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1. 부여의 성립
  • 3) 부여의 영역과 지리적 특성
  • (2) 부여국 왕성의 위치

가. 부여국 전기의 왕성

 부여국의 중심지역, 즉 왕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부여 왕성의 위치는≪資治通鑑≫의 기록에 따르면 후기에 서쪽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전·후기로 나누어 고찰해야 한다.

 부여 전기의 중심지에 관해서는 西豊縣 西岔溝유적→老河深유적설438)孫進己·馮永謙, 앞의 책, 256∼259쪽.이 주장되기도 하고, 한서 상층(Ⅱ기)→望海屯문화→노하심설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학계의 경우에는 ‘예성’이 있는 곳에 부여의 수도가 있었는데, 그곳은 오늘날의 ‘부여’ 일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439)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앞의 글. 부여 전기의 왕성을 지금의 농안에, 후기 왕성은 요령성 昌圖縣 북쪽 40리의 四面城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440)金毓黻,≪東北通史≫上編, 권 3(國立東北大學, 1977), 30∼31쪽. 이와 달리 부여 본래의 위치를 농안의 동북방, 즉 송화강 북쪽의 雙城에서부터 그 북쪽에 있는 阿勒楚喀(일명 阿什河)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441)阿勒楚喀 일대는 金朝의 발상지로 평야도 넓고 토양도 비옥하여≪魏書≫동이전에서 말하는 지세에 농안보다도 더 적합하고 녹산은 아륵초객 부근의 한 산을 일컫는 것이라고 한다. 후기의 왕성은 농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池內宏, 앞의 글, 452∼454쪽). 그러나 이곳에서는 漢·魏시기의 古城과 유물이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도군에서 북으로 천 리(지금의 700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과도 맞지 않으며, 346년 부여가 서쪽 燕 가까이로 이동하였다고 했으므로 阿什河 일대는 그 위치가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후한서≫와≪삼국지≫의 기록에 의거하여 부여는 초기부터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松嫩평원에 중심을 두었다고 보고 있다.442)李殿福, 앞의 글.
武國勳, 앞의 글.
盧泰敦, 앞의 글(1989).
그 이유는 대개 길림시 일대의 서단산문화를 부여 선주민의 문화로 보고, 이후 길림 일대의 한·부여시기의 여러 유적과 유물, 특히 동단산 南城子古城을 부여의 중심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한 蛟河市의 新街古城址443)山本首,≪蛟河敦化的古迹調査報告書≫(1938 鉛印本).
張忠培,<吉林市郊古代遺址的文化類型>(≪吉林大學社會科學學報≫1期, 1963).
와 福來東고성지444)董學增,<吉林蛟河縣新街·福來東古城考>(≪博物館硏究≫2期, 1989). 등 길림시 교외에서 부여시기의 읍락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나와, 남성자유적을 왕성으로 주변의 고성지 유적은 하나의 읍락지역으로 볼 수 있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먼저 부여의 중심지역으로 현도군 북쪽으로 천 리 떨어진 곳을 찾는다면 마땅히 지금의 길림성 중부 송화강 중류 일대가 된다. 특히 용담산과 동단산 일대에서는 많은 漢代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445)李健才, 앞의 글(1982), 170∼173쪽.
부여가 漢·魏와 관계가 밀접하여 使者의 왕래도 빈번하였기 때문에 한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부여 전기의 왕성은 한·위시기의 문화유물이 다수 출토하는 용담산성과 동단산 일대라고 추정하고 있다.
동단산유지에서는 한대 五銖錢을 비롯하여 청동거울 및 漢式 ‘長樂未央’ 와당이 나왔다. 길림 동단산에서 용담산에 이르는 철길 양측에서는 한대 무덤이 발견되었고, 陶爐·耳環 등 漢나라 시기의 무덤에서 항상 보이는 明器가 출토되었다.446)李文信,<吉林市附近之史的遺物>(≪歷史與考古≫1, 沈陽博物館專刊, 1946). 특히 길림시 동단산에서는 남성자고성이 발견되었는데, 이 고성지는 동단산 남록의 높은 대지상에 위치하였고, 황토흙을 판축하여 주위를 두른 고성지로서 성 내부의 평면은 둥근 타원형을 띠고 있었다.447)城은 남북에 두 개의 門이 있고, 담장은 주위 1,050m, 남문 부근에는 하나의 장방형 高地가 있으며, 남북 길이 150m, 동서 너비 73m이다(董學增, 앞의 글). 성 내부에서는 대량의 토기편과 벽돌·기와 및 銅鈴·陶俑 등 한대 부여의 유물들이 출토되었고,448)馬德謙,<談談吉林龍潭山東團山一帶的漢代遺物>(≪北方文物≫2期, 1991). 고구려 및 발해시기의 유물이 산포하고 있었다.449)董學增,<吉林東團山原始·漢·高句麗·渤海諸文化遺存調査簡報>(≪博物館硏究≫創刊號, 1972). 