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1. 삼한의 정치와 사회
  •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 (1) 농경생활

(1) 농경생활

 ≪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주민들이 정착생활을 하고 五穀과 벼를 재배하였으며 누에와 뽕나무를 길러 생사와 비단을 생산하였고, 변한의 布는 폭이 넓고 섬세하여 낙랑에 수출되어 낙랑산 비단의 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특히 진변한지역은 철자원이 풍부하여 제철과정을 거친 철기 제작원료가 마한·동예·왜·낙랑군·대방군 등지로 수출되었으며 철이 화폐처럼 각종 교역활동의 매개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철기제작에는 鑄造와 鍛造의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였으며, 높은 수준의 강철 제작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읍락민들은 농경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철생산과 토기제작 분야에서는 이미 전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철기는 생산지가 국한되어 있고 전문적인 제작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므로 처음부터 소수집단에 의해 독점 생산되었다. 토기 역시 일부는 전통적인 가내생산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高火度의 硬質토기가 새로이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전문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한의 주된 경제기반은 농경이다. 조·콩·보리·밀·팥 등 밭작물이 고루 재배되고 있었으며 삼한지역은 기후와 토양이 벼재배에 적합하여 벼농사가 특히 발달하였다. 벼농사의 대부분은 논(水田)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역에 따라서는 밭벼(陸稻)가 재배되었을 가능성도 시사되고 있다. 水田의 입지형태는 알 수 없으나 한반도 벼농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일본 彌生(야요이)시대 수전을 참고하면 삼한지역 역시 배수를 중심으로 하는 저습지형 수전은 물론 인공 관개를 실시하는 半乾田 형태의 수전이 널리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770)李賢惠,<三韓社會의 농업생산과 철제농기구>(≪歷史學報≫126, 1990), 64∼66쪽.

