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3. 부여의 정치와 사회
  • 2) 사회와 경제
  • (3) 경제생활

(3) 경제생활

 부여의 족장층으로 여겨지는 大人617)여기서 大人들은 아마도 大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들은 외국에 나갈 때에 수를 놓은 비단옷에 모피 갓을 쓰고 이에 금은으로 장식을 하여 호사로움을 과시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족장층의 부는 상당하였고 그들에 의한 부의 집중이 진전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인들은 백금보문화나 서단산문화 단계에서는 주로 석기나 목기를 이용하여 농경을 하였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후에는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쇠붙이로 만든 호미·가래·쟁기, 그리고 소와 말의 畜力 등에 의해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사회에서 이미 深耕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618)白南雲, 앞의 책, 135쪽. 그것은 牛耕이 가능한 시기에나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생각된다.

 부여의 산업과 생산물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삼국지≫에 “토지는 오곡에 적합하고 五果는 나지 않는다”라고 한 사실을 통하여 부여의 기본 생업이 농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8만 호를 거느린 부여는 고대 초기국가 가운데서 토질이 가장 비옥하고 평탄한 지역을 차지하여 농업이 발달하였다. 부여 선주민의 문화인 서단산문화 晩期유적들에서는 돌도끼와 반달칼·돌호미 등이 출토되고, 형태가 다양한 많은 토기가 점차 규격화되고 있는 등의 사실로 보아 당시 주민들이 장기적인 정착생활과 농업을 위주로 한 경제생활을 영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단산문화 마지막 단계인 楊屯 大海盟유적에서는 갈돌 등 農具의 수량이 더욱 많아지고 형태도 다양해지며, 시루·좁쌀 등이 출토되고 있다.619)劉景文,<西團山文化的農牧業發展探索>(≪北方文物≫2期, 1991), 13∼17쪽. 이후 한-부여시기의 여러 고분 및 유지에서는 철제 삽과 낫 및 다양한 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철기시대 이후에는 금속제 농기구의 출현과 함께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농업경영은 대체로 豪民들이 토지를 사유하고 下戶를 부려 농경에 종사하게 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옛 농업공동체의 생산형태도 遺制로서 남아 있었음이 명확히 보인다. “옛날 부여의 습속에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리고, 혹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62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라는 기록은 곡식농사가 잘 되지 않았을 때에 생산경제의 계획자로서 왕에게 책임을 지우는 농업공동체 단계의 요소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여에서는 농업과 함께 목축업도 성행하였다. 주요한 가축으로는 말·소·돼지·개 등이 있었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여 일찍이 외국에까지 알려졌다.≪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는 “그 나라에서는 가축기르기를 잘하고 名馬와 赤玉·담비·아름다운 구슬이 난다. …여섯 가지 가축으로 관직이름을 정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부여에서 가축의 무리를 종류별로 전문적으로 길렀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621)부여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한 가축은 무덤의 부장품으로 보아 돼지였음을 알 수 있다. 吉林지역 서단산문화에서는 대부분의 석관묘에서 돼지뼈가 나오고 있으며, 특히 길림 土城子유적의 경우는 출토된 짐승뼈 중 돼지뼈가 9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목축업은 부여족에게 가장 인연이 깊은 산업으로 농업과 서로 병존하였으며 역사적으로는 어느 의미에서 농업보다 더 선행된 중요한 생산부문이었다. 부여는 훌륭한 말을 산출하였으므로 농경민이면서도 기마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보병과 함께 상당한 수의 기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소속문제를 두고 논란이 많기는 하지만 부여 전성기의 영역 내에 있던 西豊縣 西岔溝622)田 耘,<西岔溝古墓群族屬問題淺析>(≪黑龍江文物叢刊≫1期, 1984).·東遼縣 石驛彩嵐유적623)劉升雁,<東遼縣石驛公社古代墓群出土文物>(≪博物館硏究≫3期, 1983).이나 楡樹縣 老河深624)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編, 앞의 책. 목곽묘유적 등에서는 유목민들이 주로 사용한 철제 무기들과 마구, 그리고 銅製 飛馬牌飾이나 雙耳銅釜(鍑)가 나오고 있다. 또 學古東山이나 帽兒山 등 한-부여시기의 고분에서도 철제 무기와 마구·농기구 등이 동부 등과 함께 나오고 있다. 쌍이동부만을 놓고 본다면 이는 몽고지역625)潘 玲,<黑龍江友誼縣出土的鄂爾多斯式靑銅釜初探>(≪北方文物≫3期, 1994), 127∼128쪽.이나 集安의 고구려유적에서도 적지 않게 출토되는 유목민계통의 유물이다. 또한 부여는 선비와 인접하고 있었으므로 선비의 문물제도를 흡수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다.

 ≪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는 3세기 중반 부여의 군사동원체계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지배 귀족인 諸加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고 한다. 무장한 귀족들이 직접 말을 타고 금속제 병장기를 들고 기마전을 수행할 경우, 그 군사력은 대단히 높았을 것이다. 이처럼 부여족은 목축업의 발달에 따라 우수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중국 사가들이≪삼국지≫부여조에서 “부여는 부유하고 선세 이래 타국에게 피해를 본 일이 없다”라고 한 것은 부여의 경제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강력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에서는 목축 외에 상업과 교통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1세기 초에 이미 멀리 후한과 외교적인 관계를 맺은 이래 역대로 부여는 魏·晋의 여러 나라들과도 일정한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그 때마다 그 나라들과 대외무역이 이루어졌다. 특히 후한의 광무제가 부여의 조공에 후하게 보답했다626)≪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든가 “후한 永寧 원년 부여 왕세자 尉仇台가 후한 낙양에 와서 공물을 바치자, 천자는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색채단을 내렸다”627)위와 같음.는 기록 등은 단순히 封貢과 보답의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歲幣의 통교, 즉 상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옛 중국인들이 부여에서 생산된 여러 가지 모피류들과 좋은 말 및 구슬류 같은 특산물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부여의 대외무역이 성행하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부여의 사회경제는 주로 기본 생산대중인 노예와 하호들에 대한 착취와 정복민인 읍루족에 대한 가혹한 수탈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부여사회에서 노예의 존재를 말해주는 순장이 행해졌다는 사실은 3세기 전반 부여사회의 일면에서는 공동체적 유대가 잔존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추세와 서로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순장은 일단 사유재산제의 발생과 함께 싹튼 노예제도에 의해 일정한 무리의 비자유인들이 하나의 생산수단으로서 부유층에게 소유되고, 그 결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유관계에 의거하여 그 소유자가 비자유인의 생살 여탈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장제는 노예제사회에서 성행할 수는 있으나 순장제의 성행이 곧 노예제사회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628)노태돈,<한국인의 형성과 국가의 기원>(≪한국사특강≫, 서울大 出版部, 1990), 44쪽. 오히려 순장은 순장하기보다는 그 노예를 상속인에게 물려주는 편이 富의 생산수단으로서 더욱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노예제도의 미발달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629)白南雲, 앞의 책, 132∼143쪽.

 부여가 가장 강성했던 3세기 전반에 부여사회는 일면에서는 공동체적 유제가 잔존해 있었고, 다른 일면에서는 사회분화가 진전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체제에서는 연맹체적인 성격이 강인하게 존재하는 가운데서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宋鎬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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