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1) 부여의 성장
  • (2) 부여의 성장

(2) 부여의 성장

 ≪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따르면 동부여(부여)는 왕위가 金蛙王에게 계승되고 이어서 帶素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금와의 아들 대소는 22년 고구려 의해 살해되었는데 고구려는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는 못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대소의 아우들이 추종자와 함께 鴨淥谷에 이르러 曷思水가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504)≪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5년 4월. 또한 대소가 피살된 후 같은 해 부여 읍락의 대부분은 고구려에 투항하여 掾那部에 안치되어 絡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505)≪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5년 7월. 이후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연나부의 동부여인들은 상대적인 독립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지역적으로 압록강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동부여로 표기되는 집단의 분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고구려가 초기국가 건설과정에서 부여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였고, 또한 부여계의 주민집단이 고구려 국가건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세기 초부터 부여의 명칭이 중국의 역사서에 자주 등장한다. 이는 부여가 흉노나 고구려와 함께 王莽의 新(8∼23)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비칠 만큼 큰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49년에 부여왕은 후한 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고, 광무제는 이에 후하게 보답하였다.506)≪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 늦어도 이 때에는 부여가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인에게 국가적인 존재로 비칠 정도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은 부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부여 서쪽의 선비와 남쪽의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여의 등장을 환영하였다. 한편 부여도 농업에 바탕을 둔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고, 일찍부터 고구려나 서북쪽의 유목민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므로 역시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바라고 있었다. 한편 동일한 발전단계에 있는 고구려 및 선비족과의 빈번한 접촉, 한족과의 교류는 필연적으로 교환관계의 발전을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49년 부여왕이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朝服衣幘을 받았는데, 이 조복의책은 한에 대한 臣屬을 의미하는 동시에 각 족장에게 무역권의 부여를 상징하는 것이다.507)金哲埈,≪韓國古代國家發達史≫(春秋文庫, 1975), 61쪽. 이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부를 생산하는 계급의 성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기 2∼3세기 초까지의 사실을 기록한≪위략≫에 “그 나라는 매우 부유하고 선세 이래로 일찍이 파괴된 적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부여는 그 때까지는 국가적 성장이 지속되면서 國都의 천도나 남에게 큰 타격을 입는 일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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