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1) 부여의 성장
  • (1) 부여의 기원(부여·북부여·동부여)

(1) 부여의 기원(부여·북부여·동부여)

 기원전 2세기 말을 전후하여 槀離國에서 발생한 내분으로 東明으로 표기되는 집단이 남쪽 濊族의 先住지역에 와서 부여국을 건립하였다. 부여국은 건국 후에 매우 신속한 발전을 하여 오래지 않아 분화가 발생하였으며, 기원전 1세기경 많은 부여인들이 제2송화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동남쪽을 향해 遷去하였다. 이러한 면은 부여의 건국설화인 동명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동명신화는 夫餘族系의 제집단이 공유하였던 건국신화로서 고구려의 朱蒙神話에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고구려 주몽신화에서는 고구려의 기원으로서 ‘부여’ 대신 ‘북부여’나 ‘동부여’라는 표현을 하고 있어 주목된다.

 5세기 당시 고구려인의 기록인<廣開土王陵碑>에 의하면 기록상의 첫 부여국은 北夫餘國으로 되어 있다.475)<광개토왕릉비>는 여러 자료들 가운데 그 시기가 가장 이르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썼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기원문제에 관한 가장 신빙할 만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건국전설 중 적어도 고구려의 기원에 대해서만은 고구려 왕실에서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능비의 서술은 믿을 수 있다고 본다. 고구려 왕실의 북부여출자설은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고구려의 성립과정에 대한 조정의 공식적인 건국전승이 정립될 때 그 일환으로 확립된 것이다.476)하느님(天帝)과 水神(=河伯)을 대신하는 人格神의 모습을 띤 해모수와 유화가 등장하는≪三國史記≫所收의 고구려 건국설화는<廣開土王陵碑>·<牟頭婁墓誌銘>·≪魏略≫에 실려 있는 설화보다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삼국사기≫의 설화가 전면에 등장할 때에 주몽의 출생지가 동부여라는 전승과 동부여왕 해부루와 금와왕에 관한 전승도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박시형,≪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출판사, 1966, 93∼114쪽 및 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3). 이 때에 고구려의 초기 왕계도 정립되었는데 계루집단은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몽전승에서 볼 수 있듯이 부여 방면에서 來住한 것으로 정리되었다.477)盧泰敦, 위의 글, 67쪽.

 <광개토왕릉비>에는 “옛적 시조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의 따님이었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부여의 奄利大水를… 건너가서 沸流谷 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478)<廣開土王陵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3∼35쪽.고 전하고 있다. 이 주몽신화는 사서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과 표현에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줄거리는 동명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論衡≫이나≪魏略≫에서는 부여의 건국사실을 전하면서 북이 槀離國(또는 橐離國)을 들고 있지 북부여라는 국명은 쓰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종래에는 중국측 자료와 국내 자료에 나타나는 북부여를 별개의 새로운 국가가 아니라 부여와 같은 나라로 보아 왔다. 원래 부여국의 수도는 鹿山, 지금의 吉林市지역에 있었으나 그 지역이 고구려 수도에서 볼 때 북쪽에 있었으므로 북부여라고 했고, 4세기 이후 부여의 일부 세력이 두만강유역에서 자립하니 고구려측에서 이를 동부여라 하고 原부여는 계속 북부여라고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79)盧泰敦,<扶餘國의 境域과 그 變遷>(≪國史館論叢≫4, 國史編纂委員會, 1989). 한마디로 말한다면 주몽의 “出自北夫餘”의 ‘북부여’는 ‘北部夫餘’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5세기 고구려인의 天下觀480)盧泰敦,<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大, 1988).에 입각해 볼 때나<광개토왕릉비>에 북부여가 부여와 함께 표기되어 있는 점 및<牟頭婁墓誌銘>에 나오는 모두루의 ‘北夫餘守事’라는 관직이 부여지역에 해당할 것481)武田幸男,<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朝鮮學報≫99·100, 1971).이라는 점 등에 근거할 때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라 생각된다.

