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 소국의 정치적 성격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국의 구성단위인 읍락과 이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삼국지≫동이전에는 주민이 거주하는 취락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國邑·邑落·小別邑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국읍은 소국의 중심되는 읍락을 뜻하며 규모가 크거나 일반 읍락과 구별되는 기능을 일부 발휘하고 있다. 소별읍은 소국의 일부로 통합되지 않고 독립된 정치집단으로 존속하고 있었던 개별 읍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진지역에는 동이전에 기록된 12국 이외에도 이러한 소규모의 독립적인 정치집단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국읍과 소별읍 등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사회적 구성이나 조직 원리면에서는 일반 읍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읍락이란 대규모 주민거주지인 邑과 촌락의 뜻인 落의 복합어라는 해석도 있고≪삼국지≫동이전의 읍락의 용례 중에는 단순히 일반 취락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동이전의 읍락은 단순한 자연촌락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삼한 소국을 구성한 대소 읍락들의 개별적인 규모를 추정해보면 각 소국의 규모가 서로 다르듯이 읍락 역시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의 국들은 규모가 큰 것이 1만여 家 작은 것이 수천 가로 총호수가 10여 만 호이고, 진변한의 국은 큰 것이 4∼5천 가, 작은 것이 6∼7백 가로 총호수가 4∼5만 호라고 한다. 이 가운데서 사로국과 구야국의 경우 진변한 소국들 중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했을 것이므로 4∼5천 가를 6촌으로 나누면 평균 6백∼8백 호가 되고 이를 9간으로 나누면 4백∼6백 호가 된다. 그리고 백제국의 경우, 마한의 국들은 큰 것이 1만여 가, 작은 것이 수 천 가라 하였으므로 이를 10臣으로 나누면 1천여 가 또는 수백 가가 된다. 규모의 크고 작음은 통합된 읍락수의 많고 적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이같은 평균적 계산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읍락의 일반적인 규모를 5백 호 이상 1천 호 미만으로 추정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다. 이 정도 규모의 집단이라면 단일한 자연촌락과는 구별되어야 하며 오히려 다수 취락군으로 이루어진 집단을 상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읍락은 자연촌락과는 달리 정치·경제적으로 통일적인 기능을 발휘하던 개별 집단이었다. 신라 건국설화에 의하면 사로국을 구성한 6촌에는 각 촌별로 시조가 있다. 그러므로 읍락의 구성원은 동일한 시조의 후손이라는 의제적인 혈연의식으로 결합되어 있었으며 읍락의 통치자는 족장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읍락은 독립된 통치자를 세우고 있었으며 이를 沃沮와 東濊에서는 삼로, 삼한에서는 邑借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읍락은 경제활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활동이 보장되는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동예에서 읍락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 사람·소·말 등으로 변상했다고 하는 責禍의 풍습이74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읍락의 공동체적 성격을 반영하여 읍락공동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 소국들이≪삼국지≫동이전에 고유한 국명을 가진 정치집단으로 열기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국읍을 중심으로 단일한 지배자를 세우고, 대외적으로 통합된 정치체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국의 정치 형태는 각 읍락들을 통할해 나가던 국읍의 통치기능을 통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국읍 主帥는 臣智 등으로 불려졌으며 유력한 소국의 신지들은 각종의 優號를 붙여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기도 하였다.749)≪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국읍 통치자가 발휘하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경제적인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한군현의 설치, 철자원의 개발, 농업생산력의 증대 등으로 각지의 정치집단들간에 교역 활동이 활발해지고, 이전 시기에 비해 교역 대상과 교역품의 내용도 훨씬 다양해졌다.750)李賢惠,<三韓의 對外交易體系>(≪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36∼48쪽. 이러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여 토착집단들은 효율적인 교역의 수행과 교역품 관리를 위해서 조직적인 기구를 필요로 하였다. 그 결과 읍락단위의 소규모 활동보다는 여러 읍락을 대표하여 국읍의 주수가 각종의 대내외 교역활동을 주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읍락들을 결속시키고 국읍 주수의 통치기반을 유지시켜주는 중요 작용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집단간의 무력 항쟁과 이에 대한 공동 방어라는 측면이 고려될 수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에 외적이 침입할 경우 6部兵이 출동하여 이를 막아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751)≪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南海次次雄 11년 및 권 2, 新羅本紀 2, 奈解尼師今 14년. 6부병이란 각 읍락의 족장들이 거느린 병력이며≪삼국사기≫의 기사는 유사시에 국읍 주수의 통솔하에 읍락의 족장들이 각각의 군대를 이끌고 공동 대응하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집단간에 긴장관계가 조성되면 무기가 발달하고 역으로 무기의 발달이 집단간의 무력 항쟁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진변한지역의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는 기원전 1세기 이래 이미 다량의 무기가 부장될 뿐 아니라 2세기 말엽 이후가 되면 전체 부장 유물 중에서 무기의 비중이 더욱 커진다. 마한의 무기들 역시 진변한과 같다고 하였으므로 유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무기의 발달 정도는 진변한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집단간에 무력 경쟁이 상존하면 위협에 대비한 방어 시설이 나타나게 되는데≪삼국지≫한조의 기록에도 성곽의 존재와 성곽 축조광경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의 성곽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것이었는지 또는≪삼국지≫기록대로 마한에는 성곽이 없고 진변한에만 있었는지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다. 