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1. 고조선의 국가형성
  • 1) 고조선의 건국신화

1) 고조선의 건국신화

 古朝鮮은 우리 민족사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학계뿐 아니라 일반의 관심이 지대한 분야로서 이에 관하여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특히 고조선의 출현시기·강역·주민구성·정치사회적 성격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같은 고조선에 대한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첫째는 문헌을 충실하게 이용한 연구방법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역사와 신화를 혼용하였다든가, 역사적 측면의 인정이 소흘하였다는 등의 비판이 가해질 수 있으나, 고조선에 관한 자료를 고증·비판하였다는 점은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문헌은 문헌대로 이해하면서 考古學이나 人類學 등 인접 학문의 성과를 도입·접목시키려는 연구방법이었다. 이것은 前者의 연구성과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기 때문에 전자의 처지에서 보면 견해 차이가 있었고, 때문에 때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087)金貞培,<古朝鮮의 再認識>(≪韓國史論≫14, 國史編纂委員會, 1984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 出版部, 1986), 4쪽.

 문헌 위주의 연구방법은 주로 조선 후기 實學者들에게서 그 맥을 찾을 수 있으며, 이를 계승한 民族主義 史學者 및 일제 강점기의 日本人學者와 그들과 연관된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문헌과 고고학 등을 접목시키려는 연구방법은 해방 이후 남북한학계가 각각 기왕의 연구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게 축적된 고고학적 성과를 이용하면서 고조선에 대한 보다 다양한 해석과 견해를 내놓았다. 특히 북한학계는 1960년대 이후 고조선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하여 기존 문헌자료를 정밀하게 검토하고 나름의 고고학적 연구결과를 접목시켜 고조선의 중심지를 遼東地域에 설정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檀君陵을 평양 주변에서 발견하였다는 발표를088)사회과학원,≪단군릉 발굴 학술보고집≫(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93). 통해 종래의 견해를 바꾸었는데 향후의 입장정리가 주목된다.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문화적 複合性을 주목하여 고조선이 문화 단계별로 성격을 달리하는 사회형태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정치발전 형태에 대한 인류학이론을 도입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089)金貞培,<古朝鮮의 住民構成과 文化的 複合>(≪韓國民族文化의 起源≫, 高麗大 出版部, 1973). 특히 1980년대 이후 고조선의 강역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되어 최근까지 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090)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 市民講座≫2, 1988).
盧泰敦,<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韓國史論≫23, 서울大, 1990).
이는 북한학계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고 중국학계의 요동·요서 등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국내학계에 전해지면서 나타난 결과이다.091)李基東,<北韓에서의 古朝鮮 硏究>(≪韓國史 市民講座≫2, 1988), 89∼108쪽.
權五榮,<古朝鮮硏究의 動向과 그 內容>(≪北韓의 古代史硏究≫, 一潮閣, 1991), 25∼70쪽.
趙法鍾,<北韓의 古朝鮮史 認識體系에 對한 考察>(≪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1,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4), 138∼157쪽.
이러한 연구경향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조선을 하나의 집단으로만 이해하거나, 그러한 이해방식에 또다른 미화작업을 가할 때 고조선의 역사는 물론 한국사의 전체 흐름에 대한 올바른 歷史像이 부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檀君朝鮮이나 이른바 箕子朝鮮 그리고 이와 연결된 衛滿朝鮮을 정도 이상으로 내용을 축약하는 것 역시 바른 연구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 동안의 고고학의 성과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고학이 쌓아 놓은 업적을 채용하지 않고서는 보다 긍정적인 역사해석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고조선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파악하는냐에 따라 이 시대의 성격과 역사의 흐름이 판이하게 달라지게 된다. 즉 고조선의 존재시기와 시대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선결되지 않는다면 많은 혼란이 있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일반적으로 고조선은 靑銅器文化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일정 시기는 청동기문화를 향유하였다고 파악되지만, 단순히 고조선과 청동기문화의 단계만을 연결시키는 것은 再考의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청동기시대 초기나 그 이전 단계의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고고학만이 아니라 문헌이나 고대사의 입장에서도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고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古朝鮮’이라는 명칭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중국측 사료에서는 ‘朝鮮’이라는 표현이 시종 유지되고 있음에 비해, 우리의 전통 史書에서는 ‘고조선’이라는 표현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고조선이라는 표현은≪三國遺事≫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즉 紀異篇의 고조선條에 檀君朝鮮과 箕子朝鮮을 함께 서술하고 위만조선조를 별도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있다. 