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Ⅳ. 동예와 옥저
  • 1. 동예의 사회와 문화
  • 2) 동예의 사회와 문화

2) 동예의 사회와 문화

 ≪삼국지≫동이전에 동예의 인구는 2만 호라 하였는데 이 숫자는 동부도위에 속했던 6현의 호수를 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평균하면 각 현당 약 3,000여 호가 되어 인구면에서는 삼한 각 小國의 규모와 비슷하다. 大君長이 없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동예지역에는 여러 현을 통합한 보다 확대된 통치조직이 형성되지 못하였으며 각 현들은 시종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므로 군현이 폐지된 이후의 동예의 각 현들은 삼한의 각 소국처럼 불내국·화려국 등으로 불려져도 좋을 것이다.

 한군현 설치 이후 동예의 각 현에도 縣令 또는 縣長이 파견되었음이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漢書≫藝文志 詩賦條에는 東暆縣의 縣令 延年이 賦 7편을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평양에서는 ‘夫租長印’이라는 은제 인장을 부장한 夫租縣의 縣長 高常賢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현장이 파견된 곳보다 현령이 파견된 곳이 규모가 크거나 행정상 더 중요한 곳이었다면 延年은 동이현이 임둔군 郡治였던 시기에 파견된 漢의 관리였을 가능성이 높다.675)연년은 산동성 출신(齊人)으로 漢 武帝 때의 인물이다. 그가 동이현령으로 임명된 연대는 불확실하다(李丙燾, 앞의 책, 200쪽). 그러나 동이현에 현령이 파견되었다면 동이현이 일반 현이었던 시기보다 군치였을 때가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한의 군현 통제방식은 각 지역 사정과 정치적 사정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군현 설치 초기의 사정은 잘 알 수 없으나 부조현의 예를 보면 동부도위 설치 이후 토착 군장을 邑君으로 봉하여 통치한 적도 있었고, 기원전 1세기 말경에는 고상현과 같은 위만조선 지배자 출신을 낙랑군 지배구조로 편입하여 부조현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옥저의 사회와 문화 참조). 이러한 사정은 동예 각 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의 군현은 屬吏를 두어 太守·현령·현장을 보좌하여 군현의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케 하였다. 동예지역에서 실시된 속리제는 功曹·主簿·諸曹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조는 제조를 통할하며 제사·考果·禮樂 등의 일을 하며 椽史 임용 등 지방통치의 실권을 위임받는 경우가 많았고, 주부는 문서와 장부를 관리하면서 지방관의 비서 겸 재정관계를 담당하였다. 군현 설치 초기에는 속리를 요동에서 데리고 왔으나 이후에는 토착인을 속리로 임명하였다.676)속리층의 출자를 고조선 주민과 구분하여 토착 漢人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權五重,≪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73쪽). 이에 대해 양자의 구분의 무의미성을 주장하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吳永贊,<樂浪郡의 토착세력 재편과 지배 構造>,≪韓國史論≫35, 서울大, 1996, 56∼61쪽). 이는 토착 지배세력을 한의 지배구조 속에 끌어 들여 토착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군현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677)尹龍九,<樂浪前期 郡縣支配勢力의 種族系統과 性格>(≪歷史學報≫126, 1990), 37쪽.
吳永贊, 위의 글.
지방관과 속리들은 각 현의 중심읍락에 거주하면서 각 현을 구성한 여러 읍락들을 전체적으로 통괄하였다. 이러한 공식적인 지배구조 이외에 한 군현은 각 읍락의 우두머리를 三老로 임명하여 협조를 구하는 동시에 읍락민에 대한 전통적인 지배권을 인정해줌으로써 토착사회와의 갈등을 완화시켰다.

 동부도위 폐지 이후 동예의 각 현은 侯國으로 봉해져, 縣治가 있었던 중심 읍락의 거수는 侯로 봉해지고 일반 읍락의 거수들은 삼로를 자칭하면서 읍락민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후국들 사이에 세력 경쟁이 다시 전개되면서 不耐·華麗 등 동예의 유력한 國들은 내부적으로 읍락들을 통합하고 통치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3세기 중엽의 불내국이 공조·주부·제조를 두어 동부도위 치소 때의 속리제를 자체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후국 내부에서 진행된 정치 발전의 중요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3세기 중엽경 不耐侯에서 不耐濊王으로 작호가 바뀐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화려와 불내 2현이 공모하여 신라의 북경을 침략하였다는≪삼국사기≫신라본기 儒理尼師今 17년조의 기사는 동예 각국 사이에 간헐적으로 연맹관계가 형성된 적이 있었음을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동예지역에서는 각 국들을 전체적으로 통솔하는 확대된 정치권력의 성장을 보지 못하였다.