 삼한의 농업생산의 기술적 토대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따비와 괭이 중심의 농경기술이 확대 발전된 것이나 철기의 보급으로 목제 농기구가 점차 철제로 전환되면서 생산력면에서 획기적인 성장이 있었다. 농기구의 철기화 과정을 살펴 보면 수확도구가 가장 먼저 철제로 전환되었다. 석제 반달칼이나 돌낫이 사라지고 철제 손칼과 낫이 사용되면서 노동력의 절약뿐 아니라 수확 적정기를 놓침으로서 입게되는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어 결과적으로 생산력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철제 손칼은 일상생활에서 다용도로 사용되는 도구로 보급도가 가장 높아 일반 주거지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다. 낫에 비해 손칼의 보급도가 훨씬 높다는 것은 수확작업은 여전히 선별적인 이삭베기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낫을 사용하여 한꺼번에 여러 포기를 베는 수확작업은 水田농업의 경우 논바닥을 편평하게 손질하여 벼가 자랄 동안 물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여 벼가 익는 시기를 통일할 수 있는 기술적 진전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초기와는 달리 2∼3세기 이후가 되면 낫의 보급량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철제 농·토목구의 보급으로 인해 경작기술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발전이 진행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삼한에서 널리 사용된 철제 起耕具의 하나는 철제 따비이다. 땅을 가는 기본 도구인 따비의 경우 철제 날을 끼운다면 작업의 효율화는 물론이고 보다 깊이 땅을 갈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생산효율을 직접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철제 따비는 대부분이 주걱형이며 경주 조양동·의창 다호리·김해 양동리·대구 八達洞·울산 下垈 등 모두 진변한지역의 토광목관묘와 토광목곽묘에서 출토된 것들이다. 따비는 손칼이나 낫과 달리 중국제 농기구와는 형태를 달리하는 한반도 독자적인 것으로 전통적인 목제 따비를 날 부분만 철제로 전환한 것이다. 다호리에서는 주걱형과는 달리 날끝이 뾰족한 따비도 출토되었는데 철기 제작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전통적인 목제 농구에 다양한 응용이 가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비와 함께 중요 농기구의 하나로 사용되어 온 것은 괭이이다. 청동기시대 이래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나무괭이가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중 철제 괭이로 먼저 전환된 것은 농·토목구로 사용되는 날끝이 좁고 긴 형태의 것이다. 나무괭이가 쇠괭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钁이라는 철제 기경구의 형태가 부분적으로 복합되어 한반도 고유의 쇠괭이 모양이 만들어졌다. 쇠괭이는 鑄造鐵斧로 불리면서 공구류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다른 농구와 달리 주조에 의해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다호리고분에 부장된 주조도끼를 공구도 농구도 아닌 철소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771)李健茂 外, 앞의 글, 48쪽.
설사 이것이 철소재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의 형태가 괭이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며 이는 쇠괭이가 실제로 제작·사용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철자원이 귀할 때에는 기술이 허용하는 한 철기 완제품을 녹여서 필요한 다른 철기를 만드는 데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철소재로만 사용할 목적이라면 운반이나 보관에 편리한 형태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굳이 까다로운 주형틀을 필요로 하는 괭이 모양으로 제작할 이유가 없다.
실제 다호리 출토품은 전혀 사용 흔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루를 끼우는 구멍 속에 주조시 끼워 넣은 내형을 파내지도 않은채 부장된 것이어서 의문이 가는 점도 있다. 그러나 무덤에 부장된 철기는 실용적인 면 이외에 무덤 주인공의 경제적인 활동과 정치·사회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목적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용 흔적이 없다고 하여 모든 주조괭이를 비실용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형태의 괭이는 밭농사에 있어서 고랑을 파거나 작물뿌리를 제거하는데 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해를 묵힌 경작지를 다시 개간하는 데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쇠괭이의 보급에 따라 특히 田作 농경지의 절대 면적이 크게 늘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U자형 철제 삽날 또는 가래날로 목제 삽이나 가래날의 가장자리 양면을 5∼7cm 넓이의 철판으로 테를 돌린 것이다. 나무삽의 가장자리를 철제로 보강하는 것은 중국 철삽의 영향으로 생각되나 중국삽에 비해 삼한지역 출토품은 날이 둥글게 벌어진 것이 다르다. 이 종류의 농기구는 흙을 파서 옮기는 데 편리한 도구로 주로 水田농사에서 水路를 파거나 보수하고 또는 급수나 배수 작업과 관련하여 물길을 트거나 막는 데 사용되는 농구이다. 날모양이 둥근 것도 수전경작에 적합한 전통적인 목제삽의 모양을 그대로 이은 때문이다. 마한지역에서는 충북 中原 荷川里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이 1점 있고, 진변한지역에서는 김해 양동리와 울산 하대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는데 모두 2세기 말∼3세기 경의 토광목곽묘에 부장된 것이다.772)全玉年,<蔚山下垈遺蹟 第2次發掘調査>(≪第36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1993), 523쪽. 삽날끝을 철로 보강하면 저습한 논에서도 흙이 덜 묻어나 작업 능률이 오르고 수로의 보수 유지작업이 한결 용이해진다. 그리고 인공 용수로의 개설이 더욱 늘어나고 수전개발이 확대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삼국사기≫백제본기의 仇首王 9년(222), 古爾王 9년(242) 그리고 신라본기의 逸聖王 11년(144)의 수전개발과 수리시설 보수에 관한 기록은 이와 같은 철제 농기구의 보급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수전경작지의 확대과정을 반영하는 기록이라 하겠다.773)이상 농기구에 관한 자료는 李賢惠, 앞의 글(1990), 52∼60쪽 참조.

 이상의 철제 농기구들은 공통적으로 철제 무기와 여러 가지 사치품들이 풍부하게 부장된 대형 분묘에서 출토되고 있다. 철제 농기구가 지배계층의 분묘 부장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는 것은 이 단계에서는 생산도구 그 자체가 중요한 자산일 뿐 아니라, 무기 못지않게 정치적인 권위와 경제적인 富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는 증거이다. 아직도 철제 농기구의 소유는 지배집단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경작지 확대와 생산력 증대라는 경제적 혜택을 집중적으로 누리는 계층도 이들이었다. 따라서 철제 농기구와 각종 공구의 보급으로 집단 전체의 총생산력이 증대한 것은 사실이나, 지배집단이 획득한 잉여산물이 사회 전체의 평균적 생산력 증대 비율을 앞지르기 때문에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계층간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지배집단의 권력기반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잉여산물의 급속한 축적은 집단간의 교역을 활성화시키고 사회·경제적 성장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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