한편≪帝王韻紀≫에서는 前朝鮮이라는 항목에서 단군조선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後朝鮮 항목에서 기자조선을 언급하여 후속하는 衛滿朝鮮과 함께 三朝鮮으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두 사서의 서술상의 차이는 이후 학자들에게 고조선으로 망라되는 역사체의 구체적 범위와 내용에 대한 견해차를 가져오게 하였다. 즉 고조선을 단군·기자·위만조선이 모두 포괄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반적 견해와,≪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서술되어 있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으로만 보는 견해,092)金貞培, 앞의 책(1986), 9쪽. 또는 단군조선만으로 한정하여 보고자 하는 견해093)李基白,<古朝鮮의 國家형성>(≪韓國史 市民講座≫2, 1988), 2쪽. 등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고조선이라는 표현에만 한정한다면≪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고조선은 넓은 의미에서 위만조선까지 포괄하는 개념은 아니다.094)≪三國遺事≫古朝鮮條에서는 檀君의 建國神話와 箕子에 대해서만 싣고 있으므로 고조선에 衛滿까지를 포함시킬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고조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온 것처럼 후대의 조선과 구별하여 고조선이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에는 아직 조선이 건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고조선은 일단 단군과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위만조선보다 더 오랜 조선이라는 뜻에서 고조선이라고 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조선조는 단군과 기자에 대해서 언급하였지만 내용면에서 檀君神話의 서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하튼 고조선조에는 단군과 기자에 대해서 언급해 놓았으므로 고조선에 관한 초점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모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3단계로 구분하여 보는 전통적 이해방식을 받아들여 각각의 역사체를 포괄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 먼저 중국측 기록인≪史記≫朝鮮傳을 주석한≪史記集解≫에서는 3세기경의 魏나라 張晏의 견해를 인용하여 조선에는 濕水·洌水·汕水 3개의 江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져서 洌水가 되었으며 樂浪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 같다고 하였다.095)≪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또≪山海經≫의 註釋者인 4세기 초의 郭璞은 “조선은 遼東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라고 하였다.096)≪山海經≫권 12, 海內北經 및 권 18, 海內經. 이같이 중국의 사서류에 나타나 있는 조선의 명칭은 지리적 위치가 중심이 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우리의 전통 역사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즉≪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동쪽 끝에 있어 해가 뜨는 지역이므로 조선이라 불렀다”고 하였으며,097)≪新增東國輿地勝覽≫권 51, 平壤府 郡名.≪東史綱目≫에서는 “鮮卑의 동쪽에 있으므로 조선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이같이 우리의 전통 역사서에서 ‘조선’이라는 명칭은 지리적 요소와 함께 종족적 성격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申采浩와098)申采浩,≪朝鮮上古文化史≫(≪丹齋申采浩全集≫권 上, 1972), 351∼369쪽. 鄭寅普는099)鄭寅普,≪朝鮮史硏究≫(서울신문사, 1947), 51∼52쪽. 조선을 ‘같은 소속’을 의미하는 滿洲語의 珠申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였다.100)≪滿洲源流考≫에서는 원래 滿洲語로 ‘所屬’을 의미하는 말이 珠申이라고 하였는데 肅愼은 주신이 轉音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소속’을 ‘管境’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주신은 곧 국호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옛 문헌에 보이는 朝鮮과 숙신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호칭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의 명칭은 주신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대 조선족은 태양숭배 신앙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도처에 ‘밝’이나 ‘새’라는 지명을 남겼을 것으로 보고, 朝를 ‘밝’으로 鮮을 ‘새’로 해석하여 조선을 ‘밝새’로 본 견해도 있다.101)梁柱東,≪古歌硏究≫(博文出版社, 1957), 380∼391쪽. 한편≪삼국유사≫고조선조에 “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에 주목하여 아사달과 조선이 同意語일 것으로 보고, ‘조선’은 곧 고대 조선의 단어 ‘아사달’의 중국식 모사라고 한 견해도 있다.102)李丙燾,<檀君說話의 解釋과 阿斯達問題>(≪서울大論文集≫人文社會科學 2, 1955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27∼43쪽.
한편 북한학계는 기본적으로 장안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약간의 이견을 보이고 있는데, 습수·열수·산수 등의 명칭으로부터 肅愼·息愼·稷愼 등 숙신족의 여러 명칭이 배태되었다고 보면서, 조선은 결국 위의 水名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숙신이라는 종족명칭을 통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103)리지린,≪고조선연구≫(사회과학출판사, 1964), 11∼20쪽.

