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Ⅳ. 동예와 옥저
  •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2) 옥저의 사회와 문화

 옥저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주민들이 거주해 왔으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이래 동북지역 선사문화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특히 무문토기시대의 옥저지역은 공열토기로 대표되는 동북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중요한 분포지였다. 그러나 기원전 4∼3세기경 고조선이 요동지역으로부터 대동강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김에 따라 남옥저지역은 고조선의 세형동검문화와 본격적으로 접촉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미 각 지역별로 대소 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여 옥저의 읍락들을 구성하였다.

 ≪삼국지≫동이전에 동옥저는 인구가 5천 戶라고 하였다. 이는 남옥저의 규모를 말하는 것으로 남북옥저 전체의 인구를 합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정도의 인구 규모는 삼한 각 소국의 평균 호수인 2∼3천 호보다 크며, 낙랑군 또는 동예 각 현의 평균치인 3천여 호보다도 큰 편이다.715)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一潮閣, 1984), 120쪽. 5천여 호의 주민들은 여러 개의 읍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삼한지역을 참고로 읍락의 평균 호수를 5백여 호로 잡으면 적어도 옥저에는 10여 개의 읍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함흥지역에는 1∼3세기대의 옥저의 읍락 상태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유물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옥저의 읍락들은 기원전 3∼2세기 이래 형성되어온 각 지역별 정치집단이 성장 발전한 것이므로 당시의 지배자가 소유하였던 무기와 儀器 자료를 통해 읍락의 대략적인 분포상태를 추론할 수는 있다. 앞의<표>에서 보듯이 청동기, 철기유물의 출토량이 많고 분포가 밀집된 곳은 함흥만으로 흘러드는 성천강 하류의 함흥시와 함주군 일대이다. 이 지역에 분포한 유적들은 모두 남옥저를 구성한 중요 읍락으로 특히 유물의 질량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곳은 이화동유적이다. 이화동유적으로부터 500∼800m 거리에 치마동과 지장동유적이 있어 이화동을 포함한 이 일대에 부조현치가 두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함흥시 서쪽 8㎞ 지점의 함주군 대성리, 서북쪽 8㎞ 지점의 함주군 조양리 등 성천강 서쪽에도 읍락이 분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함흥지역에서 해안을 따라 동북쪽으로 20여 ㎞ 떨어진 락원군(퇴조) 송해리,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30여 ㎞ 이상 떨어진 북청군(신창) 하세동리 등지에도 읍락들이 분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옥저는 위만조선에 복속된 이래 한군현과 고구려 등 주변 강대세력의 지배를 받아 왔으므로 내부적으로 강력한 정치권력이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3세기 중반경에도 여러 읍락들을 통합하여 다스리는 大君王은 없었고 각 읍락마다 대대로 독자적인 통치자가 있었다. 각 읍락의 우두머리들은 스스로 三老라고 불렀는데 이는 군현 통치시대의 유제를 이은 것이다. 군현 설치 초기의 사정은 잘 알 수 없으나 기원전 1세기 후반경 부조현에는 낙랑군으로부터 縣長이 임명·파견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평양시 낙랑토성 근처에서 발견된 貞柏洞 2호 무덤이 그것으로 이 무덤의 주인공은 夫租縣長을 지냈던 高常賢의 무덤으로 밝혀졌다.716)≪고고학자료집≫6(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17∼25쪽. 고상현묘에서는 永始 3년(기원전 14)에 만들었다는 글씨가 쓰여진 일산대와 ‘夫租長印’이라 은상감한 백동도장 1개와 ‘高常賢印’이라고 새겨진 銀印이 들어 있어 무덤 주인공의 직위와 성명 및 활동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이 무덤은 漢의 木槨墳계통의 무덤양식을 따르고 한식 유물이 많이 부장되어 있는 등 한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함께 부장된 세형동검과 동검자루장식 그리고 토기의 조합상(화분형토기와 배부른단지)은 위만조선 지배계급의 문화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낙랑군지역에 남아 있는 목곽분 주인공의 출신에 대해서는 토착 조선인설,717)孫秉憲,<樂浪古墳의 被葬者>(≪韓國考古學報≫17·18, 1985), 10쪽. 토착 漢人說718)三上次男,<樂浪郡社會の支配構造>(≪朝鮮學報≫30, 1964), 19∼25쪽. 등 견해가 다양하다. 이와 달리 한 정부는 武帝 사후 토착세력을 지배기구 속으로 편입하여 군현지배체제를 유지한다는 방침하에 평양지역 내에 있던 토착 지배세력을 선발하여 부조현의 長으로 파견함으로써 ‘以夷治夷策’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719)尹龍九,<樂浪前期 郡縣支配勢力의 種族系統과 性格>(≪歷史學報≫126, 1990), 38쪽. 이처럼 고상현을 평양지방의 위만조선 지배계급 출신으로 본다면 부조현장이 세형동검과 화분형토기 세트를 부장하고 그의 무덤이 평양에 만들어진 배경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의 부조현 통치와 관련하여 주목되어 온 다른 하나의 자료는 고상현묘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夫租薉君墓(정백동 1호무덤)이다.720)리순진,<부조예군무덤에 대하여>(≪고고민속≫1964-4). 이 무덤에서도 ‘夫租薉君’이라 새겨진 은제 도장과 한의 철기, 그리고 위만조선 지배계급의 무덤에서 흔히 나오는 세형동검·동모·청동제 수레부속과 화분형토기 세트 등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은 기원전 1세기 후반경의 무덤이며,‘부조예군’ 인장은 한정부가 무덤 주인공을 夫租邑君으로 봉하면서 함께 준 것이다. 그런데≪삼국지≫동옥저조와 예조 기록에 의하면 한이 예족사회의 지배자들을 侯로 봉한 것은 동부도위 폐지(기원후 30) 이후 각 현을 후국으로 봉하면서 행한 조처였다. 그러므로 도위 폐지 이전의 읍군의 위상 즉 부조현의 통치책임자인 夫租縣長과 夫租邑君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에 대해 후와 읍군은 郡內·郡外를 막론하고 이민족의 수장에게 부여된 것이므로 군현체제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721)權五重,≪樂浪郡硏究≫(一潮閣, 1992), 50쪽. 만약 지방관인 부조현장이 파견된 상태에서 토착 수장을 읍군으로 봉하였다면 읍군의 기능과 통치범위가 문제이다. 이 경우 두 가지 가능성을 설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일반 읍락의 수장은 삼로로 임명하고 일반 읍락보다 규모가 큰 읍락의 수장은 읍군으로 봉하였으며 縣治가 있던 대읍락에는 현장이 파견되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현치가 있는 중심 읍락의 거수를 읍군으로 봉하고 여기에 현장이 함께 파견된 경우이다. 이 때 현장은 현내의 전체 읍락들을 통괄하고 현치가 있는 중심 읍락은 읍군이 다스리는 구조가 되거나 아니면 읍군은 현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722)吳永贊,<樂浪郡郡縣支配의 成立과 構造>(서울大 國史學科 碩士學位論文, 1995), 45쪽.

