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1. 삼한의 정치와 사회
  • 1) 진국과 삼한

1) 진국과 삼한

 三韓은 馬韓·辰韓·弁韓을 뜻하며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있던 정치집단들을 말한다. 삼한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3세기 후반 晋의 陳壽가 편찬한≪三國志≫魏書 東夷傳이며(이하≪삼국지≫동이전으로 약칭함), 여기에는 漢 이후 3세기 전반까지의 한반도의 사정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삼한과 함께 한반도 북으로는 高句麗가, 서북지역에는 樂浪郡·帶方郡 등 중국의 군현이, 동북지역에는 東濊·沃沮와 같은 정치집단들이 있었다. 삼한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崔致遠이 삼한을 삼국에 비정한 이후 조선 초기 權近 등의≪東國史略≫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삼한=삼국설에서 벗어나지 않았다.732)崔致遠은 마한을 고구려, 진한을 신라, 변한을 백제지역으로 비정하였고(≪三國史記≫권 46, 列傳 6, 崔致遠),≪東國史略≫에서는 마한을 백제, 변한을 고구려, 진한을 신라지역에 비정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韓百謙(1552∼1615)이≪東國地理誌≫에서 마한을 경기·충청·전라지역에, 진한과 변한을 경상도지역에 비정한 이래 조선 후기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이 설을 따랐다. 이후 진한을 경기도 일대에 비정하는 새로운 설이 나오기도 하였으나733)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1976), 261∼267쪽.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백겸의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삼국지≫동이전 韓條에는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모두 합하여 78개의 國名이 실려 있다. 삼한의 국들은 이전에는 部族國家라고 불러 왔으나 이는 신석기문화 단계의 사회집단을 뜻하는 ‘부족’과 발달된 사회 단계의 조직적인 정치체를 뜻하는 ‘국가’라는 서로 상치되는 개념의 부자연스러운 결합이어서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734)金貞培,≪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高麗大 出版部, 1986), 47∼55쪽. 80년대 후반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삼한의 각 국들이 다수의 읍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근거로 邑落國家로 칭하자는 견해도 있고, 土城이나 木柵으로 둘러싸인 도시국가와 같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서 城邑國家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735)千寬宇,<韓國史의 潮流>4, 南北의 古代國家(≪新東亞≫1972년 9월호), 226∼228쪽.
李基白,<高句麗의 國家形成 問題>(歷史學會 編,≪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一潮閣, 1985), 85∼95쪽.
이와 달리 이들을 국가 성립 이전 단계의 정치집단으로 간주하여 chiefdom(君長社會, 酋長社會, 族長社會 등으로 번역되고 있음)이라는 정치인류학적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다.736)金貞培, 앞의 책, 195∼209쪽. 또는 삼한의 국들은 삼국시대의 국에 비해 영토나 인구의 규모가 훨씬 작다는 의미에서 小國이라는 편의적 용어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집단의 크기를 大小로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일 뿐 아니라 대소의 구분만으로는 정치집단의 성격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정치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小國은 부적합하다는 비판이 있다.

