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2. 삼한의 문화
  • 2) 삼한의 유적과 유물
  • (1) 철기

(1) 철기

 중남부지역의 철기문화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시기구분이나 기준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이전 3세기간은 초기 철기시대로, 이후 3세기간은 원삼국시대로 양분하는 방식이다.803)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一志社, 1986), 101∼144쪽. 이에 대해 서북지방에 비해 철기문화의 유입이 상대적으로 늦은 전남지방의 경우 기원전 2세기 말 이후 위만조선계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본격적인 철기문화가 확산되고 그 연속선상에서 원삼국문화가 발전하고 있으므로 마한의 철기문화를 초기 철기시대와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지 않다는 비판적 견해가 나온 바 있다.804)崔盛洛, 앞의 책, 238쪽. 이와 달리 한반도 전체의 철기문화의 전개 과정을 4단계로 세분하여 삼한의 철기문화를 3, 4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805)崔鍾圭,≪三韓社會에 대한 考古學的 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제3기는 기원전 1세기 후반∼기원후 2세기 전반, 제4기는 기원후 2세기 후반∼3세기로 편년하고 있다.
또는 중남부지역의 철기문화를 철기사용 개시기(기원전 2세기), 낙랑철기의 영향기(기원전 1세기), 철기문화의 발전기(기원후 1∼3세기)의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806)李南珪,<三韓鐵器文化의 成長過程>(≪三韓社會와 考古學≫, 제1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3), 45∼55쪽. 각 견해 사이에 부분적인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세기대를 중남부지방 철기문화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획기로 잡고, 이를 삼한 철기문화 형성의 직접적인 토대로 간주하는 점에서는 대체적으로 견해가 일치하는 것 같다.

 현재 중남부지역에서 조사된 가장 오랜 철기유적은 기원전 2세기경으로 편년되는 전남 장수 南陽里, 충남 唐津 素素里, 충남 扶餘 合松里유적으로 각 유적마다 다량의 청동기와 함께 철제 도끼와 끌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모두 戰國계 철기문화에 속하는 鑄造철기로 이들이 완성된 제품으로 유입되었는지 현지에서 제작된 것인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이 종류의 철기가 같은 시기 경상도지역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는지 아니면 한반도 서북지방과 교섭이 빈번하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의 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사된 이 철기유물들은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진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유물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말에서 기원전 1세기대에 이르면 철기유물과 유적이 경상도지역에서 집중 출토되고 제작방법과 형태 및 종류도 많이 달라진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주 九政洞·入室里·朝陽洞·대구 坪里洞·飛山洞·삼천포 勒島, 그리고 의창 다호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이 유적들도 다시 기원전 1세기 전반 이전의 것과 기원전 1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 세분할 수 있으나 공통적으로 이 단계 철기들은 漢代 철기의 계보를 잇고 있고, 제작 방법이 鍛造라는 점, 무기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철기의 종류와 수량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 전단계의 철기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807)崔鍾圭, 앞의 책, 113쪽. 예를 들면 무기로는 鐵劍·鐵矛·鐵戈·鐵鏃 등이 만들어졌고, 용도에 따라 도끼의 종류나 형태도 다양하며, 이 밖에 철제 따비·괭이·낫·손칼 등과 같은 농공구를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새로운 문화요소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동시에 전단계의 문화요소도 강하게 계승되고 있다. 이 단계 철기의 대부분이 단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형태상으로도 한대 철기의 특징들을 나타내는 데 비해 쇠괭이만은 주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형태상으로도 戰國系 철제 도끼와 곽의 특징이 섞여 있다. 그리고 다호리에서 출토된 철모들 중에서는 형태상으로 전국계 철모와 연결되는 것이 다수 있어808)崔鍾圭, 위의 책, 121∼122쪽. 한의 철기문화 요소 이외에 전국계 철기문화 요소가 혼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鐵戈·板狀鐵斧·철제 따비는 형태상 토착적인 문화요소를 강하게 반영하는 철기들로 손꼽힌다.

 한군현이 설치된 것이 기원전 108년이므로 이론상 한나라 철기문화 유입의 上限은 기원전 2세기 말에서 1세기 초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의 정착에 소요되는 일정한 경과기간이 감안되어야 한다. 낙랑군지역의 정치적 추이를 보면 漢四郡 설치 초기에는 漢 武帝의 강력한 대외정책의 추진으로 토착세력의 강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809)漢의 위만조선 정복에 협조한 右渠王의 아들 幾侯가 낙랑군 설치 4년 여만에 모반죄로 죽게 되고 尼谿相 參 역시 기원전 99년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죽게 된다(≪漢書≫ 권 17, 表 5, 景武昭宣元成功臣). 그러므로 낙랑군은 내부 통제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정이었고 이로 인해 군현 이외의 토착세력과의 적극적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낙랑군의 활발한 경제활동이 군현 외부지역으로 확대되면서 한의 선진기술이 韓의 토착사회에 적극적으로 파급될 수 있었던 것은 武帝 死後 군현 내부의 정치적 안정이 확립되는 기원전 1세기 중엽 이후에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군현 설치 이후 약 반세기 동안은 위만조선의 멸망과 유이민의 이동으로 위만조선계 철기문화가 중남부지역으로 파급되면서 독자적인 철기문화 발전의 토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변한이 대내외에서 필요로 하는 다량의 철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기술적 여건을 갖추게 되는 것은 이같은 토착사회 자체내의 철기문화의 바탕이 있었고 여기에 한의 발달한 철기 제작기술이 복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삼한의 철기문화는 목곽묘가 출현하는 기원 2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질적·양적으로 또 한차례의 현저한 발달을 하였다. 즉 세형동검을 원형으로 하는 철제 단검이 사라지고 80cm 내외의 철제 大刀가 출현하는 것은 製鋼 기술상 일정한 발전이 있었던 것을 뜻한다. 또한 이 단계가 되면 철촉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는데 철촉은 소모성 무기이므로 지속적인 공급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보편화되기 어렵다. 그런데 부산 老圃洞 31호묘에서 한 개인이 100여 점 이상의 철기를 부장할 정도로 철촉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어 전 단계에 비해 철기 생산량이 전반적으로 크게 늘어났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가 되면 容器의 철기화가 두드러지는데 이 역시 철기 제작기술상 일정한 발전을 전제로 한 현상이다.810)崔鍾圭, 앞의 책, 129쪽.

 철기 유물에 대한 형식학적 연구의 차원을 넘어 철기 제작기술의 발달과정과 제작 규모, 관리체계 등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철기 유물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제철관련 遺構에 대한 폭넓은 자료가 축적되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철기와 관련된 각종 과정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연후에야 삼한사회내에서 철기문화가 발휘했던 사회·문화적 기능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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