그러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해 삼한 각지에서 취락 주변에 설치된 木柵과 環濠유적들이 확인되고 있어 방어 시설의 구체적인 모습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요컨대 무기의 발달과 방어 시설의 출현은 소국간에 무력 경쟁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읍락간의 결속을 다지고 국읍 주수의 통치기능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국읍이 읍락들을 통솔해 나가던 다른 하나의 통합기반은 제천의식의 거행이다.≪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에서는 귀신을 믿었는데 각 국읍이 한 사람의 天君을 세워 天神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고 한다. 국읍에서 거행한 제사의식을 祭天이라고 표현한 것은 제사 내용이 중국의 제천의식과 같다는 뜻은 아니며, 이 제사의식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중국의 제천의식과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이 제사의식의 목적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국읍의 주도하에 초읍락적인 신을 제사지냄으로써 읍락간의 결속을 다짐하고 이로써 국읍 주수의 정치권력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것이라고 하겠다.752)제천행사는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러 초부족적인 신으로 등장하는 것이므로 삼한에서는 아직 제천행사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杜珍,<三韓別邑社會의 蘇塗信仰>, 歷史學會 編, 앞의 책, 104∼106쪽). 물론 삼한의 정치적 지배자는 이미 제사장의 권위를 이용한 정치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세속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제정분리의 사회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고 국읍 주수의 권력기반은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富와 군사력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국 성립 초기 단계에는 읍락별 독자성은 여전히 강한 반면 국읍과 읍락의 상대적인 세력 격차는 크지 않아 소국의 정치적 통합력은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읍에는 主帥가 있으나 읍락이 雜居하여 잘 통제하지 못한다”는 상태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사로국 초기 단계의 6촌간의 상호관계를 반영하는 사료로≪삼국사기≫신라본기에 悉直谷國과 音汁伐國 사이의 분쟁 해결을 위해 사로국의 婆娑尼師今이 김해 구야국의 首露王을 중재자로 초대하고 6부의 장들을 모이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漢祇部와 수로왕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고 이에 대하여 수로왕이 奴耽下里에게 한기부의 長을 벌할 것을 명령하고 돌아 갔다는 기사가 있다.753)≪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婆娑尼師今 23년. 여기서 주목되는 내용은 한기부라는 사로국을 구성하는 읍락이 대외문제에 있어서 개별적인 견해를 가지고 독자적인 대응을 하고 있으며, 구야국과 한기부의 충돌에 사로국 국읍 주수에 해당하는 婆娑尼師今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설화적인 윤색이 가해진 기록이기는 하나 이는 초기 단계의 삼한 소국의 정치권력의 한계와 읍락집단의 상호 관계를 반영하는 좋은 예라고 여겨진다.
국읍 또는 각 읍락간의 상대적인 세력 격차나 분포 상태 등을 고고학 자료를 통해 확인하려면 일정한 영역내에서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던 유물과 유적들을 서로 비교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유물과 유적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고 유적의 종류도 분묘에 집중되어 있어 취락집단의 크기나 구성에 대한 비교 검토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활용 가능한 분묘 자료의 비교를 통해서도 부족하나마 읍락간의 상대적인 차이가 발견되며, 특히 칠기와 같은 사치품의 양을 통해서도 국읍의 상대적 우세가 인정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상도지역의 분묘군을 분묘의 크기와 부장품의 구성을 기준으로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연구가 있는데754)崔鍾圭, 앞의 책, 88쪽. 이 가운데서 의창 다호리유적과 같이 우수한 부장품이 들어 있는 소수 지배자의 무덤뿐 아니라 분묘군 전체의 평균적 물량 수준이 다른 집단보다 우세한 것을 국읍 소재지로, 소수의 분묘는 여전히 우수한 부장품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대부분의 분묘는 부장품의 질과 양이 현저하게 빈약한 것을 일반 읍락의 소재지로 비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 읍락 소재지의 예로 김해 良東里와 경주 朝陽洞유적을 들고 있는데 조양동유적에서는 조사된 토광목관묘의 대부분이 소량의 토기와 철기로 구성된 단순한 부장상을 보이는 데 비해, 38호분만이 예외적으로 前漢鏡을 4매나 부장하고 있다. 양동리유적 역시 토광목관묘 단계에서는 읍락의 장으로 추정되는 55호분과 같은 소수의 분묘만이 우수한 부장품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부장품이 빈약하다.755)林孝澤, 앞의 책, 21∼26쪽. 이에 비해 다호리분묘군은 유물의 질과 양이 전체적으로 조양동이나 양동리유적보다 우수할 뿐 아니라 1호분의 경우 칠기와 같은 다량의 사치품이 부장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적 권위와 대외 교섭의 척도로 간주될 수 있는 漢鏡과 같은 수입품이 국읍으로 간주되는 다호리 1호뿐 아니라 일반 읍락으로 추정되는 김해 양동리나 조양동 38호에서도 마찬가지로 출토되고 있어, 정치적 권위나 대내문제에 있어서는 읍락의 통치자도 국읍 신지 못지 않게 여전히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756)근래 정치체의 성장과정이라는 관점에서 경상도 지방의 분묘군들을 다각적 측면에서 분석한 결과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대까지도 분묘의 입지와 분묘의 규모면에서는 상하의 위계화된 질서가 아직 관찰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다호리 1호분은 다른 분묘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1호분을 중심으로 다른 분묘들이 모여 있지도 않으며 분묘의 규모도 특별히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들어 1∼2세기대의 분묘군들은 상호 독립적이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소국 초기단계의 국읍과 읍락간의 결속 관계의 특수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국읍이 경제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우세하면서도 그 격차가 크지 않아 다른 읍락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여 각 읍락의 독자성이 아직도 강하게 작용하던 상황으로 해석될 여지가 더 크다는 뜻이다(李盛周,<1∼3세기 가야정치체의성장>,≪韓國古代史論叢≫5, 1993, 145∼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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