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Ⅳ. 동예와 옥저
  • 1. 동예의 사회와 문화
  • 1) 동예의 위치와 변천

1) 동예의 위치와 변천

 東濊와 沃沮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세기 후반 晋나라 陳壽가 편찬한≪三國志≫魏書 東夷傳이다(이하≪삼국지≫동이전으로 약칭함). 이에 의하면 濊는 남쪽으로 辰韓, 북쪽으로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은 큰 바다에 닿았으며 조선의 동쪽이 모두 예의 땅이라 하였다. 그러므로≪삼국지≫동이전의 예는 한반도 동해안에 있는 예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광의의 예족과 구분하여 東濊로 불려진다. 중국 先秦문헌에서는 일찍부터 예족으로 추정되는 종족명칭이 나타나고 있으나662)≪詩經≫大雅 韓奕篇에 나오는 “其追其貊”의 ‘追’를 ‘穢’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金庠基,<韓濊貊移動考>,≪史海≫1, 1974). 이에 대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이후≪史記≫와≪漢書≫에서 ‘예’는 ‘맥’과 연칭되어 ‘穢貉’으로 표기되면서 ‘朝鮮’과 함께 燕나라 동방에 있던 종족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663)≪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및 권 129, 列傳 69, 貨殖.
≪漢書≫권 24 下, 志 4 下, 食貨.
그리고≪삼국지≫≪後漢書≫에 이르러서는 예족을 濊貊으로 칭하여 맥족과 혼동하고 있으나 이는 후대 사가의 오류이며 예족은 貊이나 濊貊과는 구분되어야 한다.664)尹武炳,<濊貊考>(≪白山學報≫1, 1966), 22∼25쪽.

 한국사와 관련하여 예족의 존재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漢代로 元朔 원년(기원전 128) 漢의 遼東郡에 來附한 濊君 南閭 등이 거느린 28만 口의 집단이 그것이다.665)≪漢書≫권 6, 本紀 6, 武帝 및 권 24 下, 志 4 下, 食貨. 한은 남려의 투항을 계기로 그 곳에 滄海郡을 설치하였으나 3년만에 폐지하였다.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압록강과 渾江유역설, 동해안설, 압록강과 동해안지역설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남려가 위만조선에 畔하여 한에 내항하였다는≪후한서≫의 기록을 근거로 예군 남려세력을 동해안지역의 예로 추정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기원후 3세기 중엽 고구려의 인구가 3만여 호 즉 15만 구 정도임을 감안할 때 28만 구라는 숫자는 광역에 걸친 대규모 집단이다. 여기에는 남려가 속한 정치집단 이외에도 다수의 정치집단들이 포함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특히 ‘예군 남려 등’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남려는 來附세력의 대표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요동군에 내부한 것은 진번·임둔지역까지 복속시킨 위만조선이 다시 압록강유역으로 세력팽창을 시도하자 이 지역의 토착 정치집단들이 크게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군 남려가 속한 지역은 위만조선에 이미 복속되어 있었던 眞番·臨屯지역과는 다른 곳이다. 따라서 창해군은 임둔세력이 있었던 동해안 이외의 지역에서 찾아져야 하며 남려 등이 속한 예는 동예와는 별개의 정치집단이다. 설사 이들이 종족적으로는 같은 계통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기원전 2세기 말경에는 이미 각 지역별로 정착하여 서로 다른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양자는 별개의 세력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즉 동해안지역의 예는 임둔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압록강·혼강 일대의 예족 역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다수의 정치집단군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맥족과 섞여 고구려국가의 기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예족이 형성한 정치집단의 존재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진다. 부여국의 창고에 ‘濊王之印’이라 새겨진 도장이 있고 부여에 濊城이란 이름을 가진 옛날 성이 있었다는≪삼국지≫부여조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길림·장춘지역에도 부여국가 출현 이전에 이미 예족 정치집단이 존재하였다. 예족은 한반도내에서도 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넓은 지역에 걸쳐 분포하였다.<廣開土大王陵碑>에 나오는 ‘新來韓穢 沙水城’ ‘舍蔦城韓穢’ 등은 광개토왕이 정복한 백제지역 성으로 한강·임진강 일대에서 韓族과 공존하던 예족의 존재를 보여준다.≪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동북지방과 신라 북변을 자주 침범하고 있는 靺鞨 역시 한반도 중부 및 동해안지역에 거주하던 예족들이다.≪삼국사기≫신라본기(南解次次雄 16년조)에도 北溟人이 밭을 갈다 濊王印을 발견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북명은 강릉 또는 안변지방으로 비정되고 있어 강원도 동해안 일대가 예족 분포지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경북 영일군 신광면 흥곡리(마조리)부락에서 ‘晋率善穢伯長’이 새겨진 銅印이 발견되어666)梅原末治,<晋率善濊佰長銅印>(≪考古美術≫8-1, 1967). 예족의 분포지역이 의외로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형질학적으로 동일한 종족인지의 여부는 별개로 하고 일단 문헌 자료상에 나타나는 예족만 해도 활동시기와 분포지역이 이처럼 광범위하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맥족·부여족·韓족 등과 섞여 정치·문화적으로 다양한 정치집단들을 구성하였다. 예족과 가장 광범위하게 동화한 것은 맥족으로 한대에 이미 예족과 맥족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맥족인 고구려를 예맥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667)尹武炳, 앞의 글, 19쪽. 더욱이≪삼국지≫≪후한서≫에 이르러서는 동예도 예맥으로 칭해지는 등 예와 예맥을 혼동하는 오류가 빚어지기도 했다.66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夫餘.

