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2. 고조선의 변천
  • 2) 위만조선의 성립과 변천
  • (2)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2)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위만은 처음에 準王 치하의 조선의 西界에서 藩屛으로서 기능하였으나 점차 토착민과 유이민 및 亡民을 수습하여 인구가 급증하였다. 즉 제한된 영역에서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국가의 기원과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국가의 기원과 형성에 관한 ‘征服理論’은 국가의 기원을 해명하는 유일한 이론은 아니지만 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정복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카네이로(R. L. Carneiro)에 의하면 농경민의 옥토가 주변의 자연환경, 즉 산이나 바다·사막 등으로부터 침식되거나 제한을 받게 되면 결과적으로 인구의 압박을 가져오게 되고, 그와 같은 인구의 압박은 결국 전쟁을 유발하게 된다고 하는데259)Carneiro, R. L., “A Theory of the Origin of the State”, Science, Vol. 169, No. 3947, 1970, pp.733∼738. 위만의 국가형성을 이해함에 있어 이 점 시사하는 바 크다. 즉 위만은 제한된 영역에서 증가하는 인구의 압력을 받아 돌파구를 찾아야 했으며, 당시 중국과의 관계 및 위만의 위치를 감안할 때 준왕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된다. 이같은 상황이 위만조선을 정복국가적 성격을 갖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국가의 기원문제와 관련하여 위만조선이 성립된 이후의 관직명과 관위체계 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만조선사회의 상층 지배집단으로는 王·太子·裨王260)한편 王과 함께 정치 외교에 관여한 것으로 짐작되는 裨王이 있는데 비왕은 후속하는 정치체의 최상위 통치체계 구성에 있어 二元性을 보여주는 고구려의 古雛加나 신라의 葛文王과 같은 존재의 原形이 아닐까 생각된다.·相·大臣·卿·將軍 등의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261)≪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위만은 앞서의 준왕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의 왕격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준왕은 중국사회에 ‘朝鮮侯’로 인식되던 상황에서 王을 ‘自稱’한 것임에 비해, 위만의 경우 이미 왕으로서 손색없는 수준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262)위와 같음. 특히 위만은 주변지역 사방 수천 리를 장악하여 眞番·臨屯·沃沮지역이 모두 위만조선의 통치영역에 포섭되어 있었다.26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따라서 위만조선 당시의 왕은 명실상부한 왕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특히 ‘太子’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독점적이고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왕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왕권이 단순한 제후왕보다 훨씬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64)≪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왕·비왕과 함께 최상위 신분층과 관련된 명칭으로 ‘相’이 있다.265)중국 周代에 처음 나타나는 相은 君主의 사사로운 지시에 따라 祭祀 또는 儀禮를 담당 수행하는 군주 개인의 고용인이었다. 그런데 이 상은 춘추시대 齊 桓公의 정치개혁을 주도한 管仲에 의해 전체 관직을 총괄하는 수상의 기능으로 변모하였다. 한편 전국시대에는 魏 文侯가 이를 설치한 이후 군주를 보좌하여 정부의 백관을 통솔하고 국무를 총괄하였으며 군주와는 비혈연관계로 군주를 보좌하는 보필자였다. 특히 춘추시대의 상은 ‘入則相 出則將’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文武를 겸하였으나 전국시대에는 기능이 분화되어 상과 장군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秦代에는 이를 계승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丞相으로 발전하였다(李春植,≪中國古代史의 展開≫, 신서원, 1988). 위만조선의 상은 ‘朝鮮相’과 ‘尼谿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위만조선이 포괄하고 있는 지역의 책임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존재로 짐작된다. 