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2.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2) 사회
  • (3) 의식주생활

가. 음식

 초기 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걸쳐 철제 농기구 사용과 수전 개간 등 생산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농경작물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실제로 여러 유적에서 쌀·보리·콩·수수·조 등의 알곡 실물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전 시대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알곡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중에서 삶거나 쪄 먹을 때, 가장 찰기가 있고 먹기에 부드러운 쌀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장 선호되었을 것이다. 경남 삼천포 늑도1043)釜山大 博物館,≪勒島住居址≫(釜山大 博物館 遺蹟調査報告 13, 1989).나 강원도 춘천 중도1044)國立中央博物館,≪中島≫Ⅰ-Ⅴ(1980∼1984). 등에서 일반 사람들의 집자리로 보이는 유적에서 타다 남은 탄화미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로 쌀밥은 보급되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물론 벼 재배, 특히 수전농사가 적합하지 않은 환경적 조건을 가진 한반도 북부지방의 산간지역이나 제주도와 같은 도서지방의 경우 쌀밥 먹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신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것처럼 다른 잡곡류도 주식으로 많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쌀이 산출되지 않는 내륙지방에 있더라도 원거리 수송을 통해 구해 먹었음은 물론이다.

 해안지방에서는 물론 조개와 해산물을 음식으로 많이 섭취했다. 전남 해남 군곡리 등의 패총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다양한 종의 어패류가 식용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고기로는 숭어·농어·물렁돔·참돔·황새돔과 고등어 등이, 그리고 조개류는 굴을 비롯하여 꼬막·소라·고둥 등이 패총에서 출토하였다.1045)崔盛洛,≪韓國原三國文化의 硏究-全南地方을 中心으로≫(學硏文化社, 1993). 또한 내륙에서는 강에서 나는 우렁이·다슬기·재첩 등을 잡아먹은 사실이 광주 신창동 늪지유적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수산물은 대체로 단백질이 풍부하나 탄수화물이나 지방질이 적은 식품이므로, 해안마을이더라도 탄수화물이 많은 알곡작물과 지방질이 많은 육상동물의 고기를 섭취 보완해야 했을 것이다. 남해안지방은 물론 제주도에서는 이 시기의 패총에서 다량의 사슴과 멧돼지 뼈가 나오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며, 그 밖에 수렵과 사육기술의 발달과 함께 물새나 닭과 같은 조류의 고기도 적지 않게 섭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음식을 조리하는 도구로서 이 시대에 와서 특별하게 발전한 것은 시루형 토기의 등장이다. 시루는 바닥에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어 물솥에 올려 놓고 불을 때면 뜨거운 수증기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내용물을 익혀준다. 이러한 시루의 초기 형식은 전 시대에 보이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본격적인 시루는 초기 철기시대 특히 기원후 삼국시대 전기에 들어와서인데, 남북한 전 지역에 걸쳐 웬만한 유적에서는 그 실물자료가 발견되었다. 무문토기 시루는 크기도 작고 구멍 또한 몇 개 안 뚫렸으며, 회색도기로 만들어지면서 오늘날의 것과 유사한 모양의 시루가 된다. 회색도기로 만들어진 시루가 그 훈증의 효과가 보다 높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조리용 용기로서 시루와 같은 찜기가 발전하였다는 것은 이 단계에 논농사가 대규모적으로 행하여져 쌀 수확량이 크게 증가했다는 데 바탕을 둔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루는 오늘날처럼 쌀로 떡을 해먹는 데 쓰여졌을 것이다. 쌀을 음식으로 조리하는 방법으로는 오늘날처럼 일정량의 물에 담구어 삶아 불려 밥을 해먹거나, 죽을 해먹는 방식이 있지만, 시루를 사용해 떡을 해먹을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 전기에 다른 지역과 달리 쌀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는 제주도와 같은 도서지방에서는 시루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제주도의 경우 지리적 조건이 수전 농경에 적합하지 않으며, 따라서 쌀을 쪄먹는 시루가 발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음식을 조리하고 먹을 때 사용하는 그릇으로 흙으로 빚어 만든 적갈색토기와 회색도기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상위 신분층은 그 중 회색도기를 많이 사용하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예리한 날을 가진 철제칼과 같은 철기를 이용하여 나무를 가공하기가 보다 수월해지면서, 목기가 크게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색도기는 그 자체가 삼국시대 전기에는 아직 귀할 뿐만 아니라 내구성에서는 오히려 목기에 훨씬 뒤지는 바, 상하위 신분 가릴 것 없이 목기는 널리 애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기의 유기질 성분 때문에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실물자료는 많지 않은데, 최근에 남한의 광주 신창동 늪지유적에서 여러 점 발굴 조사되었다. 아직 정식 보고되지 않아 전체 종류를 알 수 없으나, 조리용과 食膳用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릇이 알려져 있다. 전자는 전체 길이 52cm로 평면 장방형의 부삽 모양의 몸체 한 쪽 단면에 손잡이가 달린 것으로 반쪽만 남아 있고, 후자는 길이 34.8cm의 장타원형 그릇의 일부 조각이다.1046)국립광주박물관, 앞의 글(1997년 5월 12일).

 목기 중에는 칠을 한 칠기가 있어 제사나 부장용으로 사용되거나 상위 신분 사람들이 애용하였음이 창원 다호리 목관묘에 부장된 고배모양의 칠기와 광주 신창동의 칠이 들어 있는 용기를 통하여 알 수 있다.1047)국립광주박물관, 위의 글.

 ≪삼국지≫기록을 보면 夫餘에서는 음식을 마시고 먹을 때 狙豆를 사용하고 같이 술을 마시는데 잔을 공손히 받으며, 마신 후 잔을 씻었다는 기록104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이 보인다. 저두는 우리 나라 전역에 걸쳐 보편적이었던 것이었음이 東夷들은 음식에 모두 저두를 사용했다104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挹婁.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 삼한지역에서도 다호리 출토의 목기 고배를 통하여 豆에 해당하는 용기가 실물로 확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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