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1. 고조선의 국가형성
  • 2) 동이족과 그 문화권
  • (2) 비파형청동단검문화

(2) 비파형청동단검문화

 고조선의 고고학적 문화성격을 설정함에 있어 지석묘와 함께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된 것은 琵琶形靑銅短劍144)이 청동단검은 만주식 동검, 요령식 동검, 곡인검 등으로 불려지던 것이다.으로 대표되는 청동기문화이다. 비파형동검은 발생시기와 분포양상 및 담당종족의 성격이 고조선문화의 내용과 상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조선을 대표하는 문화로 파악되고 있다. 즉 지석묘에서 발전된 석관묘와 석곽묘 계통의 분묘에서 주로 출토된 비파형동검은 이들 묘제가 지석묘를 계승하여 발전된 형태라는 점과, 대부분의 지역이 이들 지석묘문화와 중첩되며 일부 지역적 확장형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기원전 10세기경부터 遼東과 遼西를 포괄하는 요령지역 및 內蒙古와 연결되는 지역, 그리고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殷·周靑銅器文化와는 구별되는 비파형청동단검문화로 바뀌게 된다.145)林 沄,<中國東北系銅劍初論>(≪考古學報≫80-2, 1980).
內蒙古지역 靑銅器文化와의 관련성은 차후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李康承,<遼寧地方의 靑銅器文化>,≪韓國考古學報≫5, 1979).
이 문화는 남부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의 영향146)金貞培, 앞의 책(1973), 170∼209쪽. 아래 요하를 중심으로 발전된 문화로서 요서지역의 夏家店 上層文化147)靳楓毅,<夏家店上層文化及其族屬問題>(≪考古學報≫87-2, 1987).
朱 泓,<夏家店上層文化居民的種族類型及相關問題>(≪遼海文物學刊≫, 遼寧省博物館四十周年紀念特刊, 1989-1).
, 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 길림지역의 西團山文化,148)李健才,<關于西團山文化族屬問題的探討>(≪社會科學戰線≫ 85-2, 1985). 한반도의 청동기문화 등으로 구분되는 양상을 보이며 발전하였다.149)靳楓毅,<論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上·下)(≪考古學報≫82-4·83-1, 1982·1983).
박진욱,<비파형단검문화의 발원지와 창조자에 대하여>(≪비파형단검문화에 관한 연구≫,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7).

 하가점 상층문화로 대표되는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은·주청동기문화와 연결되면서도 遊牧과 定住農業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주거 형태에서는 竪穴住居와 지상가옥 형태를 보이며 토기에 있어서도 중국계의 三足土器 형식인 鼎·鬲과 함께 북방 유목민 계통의 銅器와 動物形狀 및 북방식 동검 등의 양식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주요 묘제는 土壙竪穴墓와 석곽묘 두 종류인데 석곽묘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150)靳楓毅, 위의 글.
朱 泓, 앞의 글.
황기덕,<료서지방 비파형단검문화의 성격>(≪조선고고연구≫86-1, 1986).
이 문화는 요서지방과 내몽고자치구의 騷奧達盟 및 河北省 일부까지를 포괄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大凌河·小凌河유역과 북으로는 老哈河·西喇木倫河유역, 서남으로는 灤河유역을 망라하며 동으로는 요하를 경계로 하고 있다.151)대표적인 유적은 적봉 홍산후, 하가점 상층, 영성 남산근, 대릉하유역의 조양 십이대영자, 사아보, 금서오금당, 심양 정가와자 등지이다. 대부분의 유적이 산지와 평야가 연결되는 丘陵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東胡 계통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중국학계의 지배적 입장이기는 하지만,152)秋山進午,<中國東北地方の初期金屬文化の樣相>(≪考古學雜誌≫53-4·54-1·4, 1968·1969).
靳楓毅, 앞의 글(1982·1983).
尹武炳,<遼寧地方의 靑銅器文化>(≪韓國上古史의 諸問題≫, 1987).
춘추시대나 전국시대의 동호족은 현재의 동몽고지방에서 만주지방의 서북부에 걸쳐 있었으며 현재의 요령지방까지 남하하지는 못하였다153)金廷鶴,≪韓國の考古學≫(河出書房, 1972).는 사실과,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성격이 고조선의 청동기문화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조선 계통으로 상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요서지역에 비해 분묘에서 출토된 유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유적은 新金縣의 雙房類型으로 석관묘와 지석묘가 대표 유적이다. 이 유형의 분포는 旅大지구로부터 요하 지류인 渾河 북안에 이르고 있는데 비파형동검과 銅斧를 표지유물로 하고 있다. 또 이 지역은 미송리형토기로 대표되는 토기문화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154)鄭漢德,<美松里型土器の生成>(≪東北アジア考古硏究會二十周年紀念論文集≫, 1990).
―――,<紀元前 2千年期 後期 및 1千年期初 遼寧東部地方의 考古學>(≪先史와 古代≫5, 1993).
미송리형 토기는 평북 의주군 미송리 동굴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로 기형은 표주박형으로 긴목에 평평한 바닥을 특징으로 한다(사회과학원 출판사,<미송리형호>,≪고고민속≫1967-2).
二道河子 석관묘에서는 銅斧와 銅鏃鎔范이 출토되었고 崗上과 樓上유적은 積石墓群으로서 火葬과 多人葬이라는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북한학계는 이 다인장을 殉葬으로 파악하여 고조선의 노예국가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논거로 삼고 있다. 이 문화의 주인공을 東夷族 또는 濊貊 등으로 파악하여 고조선계로 이해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