이들은 君主와는 기본적으로 혈연관계는 없지만 지역분담을 통해 군주의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이들은 중앙의 왕실과는 별도로 지방에 토대를 두고 성장한 세력가들로서 독자적인 행동역량도 갖고 있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위만조선의 군사조직은 치안을 유지하고 정복활동을 수행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장군이라는 명칭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장군은 전국시대 이후 文武職이 분화되면서 이전에 ‘相’이 겸하였던 무관직이 분리되어 전문무관이 나타나게 되자 이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따라서 위만조선에 상과는 구별되는 장군이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고조선사회가 상당한 직능분화가 진행된 정치체임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浿水上軍’·‘浿水西軍’ 등이라 일컫는 단위부대가 있었다는 것은 고도로 편제된 군사조직체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漢과의 화의가 논의될 때 중국측에 군량과 馬 5,000필 및 10,000여 명의 병사를 제공하려고 했던 사실은 당시 위만조선의 군사력이 어떠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이는 위만조선사회가 한이라는 대제국의 군사력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막강하였음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자료에서 확인된 고조선사회의 상층 지배체계는 중앙의 경우 왕을 정점으로 하여 태자 등을 포함한 왕실이 있고, 副王的 존재인 裨王이 존재하였으며 大臣으로 지칭되는 상·장군 등이 중앙통치의 주요 직능을 분담하였다. 또한 지방의 경우 상·卿 등의 존재가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왕의 통치에 포섭되어 있었으며 박사 등의 명칭을 갖는 존재들이 중앙의 통치력을 대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상층 지배층과 관련된 자료에서 보듯이 위만조선은 정복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후의 발전과 한과의 대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조직 및 역량으로 보아 고도로 발전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들 상층 지배층과는 달리 지배구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던 하위 지배계층에 속하는 존재를 볼 수 있다. 즉 準王의 피난시에 同行했던 ‘宮人’과 같은 존재는 통치계급의 일부로서 그 지위가 일반 피지배층 신분과는 구별되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비록 더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지배계층의 하위를 구성하는 궁인과 같은 중간신분 집단의 존재를 통하여 위만조선의 국가조직이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6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所引≪魏略≫.
≪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準王이 피난할 때 ‘左右宮人’을 이끌고 갖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左相과 右相 및 宮人’으로 보아야 할지 또는 단순히 ‘左右의 宮人’으로 해석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 경우에도 ‘궁인’이라는 존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들 궁인이 어떠한 신분에 속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일반 민 신분과는 일단 구별되는 존재로 생각된다. 위만이 준왕에게 허위로 漢兵이 공격한다고 보고하게 한 존재와, 朝鮮相 등이 樓船將軍과 휴전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보냈던 존재 등이 궁인과 같은 부류가 아닐까 생각된다.

 고조선사회에서 피지배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民이었다. 다음의 자료는 이들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樂浪朝鮮에는 犯禁 8條가 있다. 서로 죽이면 그 때에 곧 죽인다. 서로 상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한다.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그 집의 家奴로 삼고 여자는 婢로 삼는다. 奴婢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50萬錢을 내야 하는데 비록 면하여 民신분이 되어도 사람들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장가들고자 하여도 결혼할 사람이 없다. 이런 까닭에 그 백성들이 끝내 서로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는 사람이 없었다. 婦人들은 단정하여 음란한 일이 없었다. …商人들이 왕래하면서 밤에는 도둑질을 한 까닭에 민심이 점차 각박해졌다. 지금은 犯禁이 점차 많아져 60여 조항에 이르렀다(≪漢書≫권 28 下, 志 8 下, 地理).

