과연 衛滿朝鮮 때부터 시작되었는가,0881)리순진,<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나무곽무덤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8, 1983), 99∼158쪽. 아니면 樂浪郡의 설치와 함께 유입된 것인가0882)尹龍九,<樂浪前期 郡縣支配勢力의 種族系統과 性格>(≪歷史學報≫126, 1990), 9쪽.는 아직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몇 가지 절대연대의 근거가 될 만한 유물, 즉 漢鏡·기년명칠기와 일산대 등을 통해 나무곽무덤이 축조되던 시기의 중심연대가 기원전 1세기대임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세형동검묘의 마지막 단계가 대체로 제2단계의 철기문화로 이해된다. 이 시기 이곳에서는 토광목관묘와 늦은 형식의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청동제 무기와 함께 다양한 철제무기류와 농공구류가 출토된다. 특히 한경·帶鉤 등 漢式遺物이 공반되기도 하며 마구류도 출토된다. 그러나 서북한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차여구가 극히 제한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청동제 의기성 무기류가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지속되어 철제 무기류의 대체나 수용이 상대적으로 늦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창원 다호리,0883)李健茂 외,<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I)>(≪考古學誌≫1, 1989), 5∼174쪽.
―――,<昌原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II)>(≪考古學誌≫3, 1991), 5∼111쪽.
김해 양동리,0884)한영희 외,≪김해 양동리고분 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연구소, 1989).
林孝澤,≪洛東江 下流域 伽耶의 土壙木棺墓 硏究≫(한양대 박사학위논문, 1993).
경주 입실리0885)小泉顯夫·梅原末治·藤田亮策,≪南朝鮮に於ける漢代の遺蹟≫(朝鮮總督府, 1925), 30∼74쪽.·구정동0886)金元龍,<慶州 九政里 出土 金石倂用期遺物에 대하여>(≪歷史學報≫1, 1952), 3∼14쪽.·조양동0887)최종규,<慶州市朝陽洞遺蹟發掘調査槪要とそ成果>(≪古代文化≫35, 京都;古代學協會, 1983), 1∼13쪽., 대구 평리동0888)尹容鎭,<韓國 靑銅器文化 硏究>(≪韓國考古學報≫10·11, 1981), 1∼22쪽. 등의 토광목관묘 유적이 대표적이라 하겠으나 삼천포 늑도,0889)부산대 박물관,≪勒島住居址≫(釜山大 博物館 遺蹟調査報告 13, 1989). 해남 군곡리,0890)崔盛洛,≪海南郡谷里貝塚≫(Ⅰ∼Ⅲ)(木浦大 博物館, 1987∼1989). 광주 신창동0891)金元龍,≪新昌里甕棺墓地≫(서울大 出版部, 1964).
조현종·장제근,<광주 신창동유적-제1차 조사개보->(≪考古學誌≫4, 1992), 31∼134쪽.
유적과 같은 생활유적도 있다. 특히 신창동유적과 늑도유적은 분묘군을 끼고 있다는 데에 중요성이 있다고 본다. 영남지역에서 제2단계의 상한을 최근 토광목관묘 편년에 기초하여 기원전 1세기 초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이 지역에서의 청동제 무기의 소멸과 철제품으로의 대체현상은 기원후 1세기 중엽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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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철제 농공구류
<그림 2>철제 농공구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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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유역의 이른바 ‘中島式土器文化’는 이 제2단계 철기문화의 파급시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철기를 반출하고 있는 유구로서 이 단계에 분명히 속할 만한 것은 아직 없다. 특히 한강유역에서 이 시기에 속하는 분묘유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여러 취락유적의 시간적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다른 연대관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비교적 안정된 연대관인 기원후 1∼2세기 이전에 해당되는 초기 철기시대 한강유역의 철기문화는 현단계로서 지극히 불투명한 상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 제3단계(기원후 1세기 중엽 이후)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서북한지역에서 한대 목곽분 묘제가 이식되어 축조된 귀틀무덤이 출현하는 시점을 정백동 2호분(高常賢墓)0892)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락랑구역일대의 고분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6, 1983), 17∼25쪽.을 시초로 삼아 기원 전후한 시기로 잡고 있다.0893)황기덕 외,<기원전 5세기∼기원 3세기 서북조선의 문화>(≪고고민속론문집≫3, 1971), 75∼80쪽. 그러나 낙랑지역에서 묘제의 변천이 나무곽무덤에서 귀틀무덤으로 일률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하는 도식적인 이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나무곽무덤과 귀틀무덤은 동시기에 병존할 가능성이 충분하며 피장자의 계층차이에 기인한 분화일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2단계를 설명하면서 나무곽무덤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귀틀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한반도 초기 철기문화가 전개되는 연속선상에서 이해하기 곤란한 漢式遺物이기 때문이다. 서북한지역에서는 제2단계에 한대유물이 직접 유입되는 경우가 많고 토착 철기문화도 한대의 발달된 철기문화를 제한적으로 수용 발전시켜 나간 시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한강유역에서는 독자적인 철기문화가 발견되는 예가 극소수에 불과하나 철제 농공구류가 취락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영남지역에서는 청동제 무기류가 완전히 소멸하고 철제 무기류와 농공구류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철기문화가 정착되고 있으며 서북한지역에 비해 분묘에 다량의 철기류를 부장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대형묘에 매납되는 철제무기와 철소재류가 증가되고 있다. 이 제3단계 초기에도 여전히 토광목관묘가 중심 묘제이지만 낙랑지역의 목곽묘 영향으로 토광목곽묘로 발전하였다.