 함남 금야군(영흥군) 소라리에서 조사된 평지토성은 불내국의 중심지로 비정되기도 한다.678)도유호, 앞의 글. 소라리토성은 영흥평야 가운데를 흐르는 용흥강 하류 강변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토성 안에서 세형동검 관계 유물과 중국 戰國계 鑄造 철제도끼, 청동제 수레부속, 철제무기, 승석문토기 등 여러 시기의 유물이 혼재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소라리토성 내부와 주변 일대에서 청동단지, 귀달린 쇠단지 등이 발견되었고, 토성에서 1㎞ 떨어진 곳에서는 2기의 귀틀무덤이 확인되었다.679)한석정,<함경남도지역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유적과 유물>(≪문화유산≫1961-1).
박진욱, 앞의 글, 170∼173쪽.
이러한 유적들은 불내예국 등 동예의 유력한 국들의 행정 치소와 지배계급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들이다. 그런데 3세기경의 불내예왕이 여전히 일반민과 섞여 살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토성 내부가 지배계급의 전용 거주구역이 아니라 일반민들도 함께 거주하던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지배계급의 거주구역이 일반인과 분리될 정도로 정치권력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예의 언어와 법속은 대개 고구려와 같았으나 의복은 달라 남녀 모두 曲領을680)목둘레를 둥글게 만든 옷을 말한다. 입었다고 한다. 의복의 재료로는 麻布가 있었고 누에를 길러 명주를 생산하였다. 남자들은 넓이가 數寸되는 銀花를 옷에 장식으로 달고 다녔으며 옥과 구슬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삼한의 주민들이 금은 비단은 진기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구슬을 귀하게 여겨 목이나 귀에 장식으로 달고 다녔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관습이다.

 근래 강원도 동해안과 한강 상류지역에서 1∼3세기 단계의 집자리유적들이 다수 조사되어 동해안 예족사회의 주거형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681)白弘基,≪襄陽郡 柯坪里住居址發掘報告≫(1984).
―――,<原三國時代 村落의 構造와 機能>(≪國史館論叢≫35, 1992).
―――,≪江原嶺東地方의 先史文化硏究≫(江陵大 博物館, 1991), 24∼34쪽.
집의 기본구조는 움집으로 주거면이 땅밑으로 20∼50cm 정도 들어가 있다. 평면 형태는 무문토기시대 이래의 전통을 이은 장방형 집자리와 함께 새로이 呂자형, 凸자형 집자리가 있다.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 주거지유적을 보면 呂자형 집자리는 네모진 두 개의 실내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쪽은 주거 전용공간으로 바닥면이 지하에 있고 다른 하나는 작업공간으로 바닥면이 지상에 있어 비스듬히 경사진 통로에 의해 양쪽이 연결되어 있다. 呂자형 집자리는 실내공간의 기능적 구분이라는 측면뿐 아니라 면적상으로도 이전 시기 주거지보다 크게 확대된 것으로682)안인리 1기층 주거지 면적은 대략 40㎡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의 표준면적인 20㎡보다 크게 넓어졌다고 한다(白弘基, 위의 글, 14쪽). 이를 예족의 특징적인 가옥형태로 간주하려는 견해도 있다.683)朴淳發,<한성백제 기층문화의 성격>(충남대 백제연구소 국제학술회의 발표요지, 1994). 영흥과 안변 등지의 동예의 중심지에서는 아직 이 시대의 전형적인 집자리유적이 조사되지 않아 동해안 예족사회의 공통적인 주거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동해안 예족사회내에서도 이미 지역성이 발생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동예에서는 금기 사항이 많아 사람이 병들거나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곧 새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동해안지역에서 조사된 1∼3세기대의 취락유적들 중에는 불에 탄 집자리가 자주 발견되어 동이전의 기록과 관련지워질 가능성이 있다. 실수로 화재가 났거나 외부의 방화로 취락이 불탔다면 불탄 집자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나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유적의 불탄 집자리 분포 상태를 보면 불탄 집자리끼리 인접해있는 것도 있으나 그 사이에 정상적인 집자리를 끼고 서로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684)白弘基, 앞의 글, 5쪽.
안인리 1기층 呂자형 집자리 중 불탄 흔적이 확인된 1호·2호는 인접해 있으나 28호는 이들로부터 훨씬 떨어져 있다. 그리고 2기층 凸자형 집자리 중에서도 11-2호·27호 집자리가 불탄 집자리로 조사되었으나 양자는 인접해 있지 않다.
그리고 전체 집자리 중에서 불탄 집자리의 수가 의외로 많아(呂자형 집자리의 경우 15기 중 3기) 실수로 인한 화재라기 보다 고의적으로 집을 불태운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동해안의 예족들은 청동기시대 이래 농업을 주된 생산기반으로 하였다. 각 시대의 집자리유적에서 일반적으로 출토되는 반달모양돌칼과 목제농기구를 제작하는 데 쓰는 청동제 도끼와 돌도구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685)白弘基,≪江原嶺東地方의 先史文化硏究≫ Ⅱ (江陵大 博物館, 1992), 16∼99쪽. 그리고 강원도 명주군 안인리 집자리유적에서는 쌀·콩과 같은 탄화된 곡물이 발견되어 잡곡농사와 함께 벼농사도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686)白弘基, 앞의 글, 7쪽. 그리고 10월에는 舞天이라 불리는 祭天행사를 거행하였는데 농경사회의 추수감사제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이는 농작물의 파종을 끝낸 5월과 추수를 끝낸 10월 두 차례에 걸쳐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삼한의 농경의례와 유사한 것으로 생산활동에서 차지하는 농경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풍속이다. 그리고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는 기록도 동예의 생산기반이 농업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자리에서 발견되는 돌로 만든 생활도구 중 돌화살촉의 양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사냥과 고기잡이도 생산활동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責禍라는 풍습에서도 이러한 생산활동의 한 면모가 반영되어 있다. 즉 동예 사람들은 山川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서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산과 내는 목재의 공급, 야생동물의 사냥, 야생열매 채집, 어로활동 등 경제활동의 중요 자원이었다. 그러므로 각 읍락마다 활동구역을 정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았으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 벌로 노비·소·말로써 물어주었으며 이러한 풍습을 책화라고 하였다.

