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1. 삼한의 정치와 사회
  •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 (2) 교역활동

(2) 교역활동

 交易이란 좁은 의미로는 물물교환을 뜻하지만 넓게는 상거래와 물물교환을 포함하는 貿易(trade)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교역이라는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원인은 각 지역별로 생산되는 자원과 물품 그리고 기술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삼국지≫東夷傳 倭人조에 나라마다 시장이 있어 서로 필요한 것을 교역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한의 각 소국 사이에도 다양한 교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간의 생태적 차이에 따른 근거리 교역은 비단 이 시대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며, 삼한의 정치·경제적 발달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로서 주목되어야 할 부분은 오히려 원거리 교역 내지는 대외교역이다. 대외교역 활동을 자극한 일차적인 요인은 漢郡縣 설치로 인한 중국산 사치품의 등장과 辰弁韓의 철자원이며, 이를 매개로 각 소국간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중국 郡縣, 倭, 三韓 사이에 활발한 국제교역이 전개되었다.

 삼한의 대외교역의 중요 대상은 중국 군현과 왜이며 교역 대상에 따라 교역 형태나 교역품이 달랐다. 이 가운데서 중국과의 교역에서 행해지는 주된 교역 형태의 하나는 朝貢貿易으로 한반도에서는 주로 낙랑군, 대방군과 같은 중국 군현을 통한 간접적인 조공무역이 일반적이었다. 중국 왕조와 公的인 관계를 맺을 경우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관행은 朝貢과 冊封이라는 형식이다.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다는 것은 서로 침략하지 않고 친선관계를 유지한다는 정치·외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만 이같은 약속을 효과적으로 지켜나가기 위해 필요한 장치는 서로가 원하는 물자를 얻을 수 있는 합리적 통로를 가지는 것이다. 삼한이나 왜가 군현에 조공할 때 경제적인 면에 대한 고려없이 단지 대외적으로 정치적 권위를 인정받거나 친선을 나타내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원거리 여행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조공 때 가져가는 물품은 우의를 표하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교역을 목적으로 하는 교역품으로 보아야 하며, 조공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이루어지는 이같은 교역은 조공무역으로 부를 수 있다.