 그러나<광개토왕릉비>에는 “북부여 천제의 아들인 추모가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수 홀본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고 하여 북부여와 부여를 서로 다른 나라로 구별하고 있다. 북부여와 부여를 같은 나라의 다른 표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북부여에서 한 집단이 갈라져 나와 강을 건너 세운 나라가 부여로 되어 있으므로 북부여와 부여는 구별되는 국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이 기본적으로≪논형≫과≪위략≫의 동명설화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 때, 비문에 북부여로 기록된 내용은≪위략≫의 동명설화에 등장하는 북이 고리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북부여와 부여는 서로 다른 국가였기 때문에 구분하여 표기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이같은 사실은 앞에서 보았듯이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눈강·제1송화강을 중심으로 번성한 백금보-한서문화는 길림 일대의 서단산문화와 지역적·문화적 특성에서 차이를 보이다가, 부여의 전성시기에는 한서 상층-망해둔문화로 발전하고 전체적으로는 한대 부여문화에 포괄되고 있다. 이 문화는 치치하얼市·杜爾伯特 몽고족자치현·肇源縣·巴彦縣 및 湯原縣 등지에 퍼져 있으며, 주요 분포지는 제1송화강 북안과 눈강 하류 일대이다. 부여가 가장 강력했을 때 그 북쪽 강역이 대개 제1송화강 이남에 이르렀다고 한다면482)이 책의 1. 부여의 성립 3) 부여의 영역과 지리적 특성 (1) 3세기 부여의 영역 참조. 망해둔문화가 북부여의 문화로 이해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483)孫正甲,<夫餘源流辨析>(≪學習與探索≫6期, 1984), 139∼140쪽. 결국 기원 1세기 王充이 쓴≪논형≫에 부여의 시조 동명이 북이 橐離國에서 왔다는 기사와,<광개토왕릉비>에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북부여에서 왔다는 전설은 표현형태는 얼마간 다르지만 같은 기원을 가진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이의 탁리국은 부여의 북쪽에 있던 나라, 즉 북부여로 해석될 수 있다.

 ≪魏書≫豆莫婁전에는 “두막루국은 勿吉의 북쪽 천 리에 있으며, 洛邑에서 8천 리를 가면 옛날 북부여이다”라는 기사가 있다.484)≪魏書≫권 100, 列傳 88, 豆莫婁. 그리고≪新唐書≫流鬼傳에는 “두막루국은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하는데,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망시킴에 나머지 사람이 那河를 건너 그 곳에 살았다485)≪新唐書≫권 220, 列傳 220, 流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은 부여가 망한 후 부여인들이 송화강(눈강)을 건너 자기들의 故國으로 돌아가 나라를 세운 것을 전하는 것이다. 이 때 부여인들의 고국이라고 하는 나하486)여기서 那河는 바로 북위시대의 難河로서 눈강과 제1송화강을 가리킨다(李健才,<夫餘的疆域和王城>,≪社會科學戰線≫4期, 1982). 이북지역은 바로 북부여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중심지역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근방인 松嫩平原에 비정할 수 있다. 한편≪三國史記≫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조에 “그 옛도읍에는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사람이 天帝의 아들 解慕漱라고 자칭하면서 와서 도읍하였다”487)≪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始祖 東明聖王.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옛도읍’은 부여의 이주설화로 볼 때 解夫婁와 金蛙가 통치하던 부여지역의 북쪽에 있었던 도읍을 가리키는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그 지역에 부여와 또 다른 정치체가 수립되어 있었고, 그 지역이 북부여와 관련된 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믿어진다. 즉 지금의 제1송화강이 크게 꺾이는 부근을 중심으로 그 일대와 북쪽에 고리국 또는 북부여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북부여는 고구려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고구려는 4세기 중엽 이후 송화강유역에 진출하여 왕실의 고향인 북부여를 직접 장악하게 된다. 광개토왕은 모두루를 북부여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모두루 가문이 이곳과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모두루는 ‘北夫餘守事’라는 직책을 띠고 북부여의 중심지인 눈강유역 일대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모두루는 북부여지역을 통제하는 감찰역이면서 북부여와 고구려를 연결시켜주는 지방관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여의 기원이 북부여에 있다는 기록과 달리 국내 사서인≪三國遺事≫와≪삼국사기≫는 부여의 기원을 동부여에 두고 있다.≪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이끄는 일부의 濊人이 동해가 迦葉原지방에 도착하여 동부여를 세웠다고 한다.488)≪三國遺事≫권 1, 紀異 1, 東扶餘. 이후 동부여는 그 왕대가 夫婁-金蛙-帶素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삼국사기≫에는 동부여가 아니라 부여에 관한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동부여에 관한 구체적 기사는≪삼국사기≫에서 잘 찾아볼 수 없다. 다만≪삼국사기≫고구려본기 가운데 동명왕본기489)≪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始祖 東明聖王.와 권 32, 雜志 祭祀조의 동명왕과 관련된 기록490)≪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에 동부여에 관한 기사가 보일 뿐이다. 이것은 동부여국가의 역사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광개토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이 永樂 20년(410)에 동부여를 정벌하였는 바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고 만 하였을 뿐, 주몽이 출생한 나라라고는 하지 않았다. 이 능비 기사에 의하면 동부여는 고구려 건국 초기에 독자적인 국가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건국 초부터 고구려에 예속된 지역이었다.