 이같이 조선이라는 명칭에 대한 여러 견해는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지역명칭으로 이해하는 경우와 종족적 특성을 반영한 種族名으로 파악하는 경우로 대별된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지역적 특성과 함께 종족적 특성이 고려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역적 특성을 강조한 견해는 江과의 관련성이 언급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당시 가장 대표적인 지형적 특성으로서 강의 존재가 중시되었겠지만, 특히 조선이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세 개의 강이 거론되고 있음은 고조선의 위치 비정에 특히 유념하여야 할 사항이다.

 고조선의 단군신화가 실려 있는 현존 자료로는 고려시대 一然의≪三國遺事≫104)≪삼국유사≫의 편찬 연대는 일연(1206∼1289)이 만년에 麟角寺에서 저술하였던 사실을 감안할 때 70세 중반경인 1280년대인 것으로 파악된다.
崔南善 編,≪新訂 三國遺事≫(三中堂書店, 1941).
리상호 역,≪삼국유사≫(과학원 출판사, 1960).
金相鉉,<三國遺事의 書誌學的 考察>(≪三國遺事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17∼28쪽.
와 李承休의≪帝王韻紀≫105)≪帝王韻紀≫의 편찬연대는 李承休의 自序에 至元 24년(1287)으로 나타나 있어 ≪삼국유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및 조선 초기의≪世宗實錄地理志≫,106)≪世宗實錄地理志≫는 단종 2년(1454)에 편찬된 것으로 平壤府條에도 단군신화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帝王韻紀≫의 내용과 유사하다. 權擥의≪應製詩註≫가107)≪應製詩註≫는 조선 초기의 權近(1352∼1409)이 지은 시에 손자인 權擥(1416∼1465)이 주석을 가한 책으로서<古記>를 인용하고 있는 부분은≪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 고조선에 대한 기술은≪삼국유사≫의 기록이 보다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 실려있는 단군신화는 桓雄이 熊女와 혼인하여 檀君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 데 비하여,≪제왕운기≫에는 웅녀가 나오지 않고 孫女가 人身이 되게 하여 檀樹神과 결합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후자는 웅녀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두 기록에도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내용은 조선 초에 편찬된 사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서≪세종실록지리지≫는≪삼국유사≫를,≪응제시주≫는≪제왕운기≫의 기사를 각기 채록하고 있다.108)金廷鶴,<古朝鮮의 靑銅器文化>(≪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8), 49쪽.

 먼저≪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는 그 내용이<魏書>와<古記>라는 데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壇君王儉이 있었다. 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하였는데 이는 堯임금과 같은 시대이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古朝鮮).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위서>라는 책은 중국의 삼국시대에 존재한 魏에 관한 역사책으로서 위나라 때부터 2000년 전이라는 연대를 감안할 때, 적어도 기원전 1700∼1800년 전으로 단군의 존재시기를 설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단군을 중국의 전설적인 왕인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함으로써 그 연대의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 기록에서는 요임금의 존재시기를 전제로 하여 단군왕검을 부각시켰고, 지리적 위치로서 아사달이라는 구체적 지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신빙성과 관련하여<위서>라는 기록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현존하는 위나라 관련 역사서에서는 이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허구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09)今西龍,<檀君考>(≪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1937), 8∼9쪽. 그러나<위서>라는 사서는 중국의 여러 사서들 가운데 매우 다양한 異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이름만 전해지는<위서>라는 서명이 여러 종류인 점을 감안할 때, 단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부정하거나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110)崔南善,<三國遺事解題>(≪啓明≫16, 1927 ;≪新訂 三國遺事≫, 三中堂書店, 1941, 42∼48쪽).
李丙燾, 앞의 책, 28쪽.