 서북한지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에 해당되는 정백동, 정오동, 석암리 등의 토광목곽묘(나무곽무덤)와 목실분(귀틀무덤)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이 시기에 속할 것이다. 무기류로서 철제장검과 戟, 환두대도, 소형환두대도, 철모류 등이 다양하게 부장되는 한편 철제단검은 거의 소멸된다. 농공구류로서 주조철부의 비율이 감소하고 단조철부가 대·소 한쌍씩 부장되는 예가 많으며 도자와 끌, 철겸 등이 출토된다.

 한강유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에 해당하는 분묘유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한강유역에 몇몇 취락유적들이 발견되는데 절대연대를 결정하는 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으나 대체로 이 3단계에 속하는 유적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 중 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양평군 대심리유적,0894)문화재관리국,≪팔당·소양댐 수몰지구유적발굴 종합조사보고≫(1974), 173∼282쪽. 춘천 중도유적,0895)李健茂 외,≪中島≫I(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2, 1980).
池健吉·韓永熙,≪中島≫Ⅲ(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4, 1982).
중원군 하천리 F지구유적,0896)尹容鎭,<中原荷川里 F地區 遺蹟發掘調査報告-1983·1984年度->(≪忠州댐水沒地區文化遺蹟 發掘調査綜合報告書≫考古·古墳分野(Ⅱ), 충북대학 박물관, 1984), 385∼476쪽. 가평군 이곡리0897)崔茂藏,<梨谷里 鐵器時代 住居址 發掘報告書>(≪人文科學論叢≫12, 建國大, 1979), 113∼154쪽.와 마장리유적 등이 있다.

 이 중 이곡리와 마장리유적은 冶鐵유적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유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 중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소개할 만한 자료는 대심리유적과 하천리 F지구유적 출토품이고 중도유적의 착두식철촉과 이곡리유적의 삼각형철촉·양익형 철촉은 삼국시대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

 영남지방에서 세형동검이 소멸하고 철제무기와 농공구류로 대체되는 시기는 낙랑지역보다는 조금 늦은 기원후 1세기 중엽 이후일 것으로 보여져 제3단계 초기 철기문화의 시작도 이 시점부터라고 생각된다. 영남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은 거의 대부분 분묘유적이다. 물론 패총유적도 이 시기에 해당되는 문화층이 많으리라 상정되지만 출토된 철기유물과 관련시켜 논의하기 곤란한 점이 있어서 생략하기로 한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철제무기류로는 철검·소환두도·철모·무경철촉 등이 있고, 농공구로서 다양한 주조철부·단조철부·철착·따비·쇠스랑 등이 있다.

 이 단계에서는 낙랑지역으로부터 철기문화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제2단계까지 파급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독자적이고 토착적인 철기생산이 돋보인다. 세형동검의 형태를 계승한 철검류가 크게 발전한다는 점이라든지 철모류가 점점 세장한 형태의 검신형철모로 발전한다든지 하는 점에서 낙랑지역의 철기문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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