이 고성에서 나온 유물로 보아 남성자고성은 한과 부여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였으며 하한은 고구려와 발해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성자고성지를 전기 부여국의 왕성으로 보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따르면 “부여는 현도군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곳에 왕성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곳은 바로 길림성 중부, 특히 길림시 일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둘째, 남성자고성은 평면이 대략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성책을 만드는데 모두 둥글게 하였으며 감옥과 비슷하다”고 한≪삼국지≫동이전 부여조의 기록과 들어맞는다는 것이다.450)李健才, 앞의 글(1982), 170∼173쪽. 셋째, 남성자의 지리적 환경과 문헌의 기재가 부합한다는 점이다. 부여는 “처음에 鹿山에 있었고”, “산·구릉과 넓은 못이 많으며”, “남녀가 음란하고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이는데… 시체를 國 南山에 버린다”고≪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古음운학연구에 따르면 녹산은 오늘날의 동단산과 부근의 龍潭山을 가리킨다고 한다.451)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古代文物遺蹟>(≪吉林省志≫권 43, 文物志, 吉林文史出版社, 1994), 102쪽. 이 일대는 산이 중첩되어 있고, 강에 면한 개활지로서 넓은 못이 많다는 기록과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또 ‘國의 남산’이라는 것은 왕도(수도)의 남산을 지칭하는 것으로,452)盧泰敦, 앞의 글(1989). 남성자의 동남쪽 1㎞ 떨어진 곳에 帽兒山이 있는데, 모아산 일대에서는 ‘有槨無棺’의 한대 봉토 토광목곽묘군453)吉林市博物館,<吉林帽兒山漢代木槨墓>(≪遼海文物學刊≫2期, 1988).이 발견되었다. 이곳이 바로 왕성의 남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현재 발굴중이지만 모아산 일대에는 약 천여 기 이상의 토광목곽묘가 존재한다고 한다.454)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앞의 글(앞의 책), 102쪽. 넷째, 남성자 안에서 서단산문화의 석기·토기 외에 대량의 한식이 아닌 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455)董學增, 앞의 글(1972). 이는 예맥족계의 한 지파가 예족이 살던 ‘濊城’에 와서 서로 융합하여 부여를 건국하였던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456)武國勳,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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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남성자 평면도 및 채집유물 ①
<그림 5>남성자 평면도 및 채집유물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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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남성자 평면도 및 채집유물 ②
<그림 5>남성자 평면도 및 채집유물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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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는 남성자의 규모가 주위가 1㎞ 정도로 비교적 작기 때문에, 이를 부여 왕성(지금의 용담산 기차역 부근)의 衛城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457)李健才, 앞의 글(1982). 대개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최근 대다수의 학자들은 남성자는 宮城이었고 용담산역 일대는 ‘都城’에 해당되며, 두 성이 합쳐져서 부여 전기의 왕성을 이루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 의하는 한 立國 초기 및 3세기 전성시기까지의 부여 왕성은 서단산문화 이래 부여의 문화 및 중국 한대의 문화요소들이 많이 보이는 길림시 용담산·동단산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된다.458)李健才, 위의 글.
武國勳, 앞의 글.
王綿厚, 앞의 글,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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