 종래에는 대개 동부여를 285년 선비 모용씨의 공격으로 부여의 수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 세력이 동으로 두만강유역에 피난을 갔다가 잔여세력이 남아서 건설한 국가로 이해하였다.491)盧泰敦, 앞의 글(1989), 43∼48쪽.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三國志≫毌丘儉傳에 東川王이 魏軍에게 쫓겨 피난하였던 곳으로 되어 있는 買溝婁가 동옥저조에는 置溝婁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은 바로 두만강유역의 柵城이며<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의 味仇婁와 같은 곳이므로 결국 동부여는 3세기경 두만강유역에 있었다고 보았다.492)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201∼206쪽.
盧泰敦, 위의 글, 45∼46쪽.
그러나≪삼국사기≫기사를 따를 경우 두만강유역은 태조왕 이전부터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지≫동옥저조에 두만강유역의 북옥저를 치구루라고 했는데, 이곳은 바로 책성으로서 1세기를 지나면서부터 이미 두만강유역이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 들어갔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한≪삼국지≫관구검전 및 동옥저조에 전하는, 동천왕이 위군에게 쫒겨 피난하였던 매구루는 바로 치구루로서 북옥저 방면이고 숙신의 南界라 하였으므로 이는 바로 두만강유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까닭에 고구려 왕이 망명할 만한 곳으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될 여지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광개토왕릉비>의 미구루는 분명 부여(동부여)에 존재한 하나의 지역집단(지명)으로 책성의 의미인 치구루·매구루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길림성지역은 張廣才嶺·威虎嶺·哈達嶺이 연결되어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어 그 이동의 목단강유역 문화와 단절·구분된다는 점에서, 북부여에서 내려온 주민집단들이 이 경계선을 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현재 동부여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는 두만강유역에서 동부여와 관련되는 城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고 하겠다.

