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2. 부여의 성장과 대외관계
  • 2) 부여의 대외관계
  • (3) 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3) 부여의 쇠퇴와 부흥운동

 3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부여국은 격심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변정세가 급속히 변화함에 따른 것이었다.

 부여는 지형상으로 대평원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외침을 방어하는 데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부여지역은 유목민과 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로서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라 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았다. 특히 3세기 중반 이후 중국의 통일세력이 무너지고 유목민세력이 흥기하여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의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더욱 그러하였다. 남쪽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팽창에 의하여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급기야 285년에는 선비족 모용외에 의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또 국왕 의려는 자살하였고 부여 왕실은 北沃沮방면으로 피난하였다.530)≪晋書≫권 97, 列傳 67, 東夷 夫餘. 이듬해 의려를 이어 의라가 왕위를 계승한 뒤 晋 의 東夷校尉 何龕 군대의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하고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531)위와 같음. 吉林의 都城을 회복한 뒤에도 모용씨의 거듭된 침입을 받게 되었고, 포로가 된 부여인들은 북중국에 노예로 전매되어 갔다. 부여는 西晋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재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국세는 전과 같지 못하였다. 한편 진이 북방민족에게 쫒겨 남천하게 되고(316∼317) 쇠망함에 따라 부여는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완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부여는 4세기에 들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원래의 중심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서쪽으로 그 근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資治通鑑≫권 97, 晋紀 19 穆帝 永和 2년(346) 정월조에는 “처음 부여는 鹿山에 거하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게 되어 부락이 衰散해졌는데, 서쪽으로 연 가까이 옮기고는 방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부여가 346년 모용씨의 침입을 받기 이전에 백제의 침략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를 4세기 초에 있어서 백제의 해상 발전, 나아가서는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려는 설이 있어 왔다.532)鄭寅普,≪朝鮮史硏究(下)≫(서울신문사, 1947), 202∼205쪽. 그러나 이 백제는 전술했듯이 고구려나 물길의 誤記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533)盧泰敦, 앞의 글(1989), 48∼50쪽. 부여는 고구려(또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서쪽으로 燕 가까이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있다가 346년 前燕王 慕容皝이 보낸 世子 慕容儁과 慕容恪·慕輿根 휘하의 1만 7천 명의 침략을 받아 국왕 玄 이하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타격을 받았다.534)≪晋書≫권 109, 載記 9, 慕容皝 3년. 비록 전연왕은 현에게 ‘鎭東將軍’의 작위를 주는 한편 그를 사위로 삼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이로써 부여는 그 중심세력을 잃고 말았다. 이 때부터 부여는 전후로 전연과 前秦에 臣屬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이 당시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535)李丙燾, 앞의 글. 346년 이후 부여의 故土는 전연의 소유하에 들어가게 되고, 370년 이후에는 고구려에 병합되어 그 판도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보았다. 이 주장의 근거는<牟頭婁墓誌銘>에 대사자 모두루가 ‘令北夫餘守事’를 지냈고, 광개토왕 때 북부여를 진수하였다는 내용 및≪위서≫고구려전에 435년경의 고구려 국경선이 “북으로 옛 부여에 이르렀다”는 기사에 두고 있다. 그리고 494년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는 기록은536)≪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文咨明王 3년 2월. 찬자의 잘못으로 본다.537)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416∼417쪽.

