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Ⅱ. 철기문화
  • 3. 주변지역 철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3) 형성·보급기(전국 중∼만기)

(3) 형성·보급기(전국 중∼만기)

 이제까지 전국시대 중만기의 유적으로는 250개소 이상이 정식으로 보고되어 있고, 철기의 수도 5,000점 정도에 달한다. 그런데 그 분포 양상에 있어서는 국가들 사이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燕과 楚지역에서는 다양한 철기들이 다수 확인 보고된 반면, 그 밖의 나라들에서는 중심지역에서 소수만이 출토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철기 분포상의 차등현상이 보이고 있어 이 시기를 전반적인 보급기라고 하기는 곤란하므로 지역차이를 고려하여 일단 形成·普及期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 시기의 농구류는 이전의 6종 외에 細長鋤, 多齒鋤(쇠스랑) 및 穗摘具(半月刀)가, 공구류는 夯錘·鏨 및 鋸가 새로이 출현하며 이들 농공구류의 출토수는 앞 시기에 비해 무려 10배 정도로 증가하고 있어 경제적인 생산분야에 있어 철기의 사용이 보다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된 병기는 청동기이지만 점차 철제품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이 시기 철기문화의 한 특징으로서, 전 시기에 이미 보였던 劍과 銅鏃莖 외에 鉾·戟 내지 戈·鏃·鐓·小刀 등의 철제화가 진행되는 양상을 보인다. 다만 그러한 현상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초지역에서 춘추 말부터 먼저 보이기 시작하고, 동촉경을 제외한 이 시기의 예들로는 거의 초와 연지역의 출토품들만이 알려져 있어 병기들의 철기화는 남방과 북방의 양국에서 상대적으로 먼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을 통일한 秦의 철제 병기는 아직까지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어 이러한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戰國시대 早期 이전의 정형화된 기타 잡기류는 4종(帶鉤·鼎·環·針) 정도만이 알려져 있으나 이 시기에 들어 새로이 車馬具, 刑具(足鎖·頸鎖), 鐵足銅鼎, 釜 및 釘 등이 제조되기 시작하며, 그 외에도 20여 종에 달하는 여러 형태의 철기들이 300점 가까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은 철 사용의 다양화와 철기제조 기술의 향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철 생산관련 유적은 상당수 조사되어 현재까지 철광산지, 야철지 및 철기제조 유적이 30개소 정도 알려져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권에 소재하고 있다.

 철광산은 河北省 興隆縣 古洞溝1077)鄭紹宗,<解放以來熱河省考古的新發見>(≪考古通訊≫ 1955-5). 외에 河南省의 두 곳 정도가 조사되어 있으나 내부의 구조가 정확히 파악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湖北省 大冶縣 銅祿山 銅鑛山址1078)銅綠山考古發掘隊,<湖北銅綠山春秋戰國古礦井發掘簡報>(≪文物≫ 1975-2).를 참고로 할 때 수직갱, 수평갱 및 斜坑 등이 마련되어 深掘이 행하여졌을 것으로 보이며 지역에 따라서는 砂鐵도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식으로 발굴 보고된 야철지는 아직 없는 듯한데, 하남성에서 鐵滓·爐壁片·爐底鐵塊 및 鐵鑛石 등이 채집된 유적이 다수 알려져 있으며1079)李京華,<十年來河南冶金考古的新進展>(≪華夏考古≫ 1989-3). 山東省 滕縣 古薛城 黃殿村에서도 철광석과 소토가 확인된 바 있다.1080)庄冬明,<縢縣古薛城發現戰國時代冶鐵遺址>(≪文物參考資料≫ 1957-5).

 이에 비해 철기 생산유적은 하북성·하남성·산동성·섬서성·강서성 등에서 모두 20개소 정도가 조사되었으며 그 대다수는 여러 都城들의 내부에 위치한 주철지로서 생산방식은 관영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河南省 登封縣 告成鎭유적1081)中國歷史博物館考古調査組 外,<河南登封陽城遺址的調査与鑄鐵遺址的試掘>(≪文物≫1977-12).과 新鄭縣 鄭韓故城 倉城村南유적1082)河南省博物館新鄭工作站,<河南新鄭鄭韓故城的銛探和試掘>(≪文物資料叢刊≫3, 1980).인데, 이 곳에서는 시설물들의 잔해와 함께 다양한 철기를 주조하는 데 사용되었던 陶范들이 다수 출토되었고, 특히 後者의 유적에서는 范窯 2基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한편 河北省 興隆縣 壽王墳유적에서는 六角鋤, 钁, 鎌, 斧, 鑿, 車具 등의 6종 86점에 달하는 鐵范이 채집되어1083)鄭紹宗,<熱河興隆發現的戰國生産工具鑄範>(≪考古通訊≫1956-1). 당시 주조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려 했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철기들 가운데 20여 점 정도가 금속학적으로 분석되어 그 제조기술상의 특징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먼저 단조철기들은 기본적으로 塊鍊鐵을 소재로 한 浸炭鋼으로서 대부분 積層鍛打에 의해 제조되는 점은 이전과 동일하다 하겠으나, 河北省 易縣 燕下都 44호묘의 철검들 중에는 高炭部에서 martensite조직이 검출된 예들이 있어 이 시기부터 담금질(水燒入)기술이 개발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1084)北京鋼鐵學院壓力加工專業,<易縣燕下都44號墓葬鐵器金相考察初步報告>(≪考古≫1975-4). 그리고 주조철기들 가운데 일부는 취약한 성질의 白鑄鐵조직으로 되어 있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연화처리가 되어 展性주철의 조직을 보이고 있고, 백주철과 灰鑄鐵이 혼합된 麻鑄鐵이나 표면부가 脫炭되어 鑄鐵脫炭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철기도 확인되어 점차 주조철기의 열처리기술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당시의 중국 철기문화는 내부적으로 성숙해가면서 晩期頃에 북방과 남방으로 확산되어 주변지역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점이 주목된다. 먼저 북방의 경우에 있어서는 평북 위원군 용연동유적1085)梅原末治·藤田亮策,≪朝鮮古文化綜鑑≫(1)(奈良;養德社, 1947).의 유물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燕國系 철기가 한반도 서북부에까지 전파되어 있었고 내몽고지역(대표 유적;昭烏達盟 敖漢旗遺蹟)1086)敖漢旗文化館,<敖漢旗老虎山遺址出土秦代鐵權和戰國鐵器>(≪考古≫1976-5).에서도 이와 유사한 양상이 확인되고 있다. 한편 廣西省 銀山嶺遺蹟1087)廣西壯族自治區文物工作隊,<平樂銀山嶺戰國墓>(≪考古學報≫1978-2).에서는 楚지역 특징의 凹字形具·鼎·鐵足銅鼎 외에 각종 농공구와 병기류가 다수 출토되어 남방지역도 전국계 철기문화의 영향권에 서서히 편입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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