 西團山文化는 길림·長春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요령의 撫順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주로 석관묘와 甕棺墓·토광묘 등의 묘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의 초기 유적은 영길 星星哨·西團山·騷達溝지역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초기 형태의 비파형동검은 많지 않은 편이다. 중국학계의 경우 서단산문화를 肅愼族과 연결짓고 있으며 북한학계에서는 夫餘와의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은 현재 그 출토예가 약 54개 정도 확인되고 있는데 석관묘·지석묘·토광묘 등의 분묘에서 주로 발견되었다.155)李健茂,<韓國의 靑銅器文化>(≪特別展 韓國의 靑銅器文化≫, 國立中央博物館, 1992), 126∼132쪽. 관련 유물은 동검·銅鉾·동촉과 동부 등이며 동검의 경우 磨製石劍·石鏃·石斧 등의 석기와 함께 출토되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파형동검은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것이 양과 내용의 면에서 요동이나 길림·장춘지구보다 풍부한 것으로 보아 한반도가 주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지역적 차이를 염두에 두고 이들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제품들을 구분해 보면 다음의<표>와 같은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156)岡內三眞,<東北アジアにおける靑銅器製作技術>(≪古代東アジアの靑銅製作技術の硏究≫, 1990), 627쪽.

지역\유물 청동용기 청동무기류 청동공구류 청동장식품 청동거마구
요서 鼎, 鬲, 尊, 卣, 簋, 盤, 簠, 罐, 豆 劍, 矛, 戈, 鏃, 鉞, 甲, 冑 斧, 刀子, 鑿 泡, 多鈕鏡, 帶鉤, 銅飾 鐮, 銜, 鈴, 鏡形飾, 車軸頭
요동   劍, 矛, 戈, 鏃 斧, 刀子, 鑿, 錐, 釣針 泡, 多鈕鏡, 釧, 銅飾 鐮, 銜, 鏡形飾, 喇叭形銅器
길림·장춘   劍, 矛, 鏃 斧, 刀子 多鈕鏡  
한반도   劍, 矛, 戈, 鏃 斧, 刀子, 鑿,
鉾, 釣針
泡, 多鈕鏡, 銅飾, 異形銅器 圓盤形銅器, 喇叭形銅器, 車軸頭

<표>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의 청동유물 출토 상황

 비파형청동단검문화의 이같은 지역적 분포는 출현시기와 발원지에 관한 논란을 가져왔다. 즉 청동기문화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동검에 대해서는 그 문화의 발원지와 중심지가 어디이며 그 창조자와 담당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주로 논의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학계에서는 비파형동검의 분포범위와 문화적 특징에 따라 요동 및 서북조선지방·요서지방·길림 및 장춘지방의 셋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요동지방의 청동단검문화는 기원전 12세기경, 길림·장춘은 기원전 11세기경, 요서지역은 기원전 9세기 중엽경 등으로 편년하여 요동지역의 雙房-二道河子형식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비파형청동단검문화는 요동지역으로부터 요서지역으로 발전되어 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문화를 고대 조선족의 문화로 파악하여 요서지방과 요동지방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차이도 인정하고 있다. 또 요동지방의 문화적 특징으로 비파형동검·선형동부 및 미송리식토기를 들고 이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이해하였다.157)박진욱, 앞의 글, 42∼58쪽.

