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4. 부여의 문화
  • 1) 신앙과 제의

1) 신앙과 제의

 농경생활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되었다. 그들은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적 祭儀로 나타났다.630)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古代篇(一潮閣, 1982), 117쪽.

 부여에서는 혈연의 유대가 사회구조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혈연을 통한 공동의식의 강조는 거족적인 부족공동제사를 통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부여인은 “殷正月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국중대회는 연일 계속되며, 음식을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를 迎鼓라고 했다. 군대를 동원할 일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했다”631)≪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는 것에서 보듯이 1년에 1회 12월에 영고라는 국중대회를 거행하였다. 영고는 국중대회로서 고구려의 東盟祭(10월), 동예사회의 舞天祭(10월), 마한의 10월제와 꼭 같은 성격의 제례로 씨족사회의 유습을 계승한 일종의 수확감사제였다. 그러나 부여가 고구려나 동예와 달리 추수감사제를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인 은정월(12월)에 거행하였던 것은 공동수렵을 행하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632)부여에서 영고가 12월에 거행된 것은 12월경의 짐승들이 가장 肥味하고 대개 동굴에 칩거하며, 눈 위의 발자국에 의하여 그 소재를 용이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를 타서 씨족 전원이 공동으로 수렵을 하여 그것으로 대대적인 제천의식을 행하였던 것이니, 고대 한민족의 소위 巡狩란 것도 이러한 제례의 발전형태였다고 한다(孫晋泰,≪朝鮮民族史槪論≫, 乙酉文化社, 1947, 61쪽). 이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하늘은 신령이 거처하는 곳으로 만물일체를 주재하여 복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고라는 말은 수확감사제에 해당하는 부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으나,633)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5), 223쪽. 맞이굿(迎神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634)김택규,<迎鼓考>(≪國語國文學硏究≫2, 1958).
梁在淵,<魏志東夷傳에 나타난 祭天儀式과 歌舞>(≪魏志東夷傳의 諸問題≫, 1979).
李亨求,≪韓國 古代文化의 起源≫(까치, 1991), 107∼113쪽.
특히 북을 활과 화살처럼 하늘과 통할 수 있는 신비력을 지녔다고 믿어 왔던 예맥족사회의 풍속으로 미루어 보아, 부여의 영고는 이를 반영한 종교적 의례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북은 가무로써 신을 즐겁게 하는 샤먼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祭具이며, 국중대회에서 공동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공동의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흉노족이 5월에 龍城에서 대회를 열어 그 조상과 천지귀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선비도 季春의 饒樂水에서 大會를 가졌다는 것을 보면635)≪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영고와 같은 제천행사는 북방 유목사회의 공통적인 습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흉노족은 각 分地 내의 단위집단을 누층적으로 편제하는 형태로 국가체제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부족적 차원의 제천행사를 국가적 제전으로 승격시켜 흉노 국가 전체의 결속력을 높이는 한편 각 左右王長과 분지 내부의 단위집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천행사시에 諸長會議를 개최하여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였던 것이다.636)林 幹,<匈奴社會制度初探>(內蒙古自治區 第一會歷史科學討論會 發表文, 1962;≪匈奴史論文選集≫, 1983).
護雅夫,<北アジア·古代遊牧國家の構造>(≪世界歷史≫6, 岩波書店, 1971).
사출도로서 지방을 일정한 단위로 나누어 통제하던 체제를 가지고 있던 부여의 경우도 국중대회의 모습이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축제 때에는 노예나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들이 참여하여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면서 서로간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부여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노래부르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삼국지≫에서는 노인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종일토록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였다.63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136년에 부여왕이 친히 낙양에 가서 조공을 바쳤는데 漢의 順帝는 일행을 성대하게 대접하고, 특히 그들을 위해 북과 나발을 불고 角抵戱를 하여 환송하였다.638)≪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 이것 또한 부여인이 음악과 가무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부여에서는 국중대회 때 제천행사와 동시에 刑獄을 판결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639)한 때 ‘斷刑獄 解囚’를 ‘형옥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준다’로 해석하였는데 최근에 ‘형옥을 판결하고 죄수를 풀어준다’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李基白,<한국고대의 裁判과 祝祭>,≪歷史學報≫154, 1997). 수도에서는 전국의 족장에 해당하는 諸加들이 모여 왕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지난 한 해를 결산하며 주요문제를 토의하여 국가의 통합력을 강화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삼국지≫부여조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의 경우 3세기 중엽 왕권이 강화되기 이전의 어느 시기에는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왕을 교체하거나 살해하였다고 한다.64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한 해의 풍흉이 결정되는 시기에 왕을 살해하거나 교체하였다는 것은 왕의 치폐가 제천행사시의 회의를 통해 의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제천행사 때의 회의체의 이러한 기능은 왕권이 확립되고 국가체제가 성립된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그대로 지속되었다. 3세기의 사실을 반영하는≪삼국지≫에 “형옥을 처단한다”고 한 내용은 당시 부여에서는 제천행사시에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국중대회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하였는 바, 이 대회는 ‘加’라고 칭하는 고급 귀족관료들의 평의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의에서 국왕은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부여사회는 아직 전국에 걸친 지배조직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지방의 각 부족들의 자치력이 온존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영고는 비단 민속적인 행사로서 뿐 아니라 정치적인 통합기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장례를 후하게 한 것은 고대사회의 공통된 풍습이었다.641)邊太燮,<韓國 古代의 繼世思想과 祖上崇拜信仰(上)>(≪歷史敎育≫3, 1958), 55∼69쪽. 사람들은 죽으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여 일반적으로 厚葬을 하였다. 부여에서는 보통 送葬을 멈추어 두는 停喪기간이 5개월에 미칠 정도로 상주는 장사를 속히 지내려 하지 않고 남의 강권에 의해 행하는 것을 예절로 알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얼음을 써서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고 또한 많은 부장을 하였다. 나아가 貴人에 대한 순장의 풍습은 한·위시대까지도 행하여져 많은 때에는 그 수가 백에 달했다고 한다.642)≪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장례를 치를 때에는 남녀 모두가 순백색의 의복을 입고, 특히 부인은 布面衣를 입고 패물이나 고리는 차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64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등은 귀족계급에게 있어 祖先숭배사상이 극히 엄격하고 상당히 복잡하였던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특히 王葬은 玉匣을 사용했고 鏤金한 옥으로 만든 옷을 입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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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帽兒山 M1목곽무덤
<그림 10>帽兒山 M1목곽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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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의하면 부여인들은 죽은 이를 위해 棺은 쓰되 槨이 없는 무덤을 쓴다고 하였다. 이것은 부여에서 이른바 土壙木棺(槨)墓가 널리 유행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기원전 3세기를 지나면서 송눈평원과 송요평원의 부여 중심지역에서 토광목관묘가 주된 묘제로 사용된 점에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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