 ≪후한서≫동이전에는 建武 20년(44) 韓 廉斯人 蘇馬諟가 낙랑군을 찾아 가서 공물을 바치고 ‘韓廉斯邑郡’으로 封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한의 臣智들은 魏로부터 邑君·歸義侯·中郞將·佰長·都尉와 같은 다양한 관작을 받기도 했으며, 3세기 경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印綬 衣幘을 받은 韓人이 千餘人이나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모두 삼한 토착사회의 중국 물자에 대한 강한 욕구를 보여 주는 기록들이다.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경상도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魏率善韓佰長’ 銅印과 晋代의 ‘晋率善穢佰長’ 동인이 있다. 이같은 官爵 인수의 수여 과정에서 下賜와 朝貢의 형식을 통해 상당량의 물자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군현 관리들이 그 실무를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 군현으로부터 들어 오는 중요 교역품은 의책·銅鏡·비단·環頭大刀 등 실용성보다 주로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데 효과적인 물품들이 많았다고 생각된다.774)중국제 청동거울의 제작과 관리는 정부 관할이므로 의창군 다호리, 경주 조양동, 김해 양동리유적을 비롯하여 삼한 각지에서 출토되는 漢鏡들은 모두 중국 군현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통해 유입된 교역품으로 보아야 한다. 정확한 제작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김해 양동리유적(280호)에서 출토된 환두대도 역시 중국 군현과의 조공무역을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경우도 비슷하여 현도군으로부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鼓吹技人(북, 피리, 樂工)과 함께 朝服, 의책을 들여 오고 있다. 倭王 卑彌呼가 魏에 遣使 조공한 댓가로 ‘親魏倭王’이란 관작과 金印紫綬를 받으면서 魏로부터 받은 하사품 중에 각종 비단과 대도를 포함하여 동경이 100매나 들어 있다는 것은77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倭. 조공무역을 통해 들어 오는 물품의 종류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시사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조공무역 이외에 삼한지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다른 하나의 교역 형태는 중국 상인들에 의한 교역활동이다. 조공무역은 중국 정부와 공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물자교환이므로 교역 품목이나 교역 물량에 일정한 제약이 있다. 이에 비해 상인이라는 전문적인 중개인이 등장하게 되면 화폐 또는 화폐의 기능을 가지는 교역의 매개물이 사용되기도 하고 교역 대상과 교역과정도 다양하고 자유로워지게 된다. 낙랑군에 와있던 중국상인의 존재가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되고,776)≪漢書≫권 28 下, 志 8 下, 地理 樂浪郡. 한반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五銖錢, 王莽대의 貨泉과 같은 중국 화폐는 중국 상인 내지는 군현 거주 상인들에 의한 상거래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군현 관리에 의한 공적 물자 이동과 대비시켜 私的인 상인들의 교역활동을 민간교역으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777)後漢대의 활발한 私商 활동의 추세로 미루어 낙랑지역 토착세력과 중국과의 교역에서는 오히려 內郡商人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의 활동 비중이 더 컸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尹龍九,<樂浪中期 郡縣支配勢力의 再編과 交易活動>,≪한국고대사연구회 회보≫28, 1992, 11쪽). 이같은 견해가 타당하다면 중국 상인의 교역활동은 군현 지역내에 국한되지 않고 군현 밖의 토착사회에까지 널리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화폐들은 군현 이외의 지역에서는 대개 전남 海南이나 務安, 제주도 山地港, 경남 馬山과 金海 등 바다에 면하여 해로를 통해 외부와의 통교가 편리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 상인들에 의한 민간교역활동이 이루어지던 중요 교역 루트는 海路였으며, 그들의 직접적인 교역 대상은 주로 서남해안지역의 소국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상인들이나 外地人이 삼한지역에 들어와 교역활동을 할 경우 廉斯鑡설화에서 보이듯이 신변 안전이 보장된다고 볼 수 없으므로 가능한한 해로를 통해 접근이 용이하고 내륙지방과도 통교가 편리한 곳이 교역중심지로 선호되었을 것이다. 해안의 교역 거점에 위치한 소국의 배후에는 내륙지역의 정치집단들을 연결하는 교역망이 형성되어 있어 토산물이 교역장소로 모아지거나 교역품이 내륙 각지로 확산되는 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소국은 대외교역의 창구 기능을 하면서 교역품의 관리와 중개 등을 통해 훨씬 효과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남 해안의 김해지역이라 하겠다. 김해지역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낙동강 중상류 각지로 들어가는 關門에 해당되는 동시에 서해 및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해로상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만으로도 김해지역은 대외적인 교역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김해지역을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더욱 발달하게 만든 것은 경상도지방에서 생산되는 철자원이다. 경상도 각지에서 일차적인 제철과정을 거친 철기 원료가 낙동강이나 해로를 통해 김해지역으로 운반되고, 이러한 철을 매개로 낙동강 하구지역에는 東濊와 馬韓은 물론 倭·樂浪·帶方 등 각지의 교역품들이 모여들고 이러한 물자들은 다시 각 소국간의 교역망을 통해 경상도 각지로 확산되어 나갔을 것이다. 진변한에서는 각종 물자의 구매에 철이 화폐와 같이 사용된다는≪삼국지≫동이전의 기록은77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韓. 바로 철을 매개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교역활동을 반증하는 자료이다.

 상인을 통해 들어오는 교역품들은 정치적인 권위나 지위를 상징하는 물품보다 비단·漆器·水晶이나 유리제 장신구 등 경제적 부를 과시하는 사치품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중국 상인들이 가져오는 교역품 중에는 중국산뿐 아니라 낙랑에서 생산되는 비단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낙랑의 비단은 원료인 生絲를 濊·弁韓·倭 등지에서 가져다가 낙랑에서 가공한 것으로 중국에까지 알려진 우수한 교역품이었다고 한다.779)尹龍九, 앞의 글, 10∼11쪽.