 한편<고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인용되고 있다.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桓因의 庶子 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이 있어 인간세상을 지망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三危 태백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들에게 큰 이익을 줄만 하였다. 이에 天符印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三千을 이끌고 太伯山 꼭대기에 있는 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그 곳을 神市라 하였으니 이가 바로 환웅천왕이다. 그는 風伯과 雨師와 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교화를 베풀었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神雄에게 기도하여 사람되기를 원하였다. 이 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햇빛을 백일 동안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얻어 먹고 21일 동안 삼가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호랑이는 능히 삼가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아기갖기를 빌었다.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였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壇君王儉이라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50년 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古朝鮮).

 이와 줄거리는 비슷하지만≪제왕운기≫는<本紀>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本紀에 이르기를 上帝인 桓因에게 서자인 雄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사람에게 도움을 주라”고 하였다. 이 까닭에 웅이 天符印 3개를 받고 鬼 3천을 거느리고 太白山 꼭대기 神檀樹 아래에 내려오니 이를 일러 檀雄天王이라 하였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으로 되게 하고 檀樹神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이 檀君이었다. 朝鮮의 지경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다. 이 까닭에 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와 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 1,038년을 다스리고 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이 되니 죽지 않기 때문이다(≪帝王韻紀≫권 下).

 이같이 단군신화를 전하고 있는≪삼국유사≫와≪제왕운기≫는 각각 전대의 문헌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즉 삼국유사는<고기>를, 제왕운기는<본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13세기 당시의 고려에는 이미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으로서<고기>로 지칭된 것과,<본기>로 불려지는 것 등 두 가지 종류가 병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명칭과 내용의 상이에 관해서는≪삼국사기≫에 앞서 존재한≪舊三國史≫와<고기>의 성격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이들 사서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111)<고기>와≪구삼국사≫가 동일하다는 견해는 김부식의<進三國史記表>에<고기>를 인용하였다는 대목과, 이규보의≪東明王篇≫序에 김부식이≪구삼국사≫를 축약하여≪삼국사기≫를 찬술하였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제시되었다.
김영경,<「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보이는 ‘고기’에 대하여>(≪력사과학≫2, 1984), 28∼31쪽.
鄭求福,<고려 초기의「삼국사」編纂에 대한 一考>(≪國史館論叢≫45, 國史編纂委員會, 1993), 163쪽.
있으나 일단은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112)<고기>와≪구삼국사≫는 김부식이 구삼국사를 축약하여≪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기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로<삼한고기>및<해동고기>를 인용한 것으로 믿어지므로 이들 사서는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金貞培,<檀君記事와 관련된「古記」의 性格>,≪韓國 上古史의 諸問題≫,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163쪽). 또한<고기>의 단군관련 기사가 여러 기록 가운데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단군신화가 실려 있던 고기는 바로<三韓古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13)金貞培, 위의 글, 173쪽.
李康來,<三國遺事 引用 古記의 性格>(≪三國史記 典據論≫, 民族社, 1996), 193∼207쪽.

 이상에서 보았듯이 단군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두 기록은 기본적인 내용에서는 비슷하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먼저 단군을 표현하는 데도≪삼국유사≫에서는 제단 ‘壇’자로 壇君을 표기하고 있는데 비해,≪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 ‘檀’자로 檀君이라 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후자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삼국유사≫에는 곰이 변한 熊女가 桓雄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제왕운기≫에는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변하게 한 뒤 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차이는 두 기록이 쓰여진 연대가 10여 년 정도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각각 전거를 달리했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삼국유사≫가 참고한<고기>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면≪제왕운기≫가 참고한<본기>의 내용은 보다 후대의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즉 웅녀의 존재를 강조하는 내용과 이를 환웅의 손녀로 바꾸어 놓은 것은 儒家的 觀念에 의해 분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학계에서는 여러 자료들 가운데에서≪삼국유사≫의 기록을 중시하였지만 여기에 기술된 檀君神話에 대해서 비판이114)北崖,≪揆園史話≫.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또는 20세기 초의 기록이라고 하는≪揆園史話≫는≪삼국유사≫의 단군에 관한 기록이 원형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115)단군관련 기사로서 대표적인 재야사서인≪桓檀古記≫,≪檀奇古史≫등의 서적은 후대의 위작이란 사실에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揆園史話≫의 경우 道家類 사서로서 조선 숙종년간의 저술로 파악하는 견해와 20세기 초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병립하고 있다.
李相時,≪檀君實史에 대한 문헌고증≫(가나출판사, 1987).
趙仁成,<揆園史話와 桓檀古記>(≪韓國史 市民講座≫2, 1988), 71∼88쪽.