 이처럼 예족들은 오랜 기간 넓은 지역에 걸쳐 다양하게 성장 발전해왔다. 동해안지역 예족의 뿌리는 동북지역 무문토기문화의 주인공들이다. 孔列土器로 대표되는 동북지방의 무문토기문화는 서북한의 팽이형토기, 압록강 중하류유역의 美松里式토기, 서남부지역의 松菊里형토기와는 다른 갈래를 형성하면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한반도 중부 및 동남부지역으로 확산되었다.669)趙由典,<無文土器文化의 展開>(≪韓國史論≫13, 國史編纂委員會, 1983), 101∼105쪽.
盧爀眞,<孔列土器文化特色의 傳播網>(≪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4), 34쪽.
이들 동북지역의 무문토기인들은 기원전 3세기 이후에는 고조선의 細形銅劍문화와도 활발하게 접촉하였다. 다음의<표>에서 보듯이 함흥과 영흥 일대를 중심으로 동해안 각지에서 출토되는 세형동검·銅戈·銅鉾·銅鏡 등의 청동기유물들은 고조선지역에서 제작된 것들로 두 지역의 교섭관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대동강유역의 古朝鮮과 황해도의 진번, 서남부지역의 辰國 등 기원전 3∼2세기경 한반도의 유력한 정치집단의 중심지에서 공통적으로 출토되는 유물로 각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던 정치집단과 지배자의 존재를 반영하는 유물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통해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는 동해안 예족사회에도 크고 작은 정치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집합체가 문헌에 나오는 임둔이라 하겠다.

출 토 지 청 동 기 철 기 및 기 타
함흥시 회상구역 이화동 토광묘 銅劍 2, 劍把頭飾 1, 銅鉾 1, 細文鏡 2, 銅戈 1 쇠도끼 2, 토기
함흥시 회상구역 치마동 銅戈 1  
함흥시 반룡구역 지장동 동검 1  
흥남시 사포구역 호상동 동검 2  
함주군 대성리(Ⅰ) 동과 2  
함주군 대성리(Ⅱ) 동검 1, 청동손칼 1  
* 함주군 조양리 청동방울 1  
함주 부근 동과 1  
락원군(퇴조구역) 송해리 동과 1  
홍원군 운포리 검파두식 1 토기 다수
북청군(신창) 하세동리 토광묘 동검 1, 동모 1, 동과 1, 수레부속 1  
북청군 청해토성 동검 1  
금야(인흥)군 연동리 동검 2  
금야군 용산리 토광묘(Ⅰ) 동과 1, 동모 1  
* 금야군 용산리(Ⅱ) 동검 1, 세문경 1  
* 금야군 용산리(Ⅲ) 동검 1, 동모 1, 검파두식 1  
금야(영흥)군 소라리토성 검파두식 1, 청동활촉 14, 수레부속 4, 청동단지 1 쇠도끼 5, 쇠단검 1, 쇠창끝 1, 쇠갈구리 2, 말재갈 2, 쇠뇌부속 1, 쇠단지 1, 토기 다수
강원도 문천군 남창리 동검 1, 동과 1  
함북 종성군 동관리 동검 1, 동과 1  

