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1. 부여의 성립
  • 1) 부여사의 성격

1) 부여사의 성격

 夫餘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하였던 濊貊族系의 국가였다. 흔히 부여족이라 일컬어지는 예맥족의 한 종족은 일찍부터 송화강유역을 중심으로 西團山文化라는 선진적인 문화를 영위하면서 松嫩平原 및 松遼平原을 개척하였고,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하였다.

 ≪三國志≫東夷傳 부여조에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의 나라에 패해본 일이 없었다”라는 기사처럼, 부여는 그 경제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강한 통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는 王이 존재하여 귀족과 관리들을 거느리고 통치하였으며, 종족적 기반을 토대로 한 大加들은 왕이 살던 곳의 사방에 거주하여 연맹체적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부여족은 긴 존속기간 동안 대체로 중국의 왕조들과는 빈번한 교류를 하면서 우호관계를 지속하였고, 반면에 북방 유목민족이나 고구려와는 대립하면서 국가적 성장을 하였다. 또한 주변의 東沃沮나 挹婁 등을 臣屬시킴으로써 동북지방 역사발전의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업에서도 기후와 토질에 알맞는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을 겸하였고, 말·玉·담비(貂)·구슬(美珠) 등의 특산물을 漢民族에 수출하고 錦繡 등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진전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다. 특히 주변에는 한의 현도군을 비롯하여 고구려·읍루·鮮卑 등이 있어서 이들 주변 정치세력의 消長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漢代 이후 부여는 북방의 유목민과 남방의 성장하는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도 중국과 부단한 관계를 가지면서 국가로서 성장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부여는 계속해서 서쪽에서 성장했던 鮮卑 慕容氏의 세력과 남방의 고구려의 압력을 받았다. 따라서 加耶와 마찬가지로 국가발달이 순조롭지 못하여 연맹체적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전환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부여 왕조의 구체적인 변천상은 잘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오래 지속된 만큼 주변세력의 영향을 받아 내부적으로 다양한 변화와 발전이 있었으며, 중심지에도 일련의 변동이 있었다. 이는 부여에 대한 표기가 시기와 사료에 따라 北夫餘, 부여, 東夫餘 등으로 나타나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대체로 부여는 지금의 만주 松花江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는데, 거기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그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朱蒙집단(桂婁部 왕실)이 나왔다. 주몽집단은 압록강 일대에 진출하여 卒本夫餘 즉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들도 부여족이었으므로 백제는 그 왕실의 성씨를 扶餘氏라고 했고, 부여의 건국 시조인 東明王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東明廟를 설치하였다. 또한 백제는 6세기 중반 자신들이 세운 국가의 이름을 南扶餘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는 고구려·백제 등의 예맥족계 국가들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別種’353)高句麗가 夫餘의 별종임은≪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條에 기록되어 있고, 百濟가 夫餘의 별종임은≪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始祖 溫祚王條와 권 25, 百濟本紀 3, 蓋鹵王 18년조에 蓋鹵王이 北魏에 보낸 국서에 보인다.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최근 가야지역에서 나오는 북방 유목민족이나 부여계의 유물들을 보건대, 부여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나 주민이동 등이 한반도 남부에까지 미친 영향도 결코 가벼이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나아가 騎馬民族 일본정복론에서는 일본황실의 시조 神武의 東征전설이 부여의 건국설화를 그대로 옮긴 주몽전설과 동일내용이라고 역설하리만치354)江上波夫,≪騎馬民族國家≫(中央公論社, 1967), 173∼187쪽. 부여의 개국설화는 고대 동방 제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고구려를 승계한 渤海 역시 大祚榮이 “부여·옥저·변한·조선의 땅과 바다 북쪽 여러 나라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하여355)≪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渤海.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고 있다. 한편≪武經總要≫에서는 발해가 “부여의 별종으로서 본래 예맥의 땅이었다”고 하여,356)≪武經總要≫前集 16 下.
다만 이 책이 얼마나 사료적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宋基豪,≪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 1995, 37쪽).
발해가 고구려와 백제처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로써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부여 지배층의 분화와 발전 속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세력집단에 의해 고구려와 백제, 나아가 발해가 건국되었다는 점에서, 부여사는 우리 나라 고대국가의 발전에 중요한 淵源을 이루고 있고, 부여족은 한국민족을 형성한 주요 종족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부여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그간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최근에야 고고학적 자료의 증가에 따라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그 또한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대부분이다. 현재 모든 중국학자들은 부여사를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볼 뿐이지 결코 한국사의 일부로서 부여를 지칭하지는 않는다.357)부여사를 중국 동북사의 일부로 보는 대표적 저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傅郞雲·楊暘,≪東北民族史略≫(吉林人民出版社, 1983).
孫進己·馮永謙,≪東北歷史地理≫1(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佟冬 編,≪中國東北史≫(吉林文史出版社, 1987).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올바른 복원을 위해서는 부여사 연구 또한 가장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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