 그러나 양자가 공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적으로 縣長의 파견은 토착민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고 읍군은 책봉과 조공을 통한 간접적인 통제 방식으로 지방관 파견보다 강도가 훨씬 약하다. 그러므로 기본 성격상 현장과 읍군이 같은 지역을 대상으로 함께 통치에 참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덤양식과 부장유물의 형식상으로도 부조예군묘가 고상현묘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그러나 유물의 질량면에서는 양자가 거의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부조읍군은 부조현장 못지 않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누리던 인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도위 폐지 이전 시기에 현장 대신 읍군을 봉한 적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군현의 대토착민 통치가 이완된 시기의 조처일 것이다. 예컨대 한이 현도군을 만주쪽으로 옮기고 낙랑군 동부도위를 설치한 후 동해안 예족사회에 대해 다시 안정된 통치기반을 확립해나가는 과도기에 현장 파견 대신 읍군을 책봉한 일정 시기를 상정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인장의 印文상의 특징을 근거로 부조예군을 조공을 매개로 하는 일반 外臣과는 다른 外臣과 內臣의 중간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723)內臣인 경우는 漢이란 글자를 표시하지 않고 外臣인 경우 ‘漢某王之印’으로 구성된다고 한다(金基興, 앞의 글, 9쪽 및 栗原朋信,≪秦漢史の硏究≫, 1960, 220∼288쪽). 실제 동부도위 설치 초기의 낙랑군은 朝鮮縣내의 토착세력의 반발을 억압·회유하는 데 고심하고 있었으므로 동부도위 소속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를 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724)동부도위 설치를 기점으로 대토착민 정책이 강화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나(金基興, 위의 글) 이에 대해서는 都尉지배체제가 군현지배체제보다 한 단계 이완된 지배체제라는 일반적인 이해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吳永贊, 앞의 글, 45쪽). 그러므로 부조예군묘의 주인공은 이같은 정치적 배경하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밖에도 부조예군묘에 대해서는 부조예군의 관작을 받은 인물이 함흥지역이 아니라 평양에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의문이다. 이에 대해 부조지역 주민들의 저항으로 평양에 쫓겨왔다는 해석과725)도유호,<왕검성의 위치>(≪문화유산≫1962-5), 61쪽. 한의 군현통치 강화과정에서 부조지역 토착세력의 우두머리를 평양으로 이주시킨 것이라는 상반된 견해가 있다.726)金基興, 앞의 글, 30쪽. 이러한 의문 역시 군현의 대토착민정책의 변화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고상현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기원전 1세기 후반경 한의 군현 통제방식은 토착 지배계급을 군현지배체계의 일부로 끌어들여 縣長으로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토착화의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漢式 유물의 출토량과 빈도에서 나타나듯이 군현 설치 이외의 지역인 辰弁韓지역에서도 기원전 1세기 후반대에 이르면서 한의 대토착민 접촉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의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기원후 30년 동부도위의 폐지로 부조현은 侯國이 되었고 토착지배자들은 侯·邑君 등으로 봉해지면서 자치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20여 년이 경과한 후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부조현의 지배자들은 고구려 관직인 使者에 임명되어 고구려 大加의 지시를 받았다. 대가는 조세 수납과 布·물고기·소금 이외에도 각종 해산물들을 바치도록 요구하고 미인을 징발하여 노비나 첩으로 삼았다.≪삼국지≫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옥저인들을 奴僕처럼 대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옥저인들이 고구려의 집단예속민으로 전락된 상태를 보여준다.

