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2. 고조선의 변천
  • 2) 위만조선의 성립과 변천
  • (1) 위만조선의 성립

(1) 위만조선의 성립

 춘추 전국시대 및 진의 통일시기까지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유지하였던 고조선은 진·한교체의 혼란기에 대규모 유민의 유입으로 기왕의 정치체계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권담당 세력의 교체였다. 즉 否王과 準王으로 이어졌던 예맥조선은 衛滿의 정권찬탈로 인하여 정권담당자가 교체되면서 국가체제가 보다 체계화되었다. 다음의 사료가 이를 보여준다.

①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浿水를 건너 秦의 옛 空地인 上下障에 居하였다. 점차 眞番과 朝鮮의 蠻夷 및 옛 燕·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王險에 도읍하였다(≪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② 한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 衛滿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藩屛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로 임명하고 圭를 하사하고 百里의 땅을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 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인용≪魏略≫).

 위만조선과 관련하여 우선 위만의 출자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다. 즉 그를 古朝鮮系 流民으로 보기도 하고,247)李丙燾,<衛氏朝鮮興亡考>(앞의 책), 78∼82쪽. 漢系 燕人으로 보는248)三上次男,<衛氏朝鮮の政治社會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 吉川弘文館, 1966). 등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249)위만을 殷人의 후예로 보거나(金哲埈,<古朝鮮硏究의 回顧와 展望>,≪제1회 韓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仁荷大 韓國學硏究所, 1987), 중국 정치세력의 일환으로 보아 한국사에서 제외하려는 입장(尹乃鉉,<衛滿朝鮮의 再認識>,≪史學志≫19, 1985)도 제기되었다. 또한 위만의 원래 이름은 滿으로 그를 연의 朝鮮故地 점령에 의해 연인이 된 토착세력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50)박시형,<만조선(滿朝鮮)왕조에 관하여>(≪력사과학≫3, 1963).
서영수,<고대국가 형성기의 대외관계>(≪한국사≫2, 한길사, 1994), 256∼259쪽.
즉 중국식의 衛氏 姓을 가진 위만은 최초 사료에서 ‘만’으로만 나타나고 있어 그 성격이 보다 비중국적일 뿐만 아니라, 과거 연의 조선침공에 의해 복속된 고조선지역의 토착적 존재로서 조선계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한편 위의≪魏略≫에는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중국에서 망명하여 와서 조선의 준왕에게 西界에 거주할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그 대가로 조선의 藩屛이 될 것을 맹세하였으므로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에 임명한 후 백 리의 땅을 주었다고 하였다. 준왕이 변방의 長에 임명된 위만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사는 앞에서 본 대부와 대비되는 표현으로서 예맥조선 후기 단계에 보다 구체적인 관직적 성격의 칭호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박사라는 칭호는 당시 중국사회에서는 지방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직함으로 사용되었는데251)趙法鍾, 앞의 글, 113쪽. 위만에게 사여된 박사라는 칭호도 이와 상통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위만에 의해 국가체계의 변화를 가져온 고조선사회는≪사기≫조선전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주변 정치체들을 복속시켜 征服國家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252)金貞培, 앞의 책(1986), 35∼41쪽. 한편 주변 나라들과 한과의 경제적 교섭을 중계하여 富를 증대시켜 나갔다.253)崔夢龍,<韓國 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이같은 고조선의 정치·군사 및 경제적 성장은 결과적으로 한의 중국 재통일 이후 동방에 대한 중국의 확장정책과 대립하게 되어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한나라와 전면적인 전쟁을 치루어야만 했다. 위만조선은 진·한교체기에 요동일원을 중심으로 한 遼東故土에 대한 회복을 추진하였으며 燕·齊지역의 망명자들을 수용하여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국계 유이민은 秦始皇의 6國 정벌을 통한 통일과정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특히 기원전 226년경에는 연지역을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발생하였으며, 이후 몽염의 長城수축 등과 같은 대규모 노역동원에 따라 더욱더 증가하였다. 특히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사후에 일어난 진승·항우의 난으로 전국적인 혼란이 가중되자, 연지역뿐 아니라 제·조지역의 민까지 대량으로 망명해 왔으므로 고조선의 서부지역은 이들 유민과 기존 고조선 주민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거점으로 부상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위만으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세력집단을 형성하여 이들 집단이 결국 고조선의 준왕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다음 사료는 정권을 장악한 위만이 어떻게 주변지역에 세력을 뻗쳐나갔는가를 잘 보여준다.