 부여는 346년 모용황의 침입으로 국세가 기울어졌다. 그러나≪진서≫나≪자치통감≫의 자료만으로는 부여의 멸망을 단언하기 어렵다.≪위서≫高宗紀의 文成帝 太康 3년(457)조에는 “于闐(코탄)·부여 등 10여 국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晋書≫권 111, 載記 11 慕容暐조에 의하면 前秦의 苻堅이 370년 部의 무리 10만 군을 거느리고 전연의 수도 鄴을 쳤을 때, 전연의 散騎侍郞 餘蔚이 ‘夫餘質子’를 거느리고 밤에 성문을 열어 부견의 군사를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346년 이후에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538)金毓黻,≪東北通史≫(臺北, 1971), 256∼257쪽.≪자치통감≫권 102, 晋紀 24 海西公 下조에는≪진서≫의 내용보다 더 자세한 기사가 보인다. 이에 의하면 여울이 부여·고구려 및 上黨 質子 5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細註에 여울을 부여 왕자라고 하고 있어 복잡한 추리를 유발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모용씨가 부여를 공멸한 뒤 그 구토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잡아 놓은 인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539)池培善,≪中世東北亞史硏究≫(一潮閣, 1986), 204쪽. 따라서 346년 모용씨의 침입으로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부여의 세력이 거의 와해되기는 하였으나 그 주민들과 영토는 전연과 전진에 신속된 상태로 존재하였고, 여전히 고구려와 물길의 進攻 목표로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46년 당시 燕軍은 부여에 한 차례 타격을 가한 후 곧바로 귀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부여의 수도에 계속 머물며 그 영역을 직접 지배하기 위해서는 당시 서쪽으로 後趙와 대치하고 있었고, 동으로는 고구려와 전쟁을 치른 후 대결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연으로서는 상당한 병력의 유지와 계속적인 전쟁을 감수하여야만 했기 때문이다.540)盧泰敦, 앞의 글(1989), 43∼44쪽. 연군이 돌아간 후 부여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재건하려고 하였다. 연이 북중국 방면으로 진출함에 따라 부여에 대한 연의 압력이 퇴조하였고, 고구려도 연의 침공으로 입은 타격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백제세력과의 대결에 급급하였다는 주변정세의 변동에 힘입어 다시 부여국의 명맥을 잇게 되었던 것이다.541)盧泰敦, 위의 글, 44쪽.

 이렇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부여의 세력은 광개토왕의 정복에 의해서 비로소 고구려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에 대한 대규모 정벌은 먼저 고구려에 의해 5세기 초에 단행되었다.<광개토왕릉비>에는 이 사실에 대하여 “동부여는 옛날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게 되었다. 20년 庚戌에 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왕의 군대가 餘城에 이르니… 왕의 은덕이 널리 퍼졌으므로 이에 개선하였다. …무릇 대왕이 攻破한 城이 64개요, 村이 1,400개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동부여는 부여를 가리키는 것이고,542)王健群,≪好太王碑硏究≫(吉林人民出版社, 1984;林國本·繆光禎 飜譯,≪好太王碑の硏究≫, 208쪽). 동부여가 옛날에 추모왕(동명성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은 광개토왕의 부여정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물론 광개토왕대에 부여에 대한 정벌이 여러 번 있었을 것이나,<광개토왕릉비>에 이 해의 사실만을 대서특필한 것으로 보아 永樂 20년(410)의 정벌이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이 때 광개토왕이 여성에 진공하였다는 것은 부여가 큰 타격을 받은 것을 뜻하며, 기본적으로 중심지역에 남아 있던 부여의 세력을 멸망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때 64개 성, 1,400개의 촌락을 격파하였다는 기록은 對동부여전의 전과를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543)박시형,≪광개토왕릉비≫(1966), 207쪽.
孔錫龜,<廣開土王陵碑의 東扶餘에 대한 고찰>(≪韓國史硏究≫70, 1990).
이는 대개 광개토왕의 통치 전기간에 있었던 전과로 주로 백제지역 정복과 관련된 城村으로 보고 있다.544)<廣開土王陵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1992), 29쪽.

 광개토왕이 부여성에 진공하였다는 것은 부여가 이 때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영역 및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수왕대 인 435년에 고구려를 방문한 북위의 사신 李傲가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 “북으로 구부여에 이른다”545)≪魏書≫권 100, 列傳 88, 高句麗.고 보고하였을 것이다. 410년 고구려의 부여정벌로 부여의 대다수 주민과 광대한 지역이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제 부여 왕실은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고구려의 부여지역 지배를 위한 방편으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이오는 435년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동으로 柵城546)柵城은 오늘날의 훈춘시 외곽의 八連城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팔련성에서는 발해시대의 유물만 출토되므로 이곳은 발해의 東京龍原府(柵城府) 자리이고 고구려시대의 책성은 팔련성 부근 5리 지점에 있는 고구려성인 溫特赫部城으로 비정되기도 하나 현재 그것을 입증할 고고학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책성에 대해서는 동부여의 두만강유역으로 보고 있는데,<광개토왕릉비>에서 말하는 여성이 곧 책성으로 두만강유역의 동부여가 책성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547)李龍範,<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5∼57쪽.
盧泰敦, 앞의 글(1989).