 이에 대해 중국학계에서는 南山根-十二臺營子형식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이 문화가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청동단검의 편년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각기 다른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으나158)林 沄, 앞의 글.
霍德芳,<中國北方地區靑銅短劍分群硏究>(≪考古學報≫88-3, 1988).
霍德芳의 연구는 1980년 林沄이 제기한 曲刃短劍의 遼東起源說을 보완한 것으로 중국학계의 遼西起源說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요서지구가 기원전 9세기경, 요동지구가 기원전 7세기, 길림·장춘지구는 기원전 5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들은 族屬문제에 있어 요서지역의 문화를 東胡族의 문화로, 요동지역을 東夷族의 문화로 보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국내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영역 및 중심지문제와 관련된 각자의 입장에 따라 북한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중국학계의 견해를 수용하는 등으로 여러 의견이 엇갈려 있다. 그러나 비파형동검문화는 중국의 청동기문화와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로서 요하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에 분포하며 가장 초기적 형식이 요동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159)霍德芳, 위의 글.
박진욱,<고조선의 성립에 대하여>(≪조선고대 및 중세초기사연구≫, 교육도서출판사, 1992), 3∼8쪽.
또 그 기반이 되는 문화로서 지석묘문화의 범위가 이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지석묘가 석관묘로 발전되었다는 사실과 이들 석관묘에서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지석묘로 대표되는 초기 청동기문화의 지속적 발전이 비파형동검을 반출하는 석관묘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이들 문화의 영역이 요서·길림·한반도지역으로 확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과정에서 濊·貊·韓으로 대변되는 고대 한민족의 문화범주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중국과의 영역확정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접촉이 나타났고, 그같은 전후 과정이 ‘箕子傳說’ 및≪管子≫를 비롯한 先秦文獻 등에 나타나기 시작한 고조선 관련기사로 파악된다.

 한편 최근에는 청동유물에 대한 성분분석을 통해서160)崔 炷·金秀哲·金貞培,<韓國의 細形銅劍 및 銅鈴의 金屬學的 考察과 납同位元素比法에 의한 原料産地 推定>(≪先史와 古代≫3, 1992), 189∼213쪽.
崔 炷,<슴베에 홈이 있는 琵琶形銅劍 및 琵琶形銅鉾의 國産에 대하여>(≪先史와 古代≫7, 1996).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내용이 보다 심도있게 검토되고 있다. 특히 비파형동검 및 동모와 세형동검 등에 대한 납의 同位元素比에 의한 분석 결과, 청동 원료의 원산지로서 요령지방과의 연계성이 확인되고161)전남지역 출토로 전해지는 세형동검 3개와 동령 1개에 대한 성분을 분석한 결과 한국 세형동검은 Cu 75%, Sn 15%, Pb 10%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 및 오르도스 출토의 銅利器와 비교하면 밀접한 관련성은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 주대 청동기의 경우 Sn이 대개 15%인 것으로 보아 한국 세형동검은 오르도스보다 중국의 영향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있을 뿐만 아니라 비파형동검이 한반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작·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162)崔 炷, 앞의 글, 202쪽. 아직까지는 전체 유물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비파형동검의 경우 슴베에 홈이 있는 동검을 납의 동위원소비를 측정하여 남한·북한·요령성·길림성 및 중국 남부와 북부 등지의 광석의 동위원소비와 비교분석한 결과, 검토 대상이었던 한반도 출토유물은 모두 남한지역의 납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남한지역의 銅과 朱錫을 사용한 현지 제조품임을 보여주는 것이다.163)위와 같음. 또한 납 동위원소비의 수치는 일본 연구 자료와도 비교되는데164)馬淵久夫·平尾良光,≪アジア·中近東地域鑛床鉛の鉛同位體比システマティクス≫(文部省科學硏究費 補助金, 一般硏究 C, 1984). 검토대상인 세형동검 2례는 후대 자료이기는 하지만 경북 연화광산의 광석을 썼을 가능성이 크며, 세형동검 1례와 銅鈴은 중국 북부산으로서 요령성 청성자광산의 납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요령성산임을 알 수 있다.165)金正耀,<晩商中原靑銅器的鑛料來源>(第三屆國際科學史會議, 1985). 이같은 사실은 한반도의 비파형동검문화가 단지 비파형동검문화의 유물 확산 차원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자체의 생산기술과 원료조달을 위한 광산까지 확보한 단계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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