 삼한지역에는 중국산과 낙랑산 이외에 북방계 유물과 倭系 유물들도 적지 않게 유입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해 양동리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제 용기는 낙랑이나 東濊와의 교역 과정에서 들어온 북방계 교역품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왜로부터 들어오는 교역품에는 倣製鏡이나 실용성이 퇴색된 儀器化된 청동제품들이 많고 그 대부분이 경상도지역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어780)李賢惠, 앞의 글(1994), 48∼49쪽 참조. 倭人들의 교역의 중요 관심이 철자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의 정치적 지배자의 권력 기반은 이미 철제 무기와 같은 물리적인 힘에 의존해가는 추세였으므로 왜계의 비실용적인 청동제 矛나 戈에 대한 수요는 상징적인 권위나 존엄성에 바탕하는 祭政一致 단계의 족장들의 遺習이 일부 잔존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삼한지역에서는 이미 철제 무기와 생산도구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청동기 생산과 제작에 대한 관심이 쇠퇴되고 있었으므로, 이같은 배경하에서 왜계 청동제품의 유입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3세기에 들어 오면 삼한의 대외교역에 일부 변화가 나타난다. 그 하나는 조공무역의 중심지가 樂浪郡에서 帶方郡으로 옮겨간 것이다. 다른 하나는 3세기 후반 삼한의 토착집단들이 요동의 東夷校尉를 통해 晋 本國과 직접적인 조공무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261년 樂浪外夷韓濊貊이 種屬들을 거느리고 와서 조공하였다는 기록에781)≪三國志≫ 권 4, 魏書 4, 沙帝紀 4, 陳留王 景元 2年. 이어, 277년에는 馬韓이 진 본국에 遣使한 것을 시작으로 290년까지 마한과 진한이 여러 차례 진 본국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782)≪晋書≫ 권 97, 列傳 67, 東夷傳 및 권 3, 帝紀 3, 武帝. 3세기 후반 진과 원거리 교역을 수행하던 토착사회의 대표적인 세력들은 마한과 진한 그리고 전남 해안지역의 정치집단들로 대별된다. 이것은 韓族사회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한 간접적인 對中國 교역에 만족하지 않고 진 본국에까지 왕래함으로써 본격적인 원거리 국제교역에 참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 한강유역의 夢村土城에서는 西晋代(기원후 265∼316)의 灰釉 錢文陶器片이 출토되고 있어 원거리 교역의 실상을 유물로 입증해준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대륙의 정치적 변화뿐 아니라 토착사회의 내적 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3세기 이전까지는 낙랑군이 대중국 조공무역 및 민간교역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으나 180년 이후 後漢이 혼란기에 들어가고 204년 경 요동반도의 公孫氏가 황해도지방에 대방군을 설치한 이래 낙랑군을 대신하여 對韓·對倭 접촉의 공식적인 창구가 대방군으로 옮겨 갔으며, 이같은 상태는 238년 공손씨가 魏에 의해 멸망되고 낙랑군과 대방군이 위 관할하에 들어간 후에도 이어졌다. 공손씨 진출과 위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중국 중앙정부의 교역품 공급도 여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중국은 삼한지역 토착사회에 대해 경제적인 관계보다 정치적 통제권을 확립하는 것에 일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783)魏 正始 7년(246) 部從事 吳林이 辰韓 八國을 낙랑에게 분할하려다가 韓族사회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는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간 대방군이 장악해오던 韓에 대한 조공무역의 관할권을 일부 낙랑군에게 분할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이 시점을 계기로 그간 위축되었던 낙랑군의 對韓 조공무역권이 일부 회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사치품 공급원으로서의 중국 군현의 경제적 기능의 쇠퇴와 교역활동의 상대적 위축이 원거리 대외교역을 하게 된 중요한 배경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원거리 국제교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교역품의 물량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교역품에 대한 토착사회 자체의 요구량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거리 국제교역은 다량의 생산물을 모아들이고 관리할 수 있는 내부조직의 발달없이는 불가능하며 이같은 조직은 정치권력의 집중화를 촉진시키게 된다. 교역의 구심체가 등장하면서 개별적인 교역활동에 제약이 가해지는 불이익이 있기도 하고 원거리 교역이 郡縣과의 교역보다 위험 부담도 크지만 교역 물량과 품목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원거리 국제교역이 전개되면서 多元的이고 산발적인 상태의 대외교역 활동은 점차 지양되고 일정한 구심점을 축으로 하는 조직적인 교역체계가 각 지역별로 성립되었다.

 사회의 정치·경제적 발달 과정에서 교역활동이 갖는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내려질 수 있겠으나 삼한의 경우 교역활동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교역활동을 자극한 일차적 요인은 중국산 사치품의 등장과 辰弁韓의 철자원 개발이지만 토착사회를 철기문화적 사회단계로 전환시키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교역활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교역품의 출현은 지배계층의 교역 욕구를 자극하게 되고 이들로 하여금 원하는 교역품을 얻기 위해 잉여산물의 축적과 생산력 증대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교역을 통해 확보된 철기와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들은 다시금 생산력 증대와 잉여산물 확보에 효과적으로 이용된다. 또한 교역을 통해 다른 집단과 접촉함으로써 각종 이념이 수용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용이하게 유도되기도 한다. 3세기 후반 진한과 마한의 이름으로 진 본국과 조직적인 무역관계를 가질 정도의 확대된 政治體가 출현하고, 뒤이어 진한과 마한이 각각 신라와 백제국가로 발전한 것은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삼한사회 자체의 이같은 정치·경제적 성장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1∼3세기대의 대규모의 土壙木棺墓와 土壙木槨墓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의 존재 역시 이같은 토착사회의 정치·경제적 성장에 대한 전제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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