 동부여가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주몽이 정복하기 전에 동부여라는 나라가 존재하였다고 상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동부여라는 나라를 실제로 정복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우며 또 실제로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주몽이 沸流國·荇人國·북옥저 등을 정복했다는 기사는 있으나493)≪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東明聖王 2년·6년·10년. 동부여를 정복했다는 기사는 없다. 그러므로<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분명 동부여의 실재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원래 부여족의 한 지파인 동부여인이 부여 출신의 고구려 시조 추모왕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종족 출자의 同源性에 대한 수사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을 낳게 된 배경에는 특정 시기에 있었던 동부여와 고구려 사이의 어떤 역사적 사실이 투영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494)고구려시조 주몽의 출자전승 중 동부여출자설과 북부여출자설은 후자가 먼저 성립되었다고 한다. 6세기 후반 이후 해부루천도설화와 금와왕설화로 구성된 동부여 건국전승이 북부여출자설에 덧붙여져서 동부여출자설이 성립하였는데, 그것이≪新集≫에 수록되어졌고, 그 계통의 사서가 이어져≪三國史記≫고구려본기의 주몽전승이 되었다고 한다(盧泰敦, 앞의 글, 1993, 44쪽).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추단하기 어려우나 이 귀절 자체는 동부여가 원래부터 마땅히 고구려에 복속되어야 할 존재라는 의미를 담은 당시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을 표현한 면이 있다고 한다.495)盧泰敦, 앞의 글(1988). 어쨌든 주몽의 출자전승과 관련하여 살펴볼 때 능비의 동부여에 대한 표현은 고구려의 시조가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그 북부여의 일부가 갈라져 나가 동부여를 이루었다고 여겨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한다.496)盧泰敦, 앞의 글(1993), 45쪽. 한편<모두루묘지명>에서도 고구려의 기원을 북부여라고 하고 있어 적어도 5세기 초반까지 왕실의 공식적인 견해는 고구려의 기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삼국사기≫나≪위략≫및 그 이후의 사서에 주몽이 동부여 출신으로 나오는 것은 고구려가 망한 후 후세 사람들이 잘못 가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497)리지린·강인숙,≪고구려역사≫(사회과학출판사, 1977), 21∼26쪽. 고구려 왕실에서는<광개토왕릉비>에 적혀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시조인 주몽을 북부여의 왕자로 믿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조에는 동명왕 10년(기원전 32)에 왕의 명령으로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14년에 주몽의 어머니가 동부여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즉 같은 시기에 북옥저와 동부여가 병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삼국사기≫초기 기록을 그대로 신빙하느냐의 문제는 그만두더라도 이는 분명 고구려 초기에 북옥저와 동부여가 병존하고 있었던 것이 되므로, 동부여는 3세기에 부여족이 세운 새로운 정권으로 볼 수 없는 셈이다. 그런데 북옥저는 태조왕 이전 시기에 이미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기원을 전후하여 선비족의 일부 및 太子河 상류 일대의 梁脈, 힘의 공백지대였던 함경남북도 산간지대의 행인국·蓋馬國·句茶國과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 등도 이 무렵에 고구려에 정복되거나 복속되었다.498)≪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東明聖王 6·10년 및 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9년. 나아가 1세기 중엽 무렵에 那部체제가 수립되면서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499)余昊奎,≪1∼4세기 고구려 政治體制 연구≫(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7), 12∼52쪽. 먼저 고구려는 동해안 방면의 옥저500)≪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太祖大王 4년.와 동예501)≪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를 복속시키고 이 지역의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여 확고한 배후기지로 삼았다. 이에 따라 영흥만 일대는 태조왕 이래 고구려의 변방지역으로 편입되었으며,<광개토왕릉비>의 守墓人기사 중 ‘東海賈’가 광개토왕 이전에 정복한 舊民임을 생각한다면502)林起煥,≪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132∼148쪽. 영흥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는 일찍부터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광개토왕의 동부여 원정이 舊土에 인접한 반도의 동해안지역의 원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동부여는 동해안 일대에 실재했던 국가라기보다는 원부여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즉 송눈평원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던 원부여(북부여)의 세력과 달리,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서단산문화를 조영하면서 발전하던 예족의 세력이 송눈평원 일대 예맥족계의 한 지파가 이주해 와 새로이 성장하게 되자 이를 동부여(부여)라고 불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503)이는<광개토왕릉비>의 주변지역 정복 기사 중 부여에 대한 정벌을 동부여로 표기하고 있는 점에서도 방증된다. 이 당시 부여는 아마도 ‘西徙近燕’한 후 선비에 쫒겨 다시 길림 일대의 원부여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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