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1. 삼한의 정치와 사회
  • 3) 삼한의 경제와 사회
  • (3) 계층 분화

(3) 계층 분화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삼한은 이미 계층분화가 상당히 진행된 사회였다. 국읍의 주수를 비롯하여 읍락의 족장들은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누리면서 지배계층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들은 효율적인 생산도구를 집중적으로 소유하고 대외교역을 독점함으로써 그들의 권력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다호리유적에서 나온 붓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중국인과의 접촉에서 제한적이나마 한자를 이해하고 있었고 생활용기로 칠기를 사용하였으며, 수정이나 유리로 만든 장신구로 몸치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념적으로는 아직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이한 능력을 가진 인물일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사로국의 예를 보면 南解次次雄과 같은 국읍의 지배자는 차차웅이 巫를 뜻한다고 하였으므로 원래는 제사장 또는 샤먼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昔脫解설화에 의하면 그는 冶匠 출신인 동시에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新시베리아족으로 알려져 있는 야쿠트족(Yakuts)의 속담에는 ‘대장장이와 샤먼은 한 둥우리에서 나왔다’거나 ‘대장장이는 샤먼의 큰 형님이다’라고도 하여 철을 다루는 전문인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과 동일시되고 있다.784)李杜鉉,<단골巫와 冶匠>(≪정신문화연구≫16-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198쪽. 이는 철기 제작기술 내지는 기술을 가진 집단에 대한 외경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처럼 초기의 지배집단 중에는 철의 관리나 철기 제작기술을 권력기반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족장 계층 아래로는 대다수의 주민들이 읍락의 일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을≪삼국지≫동이전에서는 下戶라고 칭하고 있다. 고구려와 부여지역에서는 읍락민의 계층 분화가 크게 진전되어 노비와 비슷한 상태로 몰락한 빈한한 농민을 가리키는 뜻으로 하호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삼한 읍락민의 경우 계층간의 격차가 이들 지역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낙랑과 대방군에 가까운 지역의 하호들은 중국제 의복과 모자를 빌려 쓰고 군현과의 교역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왜인전에 의하면 大人은 4∼5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하호들 중에도 2∼3명의 부인을 거느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각 무덤들 사이에도 뚜렷한 묘역의 구분이나 차등이 존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3세기 이후의 대형 목곽묘 축조 단계에 오면 대형 분묘들이 능선부를 집중적으로 차지하는 등 분묘 입지상에도 차별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분묘유적들도 묘광의 규모와 부장된 유물의 질과 양 면에서 대·중·소의 세 종류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한다.785)李盛周, 앞의 글. 이 때가 되면 읍락민 사이에도 경제적인 격차가 커지고 읍락의 사회·경제적 구성도 보다 다양해졌다.

 삼한의 읍락에는 하호 이외에 노비가 있었다. 노비 발생의 일반 예에 비추어 삼한의 노비 역시 그 대부분이 형벌을 받은 자, 채무를 갚지 못한 자, 전쟁 포로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였는지, 생산활동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삼국지≫동이전에 인용된≪魏略≫에 韓地에 들어와 벌목을 하다가 잡힌 漢人들이 노예가 되어 머리를 짧게 깎고 밭에서 새를 쫓는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는 廉斯鑡설화의 기록이 있어 노예제사회설의 중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비의 노동력이 생산활동에도 이용되고 있었다고 해서 모든 농업생산활동이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하였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으며, 삼한의 농업생산을 담당한 주요 계층은 하호로 불려진 대부분의 일반 읍락민들이었다고 생각된다.

<李賢惠>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