 이같은 단군신화에 대한 기왕의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崔南善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에 주목하여 이들 동물을 대상으로 한 토테미즘의 존재를 강조하였다. 특히 熊母의 존재를 중시하여 이를 母系的 사실의 투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단군의 어원을 巫인 ‘당굴’에서 찾아 단군은 즉 事天者를 뜻하며, 王儉은 왕호 특히 巫君的 칭위라고 하여 檀君王儉이 天君 또는 무군을 의미한다고 하였다.116)崔南善,<檀君及其硏究>(≪朝鮮及朝鮮民族≫1, 1927 ; 李基白 編,≪檀君神話論集≫, 새문出版社, 1990, 14∼19쪽). 이같은 최남선의 견해는 韓民族의 사상과 그 문화의 전파 범위를 논한 그의 不咸文化論과117)崔南善,<不咸文化論>(위의 책).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비록 언어적인 풀이가 많지만 당시의 연구수준을 알려주는 것이다.

 申采浩는 고조선을 신·불·말조선, 즉 삼조선으로 구성된 역사체임을 전제로 하여 이들의 중심 무대가 遼西·遼東지역이라는 관점에서 단군신화를 이해하였다. 특히 단군을 삼조선 분립 이전인 신수두를 개창한 영웅적인 대추장이며 종교적으로는 천신인 光明神을 섬기는 존재로 파악하였다.118)申采浩,≪朝鮮上古史≫(≪丹齋 申采浩全集≫권 上, 1972). 또한 儒敎와 佛敎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신앙인 郎家思想의 연원을 단군에서 구하고 있다.

 한편 산동반도지역에서 발견된 武氏祠堂 畵像石에 나타나 있는 그림내용을 주목하여 이를 단군신화와 연관지어 파악한 견해도 있다. 이에 의하면 화상석에 나오는 그림의 내용이 호랑이로 묘사된 부분을 제외하면 상당 부분 단군신화에 나오는 내용과 일치하며 이는 단군신화가 북방계의 곰의 獸祖神話와 연결된다는 것이다.119)金載元,≪檀君神話의 新硏究≫(正音社, 1947), 45∼49쪽.
한편 이같은 견해에 대해 무씨사당 화상석의 내용이 단군신화와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金元龍,<武梁祠 畵像石과 檀君神話에 대한 再考>(≪考古美術≫146·147, 1980 ;≪韓國美術史硏究≫, 一志社, 1987).

 또한 단군신화는 天神族인 환웅이 地神族인 고마족의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삼국유사≫의 웅녀를≪제왕운기≫에서 환인의 손녀라 고친 것은 동물의 熊자를 피하기 위하여 개작한 것으로 이는 원형을 잃은 설화라고 한다. 또한 단군이라는 표현은 제사장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祭政一致時代에는 단군뿐이었으나, 제정이 분리된 후에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이라 하고 정치단체의 장은 왕검이라 하여 각기 맡았던 지역도 달랐던 것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120)李丙燾, 앞의 책, 29∼34쪽.

 그리고 문헌과 인류학의 성과를 연결시킨 연구도 있다. 단군신화를 三神思想의 한 표현으로 보면서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의 두 계통의 신화가 결합된 것이 단군신화라고 보는 것이다.121)金廷鶴,<檀君說話와 토오테미즘>(≪歷史學報≫7, 1954). 즉 이 신화는 삼신사상의 표현으로서 환인은 여신으로서 천제인 태양신이며 그의 아들이 神雄이고 그의 孫이 인신으로 세상을 다스렸다는 天孫思想과, 곰과 호랑이에 대한 숭배인 토테미즘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단군신화는 환인-웅-천손으로 이어지는 태양신화와 웅녀-단군으로 이어지는 토테미즘의 두 계통의 신화가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결합은 신화를 달리하는 두 부족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통합되었을 때 두 부족의 始祖神話가 합쳐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 신화는 고조선의 一部族的 시조신화였던 것인데 삼국통일과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한민족 전체의 시조신화로 확대되었다고 한다.122)金廷鶴, 위의 글, 281∼287쪽.