 ≪삼국지≫동옥저조에는 고구려 동천왕이 관구검의 침입으로 ‘置溝婁’로 피난했다고 하였는데, 이 치구루는 ‘買溝婁’의 착오이며 책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동부여의 味仇婁548)味仇婁는≪三國志≫毌丘儉傳에 나오는 북옥저의 置溝婁(=買溝婁)와 같은 것으로서 대개 두만강유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나 守墓人 기사 중 賣勾余로 추정하여 연해주 일대의 동부여지역이 광개토왕 때 편입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549)島田好,<東扶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靑丘學叢≫16, 1934). 그러나 책성은 치구루와 같은 곳이지만<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고구려왕을 따라간 부락집단으로서 ‘△△△味仇婁’와는 다른 실체이다. 이 책성은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북옥저지역에 설치된 것으로서 동부여를 멸망시키고 둔 것은 아니다. 이미 태조왕 이전부터 고구려의 복속하에 있던 북옥저지역을 광개토왕이 다시 대대적인 군사적 정복을 할 리는 없는 것이다.<광개토왕릉비>에서는 쇠약해진 부여의 수도(길림 일대)를 광개토왕이 공파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부여는 급속히 약화되어 5세기 말까지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 부여의 지배하에 있던 물길족의 저항이 거세졌으나,550)≪魏書≫권 100, 列傳 88, 高句麗. 당시의 부여는 물길의 반발을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 뒤 부여는 457년 북위에 조공을 하여 한 차례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551)≪魏書≫권 5, 帝紀 5, 高宗文成帝 太安 3년 12월.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시도에 불과하였고,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한편 5세기 말 동만주 삼림지대에 거주하던 靺鞨의 전신인 勿吉이 흥기하여 고구려와 상쟁을 벌이고, 동류 송화강을 거슬러 그 세력을 뻗쳐나갔다. 이에 따라 부여는 그 침략을 받게 되고, 부여 왕실은 고구려 내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드디어 부여는 494년에 국왕과 그 일족이 고구려에 망명·항복해 옴으로써 그 여맥마저 완전히 꺼져 버리고 말았다.552)≪三國史記≫권 19, 高句麗本紀 7, 文咨明王 3년 2월. 이 때 멸망한 부여는 고구려의 보호 아래에 있던 吉林市 일대의 原부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고구려와 魏·晋시기에 크게 성장한 선비 모용씨의 침입을 받아 동쪽으로 이동하였던 부여족의 일파가 건국한 부여만이 고구려의 보호 아래 5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494년에 이르러 물길의 흥기로 그 왕족이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만주지역의 부여는 소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부여의 주민집단이 고구려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일단의 잔류세력이 서북쪽으로 옮겨가 豆莫婁國을 형성하였다.553)金貞培,<豆莫婁國 硏究>(≪國史館論叢≫29, 1992), 71∼80쪽.
魏國忠,<豆莫婁國考>(≪學習與探索≫3期, 1982), 137쪽.
張博泉,<魏書豆莫婁傳中的機個問題>(≪黑龍江文物叢刊≫2期, 1982).
≪위서≫열전 豆莫婁傳은 두막루가 舊부여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위서≫두막루전은 “두막루국은 물길 북쪽 천 리에 있는데… 옛날 북부여이다”라는 내용을 제외하고 나머지는≪삼국지≫부여조의 기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신당서≫권 220, 열전 145 流鬼傳에는 “達末婁는… 북부여의 후예이다.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그 유민이 那河를 건너 그 곳에 살았다”고 하여 달말루, 즉 두막루국에 관하여 아주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나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오늘의 눈강과 제1송화강 합류점 일원으로 비정하여, 이 강을 건넌 부여인들이 호눈평원 또는 송눈평원 일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554)李健才,≪東北史地考略≫(吉林文史出版社, 1986), 38쪽.
董萬侖,≪東北史綱要≫(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108쪽.
한편 두막루인들은 점점 주변의 실위나 물길 등의 영향을 받아 8세기경에 이르러 그 이름을 잃어 버리고 부여국의 존재 또한 이 때서야 사라진다고 보기도 한다(金貞培, 위의 글, 79∼80쪽).

<宋鎬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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