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Ⅲ. 부여
  • 4. 부여의 문화
  • 3) 예술-건축, 공예, 기타

3) 예술-건축, 공예, 기타

 부여의 물질문화에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를 통하여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부여인들은 조두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東團山 등 부여의 유적에서는 굽접시(陶豆)와 물동이(罐) 등이 주로 나와 사료의 내용과 부합하고 있다. 이는 부여에서 생활용기를 만드는 공예가 매우 발달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의 수도에는 궁성이 있었고 그 주위는 도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전국에서 받아들인 조세·공물을 저장하는 창고와 牢獄을 비롯한 형벌기관들이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부여가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이다.656)盧泰敦,<國家의 成立과 發展>(韓國史硏究會 編,≪韓國史硏究入門≫, 知識産業社, 1981), 114∼122쪽. 부여 궁성의 모습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길림시 동단산 南城子유적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삼국지≫동이전 부여조에 의하면 부여는 궁성을 둥글게 쌓고 감옥을 두는 것이 특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성자古城址를 발굴한 결과 황토흙으로 판축하여 담장을 쌓고 그 내부에 건축물을 세웠는데, 성 내부의 평면은 둥근 타원형이었다.657)董學增,<吉林東團山原始·漢·高句麗·渤海諸文化遺存調査簡報>(≪博物館硏究≫創刊號, 1972). 또한 성 내부에서는 다량의 토기편과 벽돌·기와 및 銅鈴·陶俑 등 漢代 부여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658)馬德謙,<談談吉林龍潭山東團山一帶的漢代遺物>(≪北方文物≫2期, 1991). 이는 문헌의 기록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현재 그 외양은 알 수 없지만 황토흙으로 담장을 쌓고 그 내부에 기와와 벽돌을 이용하여 大屋을 지은 궁성이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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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한-부여 토기
<그림 11>한-부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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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漢-夫餘시기 靑銅器 및 鐵器 ①
<그림 12> 漢-夫餘시기 靑銅器 및 鐵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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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 漢-夫餘시기 靑銅器 및 鐵器 ②
<그림 12> 漢-夫餘시기 靑銅器 및 鐵器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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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의 공예품 생산능력은 의복·무기 및 장식품 등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부여인들은 백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上衣와 겉옷(두루마기:袍)·바지를 입고, 가죽신(革踏)을 신었으며 국외로 나갈 때에는 비단으로 수를 놓은 찬란한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65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喪服도 남녀 모두 흰옷이었다. 그리고 북방의 추운 지역인 만큼 大人 즉 귀족들은 그 위에 여우나 이리 또는 담비 등 북방산 모직물의 덧옷을 입고 모자는 금은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660)위와 같음. 이처럼 옷차림에 의한 호족과 일반민의 구분이 있었고, 아름답게 수놓은 비단과 모직물 옷들, 여우·삵·貂皮 등의 고급 모피와661)서단산문화의 하나인 星星哨유적과 한-부여시기의 유적인 東團山에서 비단이 발견되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나아가 우수한 가죽신도 제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직물생산의 수준과 제조업이 전문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금·은으로 장식한 모자와 각종 아름다운 구슬 장식품의 제작은 높은 수준의 수공업과 함께 연금술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화살·검·창 등 각종 우수한 무기를 생산하여 집집마다 무기를 간직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들 무기는 각자의 수제품으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당시에 무기제작은 이미 어느 정도의 전문직업으로서 분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밖에 부여인들은 여름에 얼음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宋鎬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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