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Ⅱ. 고조선
  • 2. 고조선의 변천
  • 4) 한사군의 설치와 그 변천
  • (2) 한사군의 성격과 변천

(2) 한사군의 성격과 변천

 한사군의 설치는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직접적 통제를 위한 것이 라기보다는 위만조선 사회내부의 지배세력 재편과 연결되어 나타난 정치변화로서 親中國勢力이 중심이 된 정권재편의 일환이었다.

 한사군의 변화는 屬縣의 규모와 소속의 변동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즉≪한서≫지리지에는 낙랑군에 25개의 현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같은 속현의 수는 한의 昭帝 始元 5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을 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편입시킨 이후의 것이다. 더욱이 소제 元鳳 6년에는 현도군이 관할 토착민들의 반발에 의해 그 치소를 옮기고 있다.

한 무제 元封 2년 조선을 벌하여 滿의 손자인 右渠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만들었는데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후에 이맥들의 침입을 받아 군을 句麗의 서북으로 옮겼으니 지금 이른바 현도고부가 그 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였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즉 기원전 108년 설치되었던 한사군 중 기원전 82년에 임둔군과 진번군이 폐지되어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쳐졌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이 고구려의 서북지역으로 쫓겨갔으며 옥저의 경우 낙랑에 속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후한 건무 6년(기원후 30)에는 옥저지역의 東部都尉가 폐지되었으며≪後漢書≫지리지에 나타나는 낙랑군의 18성이라는 기록은 계속적인 축소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한군현이 토착사회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실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축출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한군현 관련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후한 말 요동지역에서 자체 역량을 강화하던 공손씨가 韓濊 등에 대한 세력강화를 목적으로 후한 헌제의 建安연간(196∼220)에 낙랑의 屯有縣 이남지역에 帶方郡을 설치함으로서 기록에 다시 나타난다.≪晋書≫地理志에는 낙랑군에 6개 현이, 대방군에 7개의 현이 배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이들의 영역이 계속 축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구려의 성장과 공격으로 313∼314년 사이에 각각 소멸되었다.

 한군현은 물론 후대 사료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중국의 통제와 관리의 파견 등에 의해 직접적 통제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그러나 낙랑을 제외한 3군이 설치된 후 20여 년만에 폐지되거나 축출되었다는 사실은 이들 군현이 기왕의 고조선 전체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여 직접 통제를 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이들 가운데 낙랑군만이 위만조선의 일부지역에 한정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또한 그 존속기간이 길었던 낙랑군에 대해서도 종래에는 초기의 낙랑군의 성격이 소멸될 때까지 시종일관 유지된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낙랑군은 중국의 직접통치를 받는 군현적 성격을 띄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성격은 전한시대에 한정되며, 이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중국계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적 성격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 즉 종래 이들 군현의 성격에 대해 일인학자들은 중국의 직접지배에 의한 통제를 상정하여 한군현의 성격을 중국의 식민지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군현의 성격을 이같이 볼 수는 없으며 이들은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유이민집단의 자치도시이거나 무역을 위한 조계지와 같은 성격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유력하다.288)金元龍,<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一考察-三國史記와 樂浪郡에 대한 再檢討->(≪東亞文化≫7, 1967 ;≪韓國考古學硏究≫, 一志社, 1987, 525∼533쪽).

 한편 고구려의 大武神王대에 멸망한 樂浪國의 존재를 통해서도 한사군의 성격의 일단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대무신왕 20년(37)에 崔理의 낙랑국을 멸망시켰는데289)≪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나타나 있는 낙랑의 복속과정에 보이는 樂浪王 崔理는 독립적 정치세력의 왕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낙랑이 중국 군현으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 정치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리의 낙랑국은 기왕에 있었던 낙랑군이 종래에 이해되어온 것처럼 중국의 직접적 통제방식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초기의 군현 설치시기에 구상되었던 통제방식이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결국 土着社會의 자립적 성장이 이를 대치하였고, 이들이 고구려의 세력확장에 밀리게 되면서 결국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기왕에 확보되었던 중국의 교두보 상실이었으며, 비록 직접적 통제지역은 아니었지만 계속 성장하는 고구려에 대한 견제세력의 상실과 함께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성장하는 백제 및 신라 등에 대한 통제기반의 몰락이었다. 그러자 後漢의 光武帝는 이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곧 군현을 부활시켰다(44).

가을 9월 後漢의 光武帝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와서 樂浪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하여 郡縣을 삼으니 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27년).

 이같은 후한의 대처는 이후 고구려의 요서진출 등 적극적 대응에 의해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후한은 그 대신에 한반도 중남부지역의 백제 등의 韓사회에 대한 통제로 정책을 선회하여 한사회의 君長들에게 爵號와 의복과 印綬 등을 지급하였다. 이와 관련된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가 廉斯鑡설화이다. 즉 王莽의 地皇年間(20∼23)에 辰韓 右渠帥인 염사치가 낙랑의 땅이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낙랑지역으로 투항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염사치가 그 과정에서 만난 진한의 포로노예로 있던 중국인 好來 등 1,500명의 존재와, 建武 20년(44) 韓廉斯人 蘇馬諟가 낙랑군을 찾아 韓廉斯邑君으로 봉해진 사실 등은290)≪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韓. 후한과 이들간에 상당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중국 군현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력의 성장에 의한 갈등증대로 인하여 주된 관심의 대상을 韓濊세력으로 바꾸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桓帝·靈帝 말기에 한예가 강성하여 漢의 군현이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는 점과, 公孫氏에 의한 帶方郡의 설치 및 景初年間(237∼239)에 대방태수와 낙랑태수를 파견하여 두 군을 평정한 사건 등은 이같은 사실을 잘 나타내준다. 특히 辰韓의 臣智가 部從事 吳林과의 대립으로 대방군 崎離營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弓遵이 전사한 사실은 이같은 갈등의 대표적 사례이다.

 요컨대 한군현은 초기 고조선지역 및 고구려 등의 세력에 대한 통제와 견제를 목적으로 설치되어 직접적인 지배를 기도하였으나, 이같은 초기의 목적은 점차 토착사회의 반발과 공격에 의해 대부분이 축출·쇠퇴되고 그 성격마저도 토착사회와 병존하면서 중국계 유이민의 자치세력 또는 中繼貿易의 중심지 등과 같은 형태로 유지되었다. 특히 후한대에는 고구려 등의 성장에 의해 더 이상 기왕의 고조선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韓·濊·倭 등의 세력과 朝貢貿易 등의 중계지로서 기능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축소·해체되었다. 그러므로 낙랑 등의 존재는 정치적 의미에서 평가되기보다는 文化中繼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金貞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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