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2.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2) 사회
  • (2) 의식과 신앙·예술

가. 의식과 신앙

가) 제사장의 의기

 ≪三國志≫東夷傳 馬韓條에 5월 파종과 10월 추수에 國邑에서 天君이 주재하는 제의관계 기사가 있다. 기원전 초기 철기시대에 이러한 농경관련 의식과 신앙이 성행하였음을 알려주는 고고학자료로 대전 출토 농경문 청동기가 있다.1026)韓炳三,<農耕文靑銅器에 대하여>(≪考古美術≫112, 1971). 방패처럼 생긴 청동기 앞뒷면에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앞면에는 각각 따비와 괭이로 밭을 가는 사내가 표현되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나무가지가 장식되어 있다. 나무장대 위에 앉은 새는 솟대를 연상시키며, 기록에 따르면 삼한의 천군이 주재하는 蘇塗에 솟대가 세워 있다 하므로, 이 청동기는 결국 농경의식을 주재하는 천군의 장신구일 가능성이 많다.1027)韓炳三, 위의 글.
金杜珍,<三韓 別邑社會의 蘇塗信仰>(≪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歷史學會 編, 1987), 118∼119쪽.

 한편 마한에서 천군은 제천행사를 할 때 방울을 흔드는 춤을 춘다고 기록에 전한다.102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방울은 그 소리로써 귀신을 쫓거나 불러들이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이러한 천군의 巫具로 추정되는 청동방울이 남한지방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바 있다. 그 종류를 보면 8개의 가지방울이 放射狀으로 달려 있는 八珠鈴, 막대 양쪽에 방울이 각 하나씩 달려 있거나, 손으로 쥐기 좋게 휘어진 자루 양끝에 방울이 달린 二頭鈴, 그리고 장대 끝에 장착하여 흔들게 한 竿頭鈴 등이 있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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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각종 청동방울
<그림 1>각종 청동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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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 4종류의 청동방울이 충남 논산과 덕산에서는 일괄로 발견되었고, 전남 화순 대곡리에서는 팔주령과 간두령 각 한쌍씩,1029)趙由典, 앞의 글, 67∼103쪽. 그리고 함평 초포리에서는 단검과 투겁창·꺾창 등의 무기류와 함께 간두령과 이두령만이 출토되었다.1030)李健茂·徐聲勳, 앞의 책. 그리고 다소 시기가 떨어지는 형식의 동검과 창·꺾창이 출토된 대구 신천동과 월성 죽동리에서는 간두령 1쌍만 발견되었다.

 이들 청동방울과 함께 나오기도 하지만 별도로 세형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줄무늬거울이 있다. 청동거울은 이미 비파형동검 시기에 제작 보급되었는데, 그 반사효과 때문에 비추어지는 모든 사물의 영적 존재를 전달하는 신격화 도구로서 이용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줄무늬거울의 뒷면에 삼각거치문을 단위로 하여 방사상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무늬는 日月星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줄무늬거울도 천군 혹은 제사장의 의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청동제 의기는 철제무기의 본격적인 부장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부장되는 습관이 거의 사라진다. 그렇다고 방울이나 거울 등을 사용한 종교의식이나 제사장이 사라진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이는 부장품의 상징성으로 미루어 제의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기의 부장 습관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기가 威身財로서의 가치가 떨어졌으며, 이는 결국 제사장의 지위가 보다 약화되었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준다 하겠다.

나) 신목신앙

 전남 광주 신창동의 늪지유적에서 점토띠구연의 무문토기와 함께 여러 점의 목제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 긴 새머리 모양을 한 목기 1점이 있다. 길이 21cm 정도로 단면은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서 가운데가 굵고, 한쪽 끝은 뾰족하다. 반대편은 잘라서 마무리되었는데, 편평한 밑면 가운데에 지름 0.9cm 가량인 철편이 반원형으로 박혀 있어서, 원래 다른 나무에 부착되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그림 2>).1031)趙現鍾·張齊根,<光州 新昌洞遺蹟-第一次調査槪報>(≪考古學誌≫4,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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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광주 신창동 출토 새모양 목기
<그림 2>광주 신창동 출토 새모양 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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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한 시기에 이와 비슷한 형상의 목제품은 일본에서 적지 않은 예가 발견된다. 야요이(彌生)시대 중기에 속하는 大阪 池上遺蹟의 출토례를 보면 길이는 34cm 정도로 머리와 몸통 형체가 새와 같으며, 신창동 예처럼 다리나 날개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 대신 몸통 아래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장대를 꽂게 되어 있어, 이를 연결하면 영락없이 새가 나무가지에 앉은 모습이다.1032)後藤直,<彌生人のマツリ>(石川日出志 編,≪彌生人とまつり≫, 東京;六興出版, 1991), 179∼184쪽.