 삼한의 국들은 모두 청동기문화 단계 이래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토착사회가 성장 발전한 것으로 삼한의 성립은 삼한을 구성하는 각 소국이 성립되는 시기와, 지역별로 소국들이 연맹체를 형성하여 마한·진한·변한으로 분립되는 시기로 나누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의 토착집단을 韓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불확실하다. 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의 準王이 南走하여 韓地에 거주하고 스스로 韓王이라고 했다는≪魏略≫의 기록을 근거로 준왕 남주 이후부터 중남부지역이 한으로 칭해졌다는 설이 있으나 의문이 없지 않다.≪史記≫朝鮮傳에 眞番 곁에 있던 辰國이737)流行本≪史記≫에는 ‘衆國’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百衲本≪사기≫에 ‘辰國’으로 표기된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사기≫판본 연구를 통해 宋代까지의≪사기≫는 진국으로 기록되어 왔으나 이후 오류가 발생하여 衆國으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는 고증이 있다. 이처럼 진국의 명칭이 최초로 나오는 곳은≪사기≫朝鮮列傳이다. 그러나 유행본≪사기≫를 따라 衆國을 취하고 진국이라는 단일한 정치집단 대신 다수의 정치집단을 상정하는 이른바 衆國說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사기≫와는 사료 계통과 내용을 달리하는≪魏略≫과≪三國志≫동이전에도 분명 진국의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진국이 바른 표기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중국 漢나라와 직접 통교하고자 하였으나 衛滿朝鮮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어,738)≪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기원전 2세기경에는 서북지방의 위만조선과 함께 중부 이남지역에는 진국이라는 정치집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삼국지≫동이전에 인용된≪위략≫의 기록에는 위만조선이 멸망하기 이전 朝鮮相 歷谿卿이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인 右渠와 뜻이 맞지 않아 동쪽 진국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2세기경 중남부지역의 저명한 정치집단으로서 진국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런데 진국의 이름은 기원전 2세기 말 위만조선의 멸망과 漢郡縣의 설치라는 서북한지역의 정치적인 파동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그 대신 중부 이남지역의 정치집단들은 韓으로 불려지고 있다. 後漢 光武帝 建武 20년(기원후 44) 廉斯人 蘇馬諟를 ‘韓廉斯邑君’으로 봉했다는 기록이739)≪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韓. 있어 이미 韓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국과 韓의 관계에 대해≪삼국지≫동이전에는 ‘진한은 옛 진국’이라 한 데 비해≪後漢書≫동이전에는 ‘삼한이 모두 진국에서 발전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연구자의 논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임의적으로 선택되고 있다.740)예컨대 진국을 부인하고 衆國說을 취할 경우≪후한서≫의 기록이 논리에 더 적합할 것이며,≪조선전사≫처럼 진국을 구성한 단위집단이 삼한 70여 소국이라는 주장도≪후한서≫의 기록을 취한 결과이다. 그러나≪후한서≫의 기록은 진국의 영역을 중남부 전역에 걸친 것으로 이해한 데서 온 오류이며,≪삼국지≫에서 진국을 진한과 연결지은 것은 ‘辰’이라는 글자의 공통성에 덧붙여 진국의 방향이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다는 것과 진한이 마한의 동쪽에 위치한다는 방향의 공통성을 토대로 史書 편찬과정에서 찬자가-≪위략≫찬자인지≪삼국지≫동이전 찬자인지는 불확실하나-내린 추론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고고학 자료상 중부 이남지역은 진국에서 한이라는 명칭의 변동에 관계없이 細形銅劍文化 단계 이래의 주민과 문화가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진국에서 한으로의 명칭 변화가 진행되는 기원전 2세기 말에서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철기문화가 급격히 확산되는 변화가 있으나 삼한사회는 기본적으로 세형동검문화 단계의 주민과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므로 진국에서 한으로의 변화 과정에서 진국과 연관지워질 수 있는 것이 진한인지, 마한인지 아니면 삼한 전체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삼한의 기본 성격을 이해하거나 성격지우는 데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진국이라는 정치집단의 해체와 한의 각 소국의 출현을 어떠한 과정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진국이 존속했던 기원전 2세기의 중남부지역은 세형동검문화가 발달했던 단계이다. 철제 도끼와 끌 등의 철기 완제품이 일부 사용되고 있으나 아직도 철기의 사용은 제한적이었으며 무기와 儀器 및 공구의 주된 재료는 여전히 청동이었다. 그러므로 진국은 청동무기 못지 않게 청동거울과 청동제 방울 등을 권위의 상징물로 소중하게 여기고 물리적인 힘보다 제사장의 권위와 능력을 권력의 주요 토대로 삼고 있는 이른바 제정일치적인 사회 단계에 있었으며, 진국은 제정일치 단계의 족장들에 의해 통솔되는 다수 정치집단들의 집합체로 파악된다. 이 시기 중남부지역내에서 청동유물과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곳은 금강과 영산강유역이므로741)國立中央博物館,<靑銅遺物關係資料>(≪韓國의 靑銅器文化 特別展≫, 汎友社, 1992), 150∼154쪽. 진국의 지리적 위치 역시 충남과 전라도지역 일대에 비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말엽부터 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철자원 개발과 철기의 제작 보급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서북한지역의 정치적 변동으로 상당수의 유이민들이 중부 이남지역으로 들어 오게 된다. 이로 인해 청동기의 제작과 관리 및 교역의 중심지로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진국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철자원이 풍부한 경상도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경제적 구심점이 형성되면서 중부 이남지역 토착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정치·문화적인 변화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역에 따라 시간적인 선후의 차이가 있고, 소국이 형성되는 직접적인 계기 역시 다양하였을 것이나, 70여 개 개별 정치집단으로서의 삼한 소국의 성립은 이같은 한반도 전체의 정치·문화적 변동과정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평균적으로 마한지역이 진한과 변한지역에 비해 인구도 많고, 세형동검문화 단계에서는 정치·문화적인 발달 정도도 선진적이었다. 금강과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정치적인 권위와 경제적인 부의 상징인 청동제품들을 다량으로 부장하는 분묘유적들이 집중 분포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마한 소국들 중에는 한강유역의 백제국과 같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나, 상당수는 기원전 3∼2세기경 충남과 전라도지역에 성립되어 있었던 정치집단들이 진국의 해체 이후에도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여 마한의 중요 소국으로 존속 발전해간 것으로 볼 수 있다.742)李賢惠,≪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一潮閣, 1984), 37∼47쪽. 이에 비해 경상도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서부터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량의 철기를 부장하는 土壙木棺墓유적들이 급격하게 증대되면서 새로운 정치권력의 형성과 계층분화 현상을 시사한다. 특히 경주·대구·김해 등지에서 집중 출토되는 이 시기의 금속제 유물들은 이전 단계와 다른 새로운 정치·문화적 상황의 전개를 반영하기에 충분한 자료들이다.743)崔鍾圭,<慶州市朝陽洞遺蹟發掘調査槪要とその成果>(≪古代文化≫35, 1983), 353∼363쪽.
林孝澤,≪洛東江下流域 加耶의 土壙木棺墓硏究≫(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3), 8∼34쪽.

