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2) 부여의 대외관계
  • (1) 고구려와의 관계

(1) 고구려와의 관계

 부여와 주위의 여타 족속과의 관계 중 비교적 밀접한 것이 고구려와의 관계였다. 처음에 그들 사이에는 군사적 연맹이 성립되어 있었으나, 고구려의 역량이 부여를 능가한 이후에는 곧바로 부여를 병탄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여는 한과 함께 공동으로 고구려에 대항하게 되고, 그 결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어 결국 고구려에게 병합되었다.

 부여가 아직 강성하였던 기원전 1세기에 그 남쪽에서는 고구려가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처음 부여로부터 도망와서 계루부를 건국하였다.508)盧泰敦, 앞의 글(1993), 37∼68쪽. 따라서 초기에는 부여와 새로 건국된 같은 예맥계통의 나라인 고구려는 우호적 관계였다. 부여가 고구려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 先王(金蛙王)이 그대의 선왕인 동명왕과 서로 사이가 좋았다”509)≪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琉璃明王 28년 8월.고 한 것은 고구려 건국 초기에 두 나라가 화친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삼국사기≫고구려본기 태조대왕 25년(77)에 “부여가 사신을 보내어 뿔이 세 개 달린 사슴과 긴 꼬리의 토끼를 바쳤다”는 기사와, 같은 왕 53년에 “부여가 사신을 보내어 호랑이를 바쳤다”는 기사도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태조대왕 69년(121)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의 廟에 제사하였다”510)≪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太祖大王 25년 10월·53년 정월·69년 10월.는 기사를 통해서도 화친관계가 돈독했음을 알 수 있다.

 건국 초기부터 예속 및 화친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부여는 힘에 의해 고구려 왕실을 계속 예속시키려고 하였다. 처음에 부여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볼모교환을 요구하였다. 이 때 국력이 아직 약하였던 고구려는 하는 수 없이 태자 都切을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자 이에 분개하여 부여에서는 5만 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511)≪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琉璃明王 14년 정월·11월. 그 후에도 부여는 외교적 방법으로 고구려 왕실을 계속 위협함으로써 고구려를 예속시키려고 하였다. 9년에 부여는 고구려에 보낸 편지에서 부여와 고구려를 大國과 小國의 관계로 표현하고 소국인 고구려가 대국인 부여를 섬기는 것은 응당한 도리라고 강조하였다. 계속하여 부여의 요구를 듣지 않을 때에는 고구려왕조를 더는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무력행사의 의사까지 드러냈다.512)≪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琉璃明王 28년 8월. 이에 대해 고구려는 아직 부여와 싸울 만한 힘이 없었으므로 겉으로는 부여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제로는 부여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장차 부여와의 싸움을 위하여 국력을 키워 나가려고 하였다.513)위와 같음. 그 후 고구려의 세력이 급속히 강화됨에 따라 두 나라 사이의 역량은 점차 균형상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3년 부여는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매복에 걸려 鶴盤嶺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514)≪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琉璃明王 32년 11월. 이것은 부여의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우세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여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는 부여로부터의 위협과 압력을 제거하고 그 지역을 통합하기 위한 준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부여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하였다.

 고구려군이 22년 2월에 부여의 남쪽 계선에 이르자 이에 대항하여 부여는 전국의 군사들을 총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휘발하유역으로 추정되는 부여의 남쪽 진펄지대에서 두 나라 군대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515)≪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5년 2월. 이 전쟁에서 부여는 비록 고구려군을 물리쳤으나 국왕과 수많은 군사들을 잃어버렸다. 또한 부여왕의 죽음을 계기로 통치층 안에서 불안과 동요가 일어났으며 그 결과 고구려로 넘어가는 자들이 늘어났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동생(금와왕의 막내아들)은 22년에 曷思水에 이르러 갈사국을 세웠다.516)≪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5년 4월. 같은 해에 금와왕의 사촌동생이 1만여 명을 이끌고 가서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고구려 왕실에서는 그를 연나부지방에 안착시키고 ‘絡’씨라는 성을 주어 특별히 우대하였다.517)≪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大武神王 5년 7월. 이같은 전쟁과 대소왕의 전사를 계기로 통치층 안에서 일어난 와해상태는 부여의 국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2세기를 넘어서면서 부여는 고구려의 발전을 견제하기 위하여 후한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전개하였다. 또한 평야지대이면서 농사에 유리했던 요동군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105년 고구려는 요동군의 6현을 일시 빼앗았으나 격퇴되고, 111년에는 부여가 낙랑군을 공격하였다. 118년에는 고구려가 현도·낙랑을 공격하였고, 2년 뒤인 120년에도 현도성을 공격하자 부여는 고구려 군대에 맞서 싸웠다. 120년에 부여왕이 尉仇台를 후한에 파견한 것도 고구려의 현도성 공격과 관련된 것으로,≪후한서≫孝安帝紀의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구원하고 고구려·마한·예맥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공헌하였다518)≪後漢書≫권 5, 帝紀 5, 孝安帝 延光 원년 2월.”는 기사는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삼국사기≫에도 고구려 태조왕 69년(121)에 “왕이 마한·예맥의 1만여 기를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병사 2만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하여 맞서 싸웠으므로 아군이 대패했다”는 기사와 또 1년 뒤에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략함에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어 현도를 구원하는 동시에 우리 군을 깨뜨렸다”고 한 기록은519)≪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太祖大王 69년 12월·70년. 고구려의 활발한 요동진출을 견제하기 위하여 부여가 후한과 밀접한 군사외교를 전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부여가 북방의 한랭한 땅인 송화강유역에서 온난한 요하유역으로 진출을 기도한 것이나, 고구려가 압록강 중류의 산간지대에서 농경지로서 혜택을 입은 요동군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것은 그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요청이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후한정권은 이러한 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민족 지배정책을 실시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520)井上秀雄,≪古代朝鮮≫(日本放送出版協會, 1972), 39∼40쪽.

 그러나 부여는 3세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서쪽에서 성장하는 선비의 세력과 고구려의 압력에 의하여 국가적 성장이 저지되고 국력이 점점 쇠약해졌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