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1)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
  • (2) 지방통치조직

(2) 지방통치조직

 부여는 2천 리에 걸치는 방대한 영토를 동·서·남·북의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이 지역들을 ‘가’들이 관할하였으며, 중앙은 국왕이 직접 통치하였다.

 부여에서는 전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온 나라를 5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지방에는 ‘四出道’가 있었다. 사출도라는 말은 단순히 지방을 네 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했다는 의미보다는, 고구려의 五那部처럼 수도를 중심으로 대체로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을 나눈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道는 교통로 또는 그 교통로상에 위치하는 지역을 뜻한다.573)武田幸男,<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朝鮮學報≫99·100, 1981), 160쪽. 따라서 사출도는 왕도로부터 사방에 통하는 길로서 고대국가의 지방지배의 기본이 되는 도로와 그 주변 읍락을 의미하는 말이며574)金哲埈, 앞의 책(1976), 63쪽. 완비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출도는 諸加에 의해 관할되었다. 제가는 중앙 관계인 마가·우가·구가·저가로만 한정하여 보는 견해575)李丙燾, 앞의 글, 212쪽.가 있으나, 여기서의 제가는 이를 포함한 부족장 전체를 의미하는 범칭으로 생각된다. 이들 제가들은 당시에는 ‘鴨盧’라고 불렸던 것 같다.<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가 부여를 쳤다는 기사 뒤에 광개토왕을 따라서 고구려로 간 자들로 ‘味仇婁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卑斯麻鴨盧’가 나온다. 여기서 미구루·비사마 등 압로 앞에 붙은 명칭은 부여에 있던 특정 지역집단이나 부족의 거주지일 것이다. 따라서 지명 뒤에 표기된 압로는 ‘부족집단’을 의미하는 표현이거나 또는 이른바 사출도를 관할하는 ‘가’나 ‘干’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능비문에서는 부여성과 압로를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 실체가 다른 것으로서 부여의 수도를 부여성이라 불렀고,576)<광개토왕릉비>에서는 新羅의 수도를 新羅城이라 한 것으로 보아 夫餘의 수도도 扶餘城이라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압로는 일정지역의 가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7)鴨盧는 東扶餘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貴族과 같은 존재를 나타내는 ‘加’나 ‘干’과 같은 의미를 지닌 稱號로 보기도 하고(박시형,≪광개토왕릉비≫, 1966, 207쪽), 혹은 이동가능한 聚落으로 보기도 한다(武田幸男,≪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1989, 65쪽). 혹자는 막연히 城 또는 官名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千寬宇,<廣開土王陵碑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압로 앞에 지역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諸加집단이나 귀족의 칭호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 이 집단들은 국가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자 독자적으로 지역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는 부여사회의 지방세력이 중앙에 대해 독자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중앙 부족은 지방세력을 인정하고 이와 연맹하여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5개 지역으로 구분된 지역집단 밑에는 邑落들이 있었다. 각 지방의 읍락들은 城柵으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그 성책이 아주 높고 견고하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그것을 감옥과 같다고 하였다.57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이러한 읍락의 구체적인 유적이 최근 길림시 교외의 蛟河縣 池水鄕 新街古城址와 松江村 福來東고성지에서 발견되었다.579)董學增,<吉林蛟河縣新街·福來東古城考>(≪博物館硏究≫2期, 1989), 69∼72쪽. 신가·복래동 두 고성은 평지에서 높이 솟아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홍갈색의 굽접시·시루 등이 많이 나왔고, 성의 평면은 圓角方形 즉 원형에 가깝다.580)두 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부여 都城의 한 유적인 길림시 帽兒山 漢代 목곽묘에서도 발견되고 있고, 토기의 바탕과 器形이 한대 유물의 바탕·기형과 다르기 때문에 부여 유물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馬德謙,<談談吉林龍潭山東團山一帶的漢代遺物>,≪北方文物≫2期, 1991). 이러한 사실은≪삼국지≫부여조의 “(부여는) 먹고 마시는데 모두 俎豆를 사용하고 성책은 모두 둥근데 마치 牢獄과 같다”는 기사와 부합한다. 