 나아가 단군신화 속에서 샤마니즘의 종교적 세계를 찾아 볼 수 있고 또한 토테미즘이라는 사회적 요소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단군은 三韓의 天君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천군은 종교적 제사장이었다고 하였다. 환인은 불교의 東方護法神을 나타내는 불교용어이고 이를 오늘날의 하느님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환인은 하늘 위에 있는 광명의 신으로서 이는 태양숭배를 나타내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환웅은 巫로서의 기능을 가졌고 王儉을 정치적 통치자로 보는 견해를 따르고 있다.123)李基白,<檀君神話의 問題點>(≪增補版 韓國古代史論≫, 一潮閣, 1995), 14∼15쪽. 특히 이와 관련하여 箕子朝鮮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단군조선을 곧 고조선으로 파악하면서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성립한 것으로124)李基白,<古朝鮮의 諸問題>(위의 책), 21∼29쪽. 이해하였다. 이것은 문헌의 입장에 선 해석이며 기자조선이 존속한 기간은 고조선이 그대로 자리를 점한다는 시간 관념을 갖고 있다.

 이와는 달리 韓民族의 형성과정에서 先住漁獵民인 고아시아인과 後來農耕民인 북몽골인의 두 계통의 동화 내지 교체가 진행되었다는 견해를125)金貞培, 앞의 책(1973), 160∼209쪽. 수용하여, 단군신화에는 한민족의 원형인 韓·濊·貊이 형성되는 과정과 농경민의 등장에 의하여 농경문화가 개시된 것을 본격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단군조선은 곰과 범을 상징으로 하는 두 개의 族團이 先住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천제의 아들을 自任하는 어떤 지배자와 족단이 동방으로 이주하여 선주민을 동화 또는 정복하였다고 한다. 단군은 처음에는 고조선지역의 어느 대표적인 족단의 지배자였는데 뒤에는 그 족단의 조상신이 되었고, 그 후의 역사 전개에 따라 단군은 점차 한반도와 만주 방면 주민이 공통으로 섬기는 조상신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은 곰과 범(선주의 어렵민)과 천제의 아들(후래의 농경민) 사이의 동화 내지 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 한민족의 직계조상이 형성되는 과정과 우리 역사에서 농경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단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126)千寬宇,<古朝鮮의 몇가지 問題>(≪韓國上古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7), 121∼138쪽.