<표>함경남도 일대의 초기 철기시대 금속유물 출토 일람표670)표로 나타낸 자료는 안영준,<함경남도에서 새로 알려진 고대유물>(≪고고학자료집≫6, 1983)을 참조하였으며 그 밖의 자료는 박진욱,<함경남도일대의 고대유적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4, 1974)의 유물일람표를 참조하였다. 단 지명이 바뀐 것이 확인된 곳은 舊地名을 ( )안에 넣었다.

 임둔은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의 임둔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군현 경영의 어려움으로 기원전 82년 임둔군의 15개 현 가운데서 일부는 玄菟郡에 이속되고 나머지는 폐지되었다. 뒤이어 고구려지역에서의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현도군마저 위협을 받자 기원전 75년 한은 현도군을 興京 老城방면으로 옮기고(제2현도군) 현도군에 이속되었던 현 중에서 單單大嶺의 동쪽 7현은 낙랑군 東部都尉를 두어 관할토록 하였다. 東暆縣·不而縣·蠶臺縣·華麗縣·邪頭昧縣·前莫縣·夫租縣 등 동부도위 소속 7현 중 부조현을 제외한 6현이 동예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임둔군의 治所는 동이현에 있었으나 동부도위 관할로 바뀌면서 치소도 불내현으로 옮겨졌다. 동부도위에 속했던 7현의 위치에 대해 동이현은 덕원, 불이(내)현은 안변, 화려현은 영흥, 부조현은 함흥 등지에 비정되기도 한다.671)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201∼208쪽. 또는 불이현을 素羅里토성이 발견된 영흥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672)도유호,<왕검성의 위치>(≪문화유산≫1962-5). 부조현을 제외한 나머지 현의 위치는 대부분 불확실하다. 다만 동예는 북으로 함경남도 정평에서 옥저와 경계를 이루었고 남계는 평강·회양·강릉 등 강원도 북단 어느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673)李丙燾, 앞의 책, 229쪽.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됨에 따라 7현은 한의 侯國으로 봉해져 각각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속하였다. 이후 동예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삼국지≫에서는 동부도위 7현이 한의 후국으로 봉해졌다가 後漢末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후한서≫동이전 고구려조에는 元初 5년(118) 고구려가 華麗城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674)≪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高句驪. 있고,≪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태조왕 4년(56) 동옥저를 빼앗아 성읍으로 삼고 강역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태조왕대는 요동군(後漢 和帝 元興 원년, 105), 현도군을 공격하여(後漢 安帝 元初 5년, 118) 한군현에 자주 위협을 가하던 시기이므로 동예의 공략시기도 이보다 앞서거나 이와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3세기에 들어와서 魏의 正始 3년(242)에 고구려 東川王이 요동군 西安平을 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2년 후 나라 장군 毌丘儉이 출병하여 고구려와 고구려에 복속된 옥저와 동예를 공략하였다. 1차 공격시(224) 관구검의 명으로 현도태수 王頎는 옥저로 도망간 동천왕을 추격하면서 옥저의 읍락들을 파괴하였고, 2차 공격시(245)에는 명을 받은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예를 쳐서 항복시켰다. 이 사건 이후 동예의 각 현들은 책봉과 조공형식을 통해 위에 복속되었다. 이 때 동예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었던 불내현의 지배자는 ‘不耐濊王’으로 봉해져 정기적으로 군현에 조공하였다. 그리고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할 때면 동예의 주민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고 力役을 징발하여 군현소속 주민을 다루는 듯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에 의해 다시 복속될 때까지 동예의 각 세력들은 중국 군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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