 삼한 소국의 성립 과정을 개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으나 백제·신라·가야 각국의 건국설화를 분석하거나 고고학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소국 형성의 유형을 일부 추론할 수는 있다. 진한의 맹주격인 斯盧國의 형성에 대해서는≪三國史記≫와≪三國遺事≫에 기원전 57년 6村의 촌장들이 모여 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徐那伐이라 하였다는 건국설화가 실려 있다. 변진의 拘邪國에 대해서도≪삼국유사≫의 駕洛國記에 기원후 42년 9干 즉 9명의 족장들이 모여 首露를 왕으로 추대하고 가락국을 세웠다는 건국설화가 전해진다. 문헌 기록에 나오는 사로국과 구야국의 건국 연대를 그대로 받아 들이기보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라는 대체적인 시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이같은 연대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고고학 자료상의 새로운 변화 추세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미 알려진대로 고고학계에서는 경남 義昌郡 茶戶里유적과 경주 朝陽洞 38호분을 기준으로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부터 기원후 1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를 原三國時代(김해문화, 삼한시대)의 첫 단계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744)李健茂 外,<義昌茶戶里遺蹟發掘進展報告(1)>(≪考古學誌≫1, 1989), 53쪽.
崔鍾圭,≪三韓社會에 대한 考古學的 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117쪽.

 마한 백제국의 형성에 대해서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 기원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민인 溫祚가 10臣의 補翼을 받아 十濟를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한강 하류지역에서는 아직까지 문헌 기록과 대비하여 고찰할 만한 이 단계의 고고학적 자료의 축적이 부족하다. 신석기시대 이래 상당수의 주민들이 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거주해왔음은 여러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입증된다.745)權五榮,<初期百濟의 성장과정에 관한 일고찰>(≪韓國史論≫15, 서울大, 1986), 8∼11쪽. 그리고 질량면에서 금강과 영산강유역에 비해서는 크게 뒤떨어지지만 중랑천·성내천·안양천 등 한강 하류의 지류 부근에서 출토되는 소량의 청동유물들은 기원전 3∼2세기경 다수의 소규모 정치집단들이 이곳에 성립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철기가 널리 확산되는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한강유역 각지에서도 철기 유물을 내는 집자리 유적들이 빈번히 발견되고 있어, 철기문화의 확산이 백제국 출현의 사회·문화적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46)權五榮, 위의 글, 57∼59쪽. 물론 경상도지역에 비해 3세기 이전 단계의 墳墓나 방어시설 등 백제국의 형성과 건국 주체세력의 出自를 뒷받침할 만한 직접적인 자료의 발견은 아직 미흡하다.747)백제국의 토성유지로 추정되는 夢村土城의 上限연대도 현재까지의 조사로는 기원후 3세기를 더 올라가지 못하며, 石村洞·可樂洞 일대에서 조사된 분묘유적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李賢惠,<3세기 馬韓과 伯濟國>,≪百濟의 中央과 地方≫忠南大 百濟硏究所, 1997, 9∼11쪽). 앞으로 漢江 남쪽으로 옮기기 이전의 백제국 최초의 중심지가 어디였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 한강 북쪽 경기도 일대의 유물·유적에 대한 조사자료가 축적된다면 백제국 성립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백제국 성립의 정치·문화적 배경 역시 중남부지역의 전반적인 발전 추세속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소국 성립을 이같은 시간적·문화적 배경하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변화라고 한다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삼국지≫동이전에는 “國邑에는 主帥가 있으나 邑落들이 雜居하여 서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고 하여 삼한의 각 국은 국읍과 다수의 읍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國’은 지배적인 邑을 뜻하므로 국읍이란 다수의 읍락들 중에서도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는 대읍락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삼한의 각 국은 대소의 읍락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이라 하겠다. 그런데 진한 사로국과 변진 구야국, 마한 백제국의 건국설화에는 6村長과 9干, 10臣 등이 모여 각 국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어 이들이 통솔하는 집단이 바로 소국을 구성한 읍락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읍락은 소국 형성 이전부터 각지에 성립되어 있었던 개별적인 정치집단들로 6촌장 설화 등을 통해 볼 때 이들은 청동기문화 단계의 族的 결합원리와 정치형태에 바탕을 둔 집단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삼한 각 소국의 성립은 이러한 소규모 집단들이 철기문화의 확산과 유이민의 이동이라는 정치·문화적 변화에 대응하여 地緣에 바탕을 둔 보다 확대된 정치집단으로 통합 발전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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