 그리고 단군관련 기록은 신화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단군신화의 연대는 후대에 소급하여 놓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의 국가 형성 시기는 고조선지역에 중국계의 이주민이 등장하여 정치적인 자극과 압력을 가하게 된 기원전 12세기 말 전후라고 한다. 또한 고조선의 先住세력은 곰집단으로 표현되고 중국계의 이주민집단은 범집단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곰집단과 관계를 맺은 중국계 이주민집단은 환웅집단으로 표현되었다고 보고 이들 환웅집단이 국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127)李鍾旭,≪古朝鮮史硏究≫(一潮閣, 1993), 67∼73쪽. 이같은 인식은 중국계의 존재를 부각하면서 단군의 성격을 중국과의 관련하에서 설정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세력집단을 고고학적 자료와 연관시켜 일정한 종족집단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 견해는 고조선으로 지칭되는 역사체의 사회·문화적 성격을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나누어 역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단군신화는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인의 문화와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서 곰숭배를 하던 古아시아族(Paleo-Asiatics)의 일파가 남긴 문화라고 보았다. 즉 단군조선은 신석기시대에 고아시아족의 一種族이 담당한 문화이며, 이른바 기자조선의 주민은 고아시아족이 아니라 알타이계의 無文土器人들이었다고 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고조선의 문화가 단일 문화현상이 지속된 것이 아니라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의 변환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특히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주민들은 중국 사서에 자주 나오는 濊貊族으로서, 箕子가 東來한 사실은 믿을 수 없으므로 예맥족이 담당한 조선이라는 의미에서 箕子朝鮮을 ‘濊貊朝鮮’으로 달리 불러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들 예맥조선의 문화가 청동기문화로서 이 기간에 주로 支石墓와 石棺墓가 축조되었다고 한다. 한편 중국문화의 영향은 전국시대 이후 조금씩 보이고 있으나 그 이전에는 중국문화와의 관련성이 상대적으로 낮다고 파악하였다. 기자조선에 대하여도 고고학적으로 기자의 동래에 대한 증거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그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자조선을 韓氏朝鮮이라고 하는 주장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위만조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철기문화를 수용하였으며 그 지배자와 주민은 巨石文化와 청동기문화를 계승한 濊貊人이 틀림없다고 하였다.128)金貞培, 앞의 책(1973), 160∼209쪽. 이같은 견해는 고조선을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셋으로 나누어 각기 고고학적 자료와 연관시키고 그 종족의 계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단군에 관한 이해는 문헌과 고고학적 성과를 연관시켜 단군신화가 반영하는 역사상을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 있는 사회상이 고고학적으로 어떠한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을 중심으로 볼 때 熊女의 존재는 곰의 자손이라는 생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신화의 내용을 동북아시아지역과 연결시켜 고아시아족의 존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아시아족은 자신들을 곰의 자손이라고 믿는 시조신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아시아족은 곰숭배사상과 함께 샤머니즘이라는 종교적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하늘 또는 최고의 샤먼을 지칭하는 명칭인 ‘텡그리’라는 표현은 단군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샤먼의 기능과 관련된 世界木觀念이 단군신화에 神檀樹 등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하여 단군신화의 내용이 고아시아족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지역과 연결되는 것이고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은 단군신화가 신석기문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단군기원 연대로서 제시되고 있는 ‘唐高 卽位後 50年’이란 기록과도 연관이 된다. 즉 기원전 2333년이라는 연대는 우리의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시작된다는 고고학계의 견해를 참고할 때, 이 시기는 고고학상으로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므로 단군신화는 신석기문화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단군조선을 보는 시각과 그에 따르는 문제점을 일별하여 보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연구자에 따라서는 단군조선은 실재하지 않았던 신화일 뿐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또 단군조선과 고조선이 동일한 실체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단군신화를 건국신화로만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단군조선을 역사적으로 실재한 것으로 인정하는 경우에도 세부적으로는 역시 차이가 있다. 이같은 현상은 결국 고조선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역시 전통적인 사료와 해석을 일단 존중하면서 시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이다.

 한편 고조선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箕子의 東來에 관한 기사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기자는 殷代의 賢人으로≪史記≫宋微子世家條와≪尙書大全≫에 관련 전설들이 보이는데 은의 마지막 왕인 紂王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기자가 은이 멸망하는 시기에 ‘朝鮮’지역으로 망명하였다는 것이 관심의 초점인데,≪漢書≫地理志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기자의 조선 교화기사가 그것이다.129)≪漢書≫권 28 下, 志 8 下, 地理.
“殷道가 쇠하자 箕子가 朝鮮에 거하여 그 백성에게 禮義, 田蠶, 織作을 가르치고 樂浪朝鮮民에게 犯禁八條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의 中華思想에 의한 서술일 뿐이고, 기자의 동래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箕子東來說은 역사적 진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른바 기자조선은 개아지조선,130)崔南善,≪兒時朝鮮≫(東洋書院, 1927), 33∼36쪽. 또는 韓氏朝鮮,131)李丙燾, 앞의 책, 47∼55쪽. 濊貊朝鮮132)金貞培, 앞의 책(1973), 210∼221쪽.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견해에 의해 극복된 설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기원전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사회의 경우 殷·周의 교체가 있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신석기문화 단계에서 새로운 청동기문화가 개시되면서 濊貊族으로의 種族交替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133)위와 같음. 또한 시베리아지역에서는 기원전 13∼12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종의 안드로노보문화에서 몽골종의 카라수크 청동기문화로 종족과 문화의 변동이 있었다.134)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一志社, 1986), 62∼64쪽. 이같은 사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종족과 문화의 변동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에서 기자동래설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 시기에 기자의 동래가 있었다고 한 것은 우리 민족사의 전개에서 문화 단계에 하나의 큰 변동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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