 옥저의 주된 생산기반은 농업이었다. 지형이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고 있었으므로 해안지역에서는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五穀이 잘 자란다고 하였다. 북옥저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잡곡농사가 행해졌던 흔적이 있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탄화된 기장과 수수가 발견되었고, 북옥저의 주거지로 비정되는 흑룡강성 東寧縣 團結住居址 유적(77F5)에서도 탄화된 粟이 발견되었다.727)匡 瑜, 앞의 글, 28쪽;≪黑龍江省文物考古三十年主要收獲≫.≪삼국지≫弁辰조에 五穀과 稻가 잘 자란다는 표현에 나타나 있듯이 오곡 중에 벼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옥저의 장례 풍속에 나오는 쌀의 기록을 통해 잡곡농사 이외에 벼도 일부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와 말이 적고 창을 가지고 步戰을 잘 하며 음식과 주거·의복·예절이 고구려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청동기문화 단계에서는 동북지방과 압록강 중류유역은 각각 공열토기와 公貴里토기문화의 중심지로서 개성있는 지역문화를 형성하고 있었고,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 와서도 함남지방은 압록강유역과 달리 대동강유역의 고조선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3세기경 중국인에 의해 관찰된 의식주 생활상의 이같은 유사성은 고구려 복속하에서 진행된 동화현상의 결과로 생각된다.

 두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기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장례 풍속과 혼인 풍속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옥저에서는 길이가 10여 仗이나 되는 큰 나무곽을 만들어 한 쪽에 문을 만들어 두었다가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하여 살이 다 썩으면 뼈만 가려 槨 속에 안치한다고 하였다. 곽은 가족 공용이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나무로 사람의 모습을 새겨두고, 질그릇 솥에 쌀을 담아 곽의 문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이는 압록강 중류 및 혼강·독노강유역에 분포된 강돌을 쌓아 만든 돌무지무덤과는 대조를 이룬다. 옥저의 혼인 풍속은 신랑의 집에서 혼인을 약속한 여자를 데려다 장성하도록 기른 후 며느리로 삼는 민며느리제(預婦制)였다.728)金斗憲,≪韓國家族制度硏究≫(乙酉文化社, 1949). 여자가 성인이 되면 본가에 다시 돌아와 신부의 가족들이 신랑집에 돈을 요구하고 돈이 지불된 후 신랑집으로 다시 돌아 갔다고 한다. 이러한 혼인 풍속은 신랑이 혼인 후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여자의 집에 와서 함께 지내면서 각종 댓가를 치르도록 하는 고구려 壻屋制(데릴사위제도)와는 다르다.

 중국 흑룡강성 동녕현에서는 북옥저인들의 주거생활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인 團結주거지(77F1)는 실내면적이 70㎡, 깊이 35cm 정도의 장방형 반수혈식 주거지로 주춧돌을 사용하여 기둥을 세웠다. 실내 서벽 남쪽 모서리에는 부뚜막과 아궁이가 있고 서벽에서 북벽으로 벽을 따라 난방시설(火墻)이 마련되어 있다. 이는 흙으로 벽을 쌓고 위를 돌로 덮은 길이 11m, 폭 50cm, 높이 30cm 가량의 터널 형태의 시설로 團結문화 즉 북옥저인들의 주거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729)匡 瑜, 앞의 글, 28쪽. 그리고 龍井현 등지에서는 高山 취락지가 조사되고 있어 “북옥저인들은 挹婁인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산속 바위굴에서 지내고, 뱃길이 통하지 않는 겨울철이 되어서야 마을에 내려와 살았다”고 하는≪삼국지≫의 기록과 부합한다고 하겠다.730)李 强, 앞의 글, 6쪽.

 함경도지역에서는 아직 단결유적과 비슷한 주거지유형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함경남도 동해안 일대에 분포하는 금야-토성리형문화는 단결유적보다 연대가 앞서는 주거지유적이기는 하나 이는 두만강유역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는 구조가 다르며 오히려 대동강·재령강유역의 팽이형토기 주민들의 집기둥 배치와 같다고 한다.731)≪우리나라 원시집자리에 관한 연구≫(사회과학출판사, 1975), 157∼158쪽. 그러므로 북옥저와 남옥저의 주거생활의 비교는 앞으로 금야-토성리형문화를 계승한 시기의 주거지유적들이 조사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읍루·肅愼족과 다른 북옥저 고유의 문화성격을 구체적으로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李賢惠>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