 긴 장대 위에 새 모양의 나무제품을 장식한 것은 최근까지 우리 나라 농촌 거의 전역에 널리 퍼져 있는 솟대와 똑같다. 민속자료에 따르면 솟대는 읍촌의 수호신·제단·경계선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하나, 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이를 넓은 마당에 세워두고 농악을 벌여 풍년을 기원한다고 한다.

 이미 초기 철기시대에 우리 나라에 농사와 관계되는 솟대가 있었음은 앞서 대전출토 농경문 청동기를 통해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러한 솟대의 자료가 실물로 전한 것이 바로 이 신창동 새모양의 목기인 것이다. 솟대 신앙이 이 신창동 목기와 비슷한 시기에 성행하였음은≪三國志≫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기록에 보면 “나라마다 각각 蘇塗라 부르는 別邑이 있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고 하였다.103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이 기록만으로는 농사의 풍년과 소도의 솟대가 관련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앞서 농경문 청동기가 그 관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다) 복골

 동물의 다리 뼈를 이용하여 점을 쳤으리라 추정되는 일종의 卜骨이 우리 나라 남해안지방의 패총유적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부산 조도, 김해 부원동·봉황동, 해남 군곡리, 삼천포 늑도 등으로,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복골이 출토된 유적은 해남 군곡리패총이다.

 일본에서도 야요이시대에 속하는 도서 해안 패총유적에서 주로 발견되고, 내륙지방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초부터 내륙지방에서 없었다고 보기보다는, 일반 생활유적지에서는 흙속에 묻혀 썩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된다.

 주로 사슴의 견갑골의 넓은 하단을 이용하는데, 일부 마연하거나 깎아낸 다음, 가로 또는 세로로 여러 줄의 점 모양을 지졌다. 사슴말고도 멧돼지 등의 동물뼈를 재료로 하여, 뼈의 앞뒷면 이외에도 측면을 이용한 예도 있다. 복골의 경우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자가 새겨져 있는 중국 殷나라 복골이 유명하다. 은의 복골과는 달리 우리 나라와 일본 출토례는 문자없이 뾰족끝의 도구로 점모양을 지지는 占狀燒作法이 특징이다(<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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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해남 군곡리패총 복골
<그림 3>해남 군곡리패총 복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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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기록에 따르면 왜에서는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있거나 왕래하는 경우에 문제가 있다면 뼈를 지져 점을 친다고 하였다.1034)≪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倭人. 그리고 부여에서도 복골은 아니지만 군사의 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소를 잡아 발굽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그래서 굽이 벌어지면 흉하고, 굽이 합하면 길하다고 했다.103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군사활동이 있을 경우나, 원거리 항해에 나섰을 때 복골을 이용하여 점을 쳤을 것으로 미루어 추정된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복골은 해안지방의 패총유적에서 발견되므로 원양항해 등에 대해서 점을 쳤을 가능성이 더욱 많다.

 농경 관련 점복기사는 우리 나라에 없지만, 오늘날까지 행하여진다고 하는 일본 東京 御嶽神社의 太占祭神事 경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뼈에 구획선을 그은 다음 각 작물의 예상작황을 고하고, 어디로 금가는가를 보아 재배할 작물을 선택한다고 한다.1036)神澤勇一,<呪術の世界-骨卜のまつり>(石川日出志 編, 앞의 책), 99∼100쪽. 이로 보아 농경이 주요 관심사였던 초기 철기시대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도 농사와 관련된 점복을 행하였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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