또한 西漢∼兩晋시대에 제2송화강유역은 부여의 영역으로 현재의 교하현 지수향과 송강촌은 부여국의 세력범위에 포함되어 있던 곳이다. 그리고 최근 동단산 南城子를 부여의 왕성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을 따른다면,581)武國勳,<夫餘王城新探>(≪黑龍江文物叢刊≫4期, 1983). 신가·복래동 두 성지는 부여의 읍락유적이 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가고성은 주위 둘레가 200m(약 184m) 정도로 작은 범위 안에 읍락 지배를 위한 건물들이 있어 주로 각 읍락의 대표나 호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두 고성은 모두 蛟河의 서안에 있으며 남북으로 서로 9㎞ 떨어져 있다. 두 성이 떨어져 있는 거리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점은 부여 읍락의 존재양태와 관련하여 좀더 면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처럼 읍락은 부여연맹체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집단이었다. 그러나 이 읍락은 곧바로 중앙권력에 의해 파악되는 지방지배 단위는 아니었다. 중앙에서는≪삼국지≫부여조에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방위에 따라 크게 네 개의 지역으로 구분한 일종의 국읍인 사출도를 두어 제가가 담당하게 하여 지방을 총괄하였던 것이다.≪삼국지≫동이전 鮮卑條에는 “(선비는) 右北平 이동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부여와 예맥의 20여 읍과 접하여 동부를 이루었다”58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鮮卑.라고 하였다. 여기서 읍락은 아마도≪삼국지≫위서 동이전 韓조에 나오는 國邑에 해당하는 것으로,<광개토왕릉비>의 ‘味仇婁鴨盧’ 등의 ‘△△△압로’에서 ‘△△△’에 대응되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부여의 중앙에서 지방을 파악하는 통치단위였다고 할 수 있다. 사출도연맹체제 내에서는 부여왕권이 각 국읍 내에 어느 정도 통제력을 발휘하였겠지만, 아직 제가들의 자치적 성격이 온존되는 상태였으므로 각 국읍 내의 단위집단(읍락)에까지는 중앙권력이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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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新街古城址 평면도와 채집유물 ①
<그림 8>新街古城址 평면도와 채집유물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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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新街古城址 평면도와 채집유물 ②
<그림 8>新街古城址 평면도와 채집유물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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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부여의 연맹체제에 의한 지방통치는 지역 단위집단인 읍락집단을 일원적으로 통제할 만큼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지수장층인 諸加의 자치력을 인정하는 가운데,583)≪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 이들을 통한 간접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부여는 왕위의 부자상속 및 한과의 교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강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제가세력들을 통제·감시하는 지배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의 지방지배 및 정복지역의 통치방식은 漢代 이래 부여에 예속되어 있던 읍루족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삼국지≫동이전 읍루조에는 읍루인들이 “한 이래로 부여에 臣屬하였는데 부여가 그 租賦를 과중하게 부과하자 그에 반발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부여의 읍루에 대한 지배는≪삼국지≫의 기록처럼 읍락별로 복속시켜 그 族長을 통하여 공납을 징수하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屬民-貢納에 의한 지배체제로 보기도 하는데,584)林起煥, 앞의 책, 138쪽. 이 체제는 각 읍락사회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이들을 종족적으로 묶어서 동옥저부락·읍루부락 등으로 집단적으로 파악하여 공납을 받는 지배방식이다. 대체로 부여의 정복지역에 대한 통제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믿어지며, 따라서 정복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下戶계층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공납지배는 매우 가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읍루가 魏의 黃初연간(220∼225)에 공납징수가 가혹함에 저항하여 그 지배에서 이탈하였다는 사실에서58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挹婁. 이를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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