孝惠高后의 시대를 맞아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遼東太守는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蠻夷의 君長이 天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할 것을 조건으로 滿을 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은 우수한 무기와 재물을 얻어 주변의 小邑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자 眞番과 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게 되니 사방 수천 리의 나라가 되었다(≪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위만을 외신으로 책봉한 것은 기원전 193∼192년경 사이로 추정된다.254)國史編纂委員會,≪譯註 中國正史朝鮮傳≫1(1989), 91쪽. 위만은 준왕을 축출한 직후 준왕을 정점으로 형성되어 있던 고조선과 주변 정치세력과의 갈등의 소지를 완전히 해소하고 새로운 국가체계를 정비하기 위하여 요동태수를 통해 한의 조공외교권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위만은 ‘外臣’이라는 형식적 예속방식을 통해 한에 대해서는 주변세력의 침략방지를 보장해주는 한편 그 반대급부로 漢의 철제무기 등을 공급받아 주변세력을 장악하는 기반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위만은 한의 책봉체제에 형식적으로 편입됨으로써 한과의 긴장요소를 제거하고 한나라의 우수한 무기와 물자를 공급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세력에 대해서는 급속한 팽창을 도모하여 眞番·臨屯 등의 주변정치체를 복속시키고 중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이같은 상황은 다음 사료에 잘 나타나 있다.

孝文帝가 즉위하였을 때에 장군 陳武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南越과 朝鮮은 秦의 전성기에 내속하여 신하가 되었었는데, 그 후에 병력을 갖추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중국을) 엿보고 있습니다”라 하였다(≪史記≫권 25, 書 3, 律).

 이같은 언급이 효문제(기원전 179∼157) 즉위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의 책봉체제에 편입되어 외신으로 인식되었던 위만조선이 약 20여 년이 지난 뒤에는 중국에 대한 위협적 존재로 뚜렷이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시 한은 匈奴의 팽창에 매우 긴장하고 있었고 東胡를 격파한 흉노가 이미 濊貊·朝鮮과 접하고 있었으므로255)≪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위의 사료에 나타난 匈奴의 單于 冒頓이 東胡를 파하고 穢貉朝鮮과 접한 시기는 기원전 209년이다.
文帝시기에는 조선을 흉노의 ‘왼쪽 팔’로 인식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256)≪漢書≫권 73, 列傳 43, 韋賢. 사료상에 더 이상의 구체적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위만조선은 중국과의 ‘외신’관계를 통하여 일정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은 상태에서, 주변의 정치체를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흉노세력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개선하여 협조체제를 유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같은 위만조선의 팽창은 중국뿐만 아니라 기존 토착사회의 여타 정치세력에게도 위협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이같은 상황이 구체화된 사건이 濊君 南閭의 漢 遼東郡 내속이었다.257)≪漢書≫권 6, 本紀 6, 武帝 元朔 元年 秋.
≪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濊 元朔 元年.
28만여 口에 이르는 대규모의 집단을 거느리고 있던 존재인 예군 남려의 이탈은 위만의 팽창과정에서 야기된 갈등의 일례이다. 이를 기화로 漢 武帝는 기원전 128년 蒼海郡을 설치하여 위만조선의 팽창을 제지하려 하였으나 2년 뒤의 창해군의 폐지는258)≪史記≫권 112, 列傳 52, 平津侯主父 元朔 三年(기원전 126). 한의 이같은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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