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4. 부여의 문화
  • 2) 생활 풍습

2) 생활 풍습

 ≪후한서≫동이열전 부여조에 의하면 부여인의 체형은 高大하고 기질이 용감하고 사나웠으며 사람을 대함에 정성스럽게 하였고 손님이 오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잘 대접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여족은 고구려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본래부터 동일 종족이었던 예맥으로부터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기 때문에 고구려와 부여의 ‘言語諸事’가 똑같고, 고구려를 부여의 別種이라고 한 것이다.644)≪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高句麗. 한편≪魏書≫失韋傳에 “실위어는 庫莫奚·거란·두막루국과 같다”고 하였는데 부여의 후손인 두막루는 부여와 언어가 같았을텐데 두막루의 언어가 거란어 및 실위어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근래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위어는 몽고어족에 속하다고 한다.645)孫進己,≪東北民族源流≫(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237쪽. 그러므로 부여어·두막루어도 마땅히 몽고어족에 속해야 한다. 부여 제가의 관명 중에 ‘가’나 ‘干’은 몽고어족 계통의 官名으로서 칸(Khan, 可汗, 可寒, 汗)과 음이 가까운 점은 이를 방증해준다고 하겠다.

 부여에는 부여 고유의 문자는 없었던 것 같고 한자가 새겨진 印璽를 쓰거나 공문이나 법령을 공포하는 데도 한자를 사용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외의 다른 생활방식에서도 부여는 중국 것을 많이 모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모였을 때 揖讓하는 예의는 중국과 유사하다646)≪晋書≫권 97, 列傳 67, 四夷 夫餘.”는 기록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부여 상류층의 생활에는 중국 예속의 영향으로 음식에 俎豆를 사용하고647)부여의 중심지역인 길림시 일대나 주변의 부여시기 유적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굽접시(豆)와 물동이 등 漢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연회에 ‘拜爵洗爵’하고, ‘揖讓升降’의 예가 있다고 하였는데,648)≪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夫餘國. 이것은 모두 중국과의 오랜 문화적 교섭에서 유래된 것으로 殷曆의 사용649)李丙燾, 앞의 책, 223쪽. 역시 그러하였던 것이다. 또 장례를 치를 때 남녀 모두가 순백색의 의복을 입고, 특히 부인은 포면의를 입고 패물이나 고리는 차지 않았다고 하는 것 등은 대체로 중국과 유사한 습속이었다고 한다.65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娶하는 娶嫂婚(levirate)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부여사회에서 취수혼은 이전 시기 혼인 풍속의 잔재나 예외적인 것으로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당대인들이 바람직한 혼인형태로 여기는 選好婚으로 널리 행하여졌다.651)盧泰敦,<高句麗 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3), 80∼87쪽. 이러한 취수혼의 풍습은 유교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악덕으로 여기지만, 漢初 흉노에 귀화하여 그 본국을 괴롭혔던 中行說이 북방민족의 이 풍속을 ‘種姓이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이라고 밝힌 바 있듯이 종족보존의 의미가 강한 것이라 하겠다. 부단한 정복전쟁으로 인하여 청장년 남자의 사망률이 높았던 유목민사회에서 일종의 인적 자원의 보충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비롯된 것이 취수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취수혼의 풍습은 흉노뿐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도 행해졌으며 고구려에도 있었고 현재 일본에서도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시행되는 이유는 죽은 형의 재산과 어린 자식의 분리를 방지하여 가족제도를 옹호하는 데에 있다. 흉노에서 볼 수 있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그 後母를 취하거나 형제가 죽었을 때 모두 그 아내를 妻로 삼는 풍속652)≪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은 이러한 견지에서 설명할 수 있다.653)孫晋泰, 앞의 책, 63쪽. 이러한 취수혼은 친족집단의 분화가 진전됨에 따라서 점차 소멸되어 갔는데 여기에는 漢문화의 영향도 일조를 하였던 것 같다.

 한편 부여사회에서 취수혼의 존재는 바로 부여사회가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654)盧泰敦, 앞의 글, 98∼102쪽. 취수혼을 통해 혼인 대상인 단위족과의 친선을 유지하여 자기 부족의 존속에 도움을 받는다는 의식이 부여사회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55)嫂婚制의 풍습은 元代의 蒙古에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의 퉁구스족에도 그 유풍이 남아 있다고 한다(孫晋泰, 앞의 책, 63쪽 및 李龍範,<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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