 중국 군현이 선호한 동예의 특산물은 낙랑 檀弓·班魚皮·文豹·果下馬 등이었다. 낙랑 단궁은 고구려 貊弓과 함께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활로 동예에서 만든 것을 낙랑군을 통해 본국에 보낸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반어피는 漢대에는 鰅皮라 하였고 낙랑 동이현에서 생산되는 것이며 神爵 4년(기원전 58)에 이를 잡아 漢의 考工部(기구제작소)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687)李丙燾, 앞의 책, 233∼234쪽.
魏晋代는 班魚皮라 하였으나 隋唐代 이후로 海豹皮라 하였다고 한다.
과하마는 높이 3척의 키가 작은 조랑말로 과수나무 아래에서도 타고 지나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조공을 통한 중국 군현과의 교역 이외에 예는 주변의 다른 세력들과도 물자교역을 하였다. 馬韓·濊·倭가 모두 辰弁韓으로부터 철을 교역해갔다는 기록이 그것으로, 철을 얻기 위해 동해안을 따라 동예인들이 경상도지역까지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동예의 창은 길이가 3仗이나 되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이처럼 긴 철제창이 김해와 울산 등지의 목곽분에서 자주 출토되고 있다.688)김해 양동리 235호분에서는 자루길이 163cm, 창날 길이 64cm의 것이 출토되었고 200호분에서는 길이 198cm의 것이 출토되었다(東義大 博物館,<金海良東里第235號土壙木槨墓 發掘調査槪要>1992. 12, 유인물). 대동강유역의 태성리에서도 장창이 1점 출토된 적이 있으나(길이 128cm) 양적으로 경남지역에서 출토된 것이 훨씬 많아 동예에서 사용하던 장창은 진변한지역에서 교역해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동예에서는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고 하였는데 이는 호랑이를 山神으로 섬기던 원시시대의 풍습이 잔존한 것으로 여겨진다. 檀君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를 토템사상의 반영으로 본다면689)金廷鶴,≪韓國上古史硏究≫(범우사, 1990), 63∼79쪽. 동예의 호랑이 숭배는 고조선의 곰 숭배와 대비되는 것으로 이는 팽이형토기문화 중심권과 공열토기문화 중심권의 문화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동예에서는 같은 씨족내에서는 혼인을 하지 않는 族外婚 풍속이 있었다. 사람을 죽인자는 죽음으로 벌을 받게 하였으며 도둑질하는 자가 적었다고 한다. 이는 고조선의 八條禁法과 유사한 원시사회의 관습법이 일부 잔존한 결과이다.

<李賢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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