 위의 사료는 피지배의 대상으로서 ‘민’이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범법자의 경우 최하위 신분인 ‘奴婢’로 전락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민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신분이었는데 노비의 처지와 대비해보면 그 위상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이들 민은 蒼海郡으로 편성되었던 濊君 南閭의 28萬口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였을 것이며, 고조선과 한과의 전투시에 등장하고 있는 태자를 호위한 人衆 萬餘人, 그리고 浿水上軍과 浿水西軍 등 중심 전투력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들 민은 고조선이 漢에게 패한 후 설치된 한사군의 규모로 보아 대개 20∼30만 명을 한 단위로 하여 편성되어 있었던267)≪漢書≫권 28 下, 志 8 下, 地理. 것으로 짐작된다. 20∼30만이라는 단위는 국가에 상당하는 규모이므로 이들 집단이 기왕에 독립적인 정치체였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분화·발전된 조직체계가 이 당시 형성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민 신분 이하의 존재로 ‘노비’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노비의 존재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재구성하는 관점에서는 노예제사회의 존재를 상정하게 하는 요소로서 이에 관해서는 기왕의 연구자들이 많은 논란을 벌여 왔다.268)趙法鍾,<韓國古代奴婢의 發生 및 存在樣態에 대한 考察>(≪百濟文化≫22, 1992). 노비는 사회의 최하층 신분으로서 국가체 구성과 관련된 피정복민 및 범법자에 대한 처벌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유력한 존재였다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한편 위만조선이 한반도 북쪽의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잡음으로서 그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흑자를 보았으며 이를 토대로 국가를 성립시키고 성장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위만조선이 중계무역을 통하여 국가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한 경우인데269)崔夢龍, 앞의 글. 위만조선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참고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고조선사회는 이른바 기자조선 후기 단계에는 초기국가적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위만조선의 성립과 더불어 정복국가적 성격이 나타났고, 중국과 대립·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강력한 국가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 3∼2세기에 요하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에는 細竹里-蓮花堡文化로 불리는 독특한 유형의 철기문화가 전개되는데 그 성격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이 지역의 철기문화를 고조선과 연의 무역 등 양국의 교섭에 의해 나타난 고조선문화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270)崔夢龍,<古代國家成長과 貿易>(歷史學會 編,≪韓國 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연·진세력의 동진에 의한 중국문화의 확산으로 이해271)윤무병,<청동기>(≪한국사≫1, 국사편찬위원회, 1980), 326∼330쪽.
盧泰敦, 앞의 글, 28쪽.
李鍾旭,≪古朝鮮史硏究≫(一潮閣, 1993), 180∼181쪽.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明刀錢을 중심으로 한 이들 유물들이 내륙이나 산간 등지에서 退藏유물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여 연·제·조의 유이민의 문화일 것으로 보는 견해272)서영수, 앞의 글, 254∼255쪽.
명도전은 대부분 해안가나 내륙 산지에서 단지 등에 담겨져 돌각담이나 돌칸무덤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으며, 명도전과 함께 나타나는 승석문토기도 중국과는 다른 독자성을 보인다. 또 연화보-세죽리유형의 문화가 1세기간의 짧은 기간 존속하였다는 사실은 이 문화가 고조선의 유민과 중국계 망명인의 과도기적 복합문화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도 있다. 또한 고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물인 세형동검문화는 요동지방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서북부지역에 이르러 완성형을 이루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범위가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와는273)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는 기원전 3∼2세기로 편년되는 평북 영변 세죽리와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유적으로 대표되는 유형의 문화를 일컫는 것으로 명도전과 철기유물의 출토를 특징으로 한다. 구별되고 있다. 즉 요동에서 청천강으로 연결되는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와 세형동검문화는 일부 중첩되기는 하지만 기원전 4세기 이후의 세형동검유적이 요동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청천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지역에서는 명도전이 출토되고 있고, 발전된 형식의 세형동검이 평양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이같은 사실은 세죽리-연화보유형문화와 세형동검문화가 구별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학계에서는 기원전 3∼2세기의 고조선을 요하유역 이동과 청천강 이북지역의 서북조선, 청천강 이남의 동부조선으로 나누어, 전자를 고조선왕의 직할지라 보고 후자를 독자성을 가진 소국의 영역이었다고 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274)박진욱,≪조선고고학전서≫(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68쪽.
이같은 견해는 1960년대에 고조선의 중심지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김석형이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국내학계에서는 이 문화를 연의 세력이 확산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의견이 일반적이지만, 당시 중국과의 활발한 교섭을 염두에 둘 때 향후의 발굴성과를 통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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