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Ⅴ. 삼한
  • 2. 삼한의 문화
  • 2) 삼한의 유적과 유물
  • (2) 토기

(2) 토기

 토기는 흙으로 빚어 만든 생활용기의 하나로 식생활을 비롯하여 각종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유물이다. 특히 고고학 연구에 있어 토기는 특정 사회의 문화성격을 밝히고 유물 유적의 편년체계를 확립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新시베리아족으로 알려져 있는 야쿠트족(Yakuts)의 속담에 ‘최초의 대장장이와 최초의 샤먼 그리고 최초의 陶工은 형제들’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다같이 불의 지배자라는 친연성을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811)李杜鉉,<단골巫와 治匠>(≪정신문화연구≫16-1, 1993), 198쪽. 이는 철기 제작기술의 도입과 더불어 토기 제작상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토기는 토기문화 자체로서의 중요성 못지 않게 철기문화의 전개 과정을 비롯하여 사회의 전문화의 진행 정도 등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유용한 자료라고 하겠다.

 철기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는 無文土器가 硬質의 무문토기로 바뀌고 재래의 무문토기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토기가 등장한다. 토기의 기종이 다양해지고 외형상으로 형태와 색갈이 달라질 뿐 아니라 제작기법상으로도 무문토기와 달리 바탕흙이 泥質점토로 精選되고, 토기제작시 회전판이 사용되며, 기벽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하는 打捺기법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토기 가마도 노천窯에서 폐쇄적인 登窯로 구조가 바뀌고 燒成 온도도 크게 높아져 무문토기보다 훨씬 단단한 질의 토기가 만들어진다. 토기상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변화를 둘러싸고 연구자에 따라 기술적 배경에 대한 해석도 다르고 토기의 분류 기준과 명칭도 다양하며, 편년도 조금씩 다르다.

 원삼국토기 내지는 삼한토기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 것은 金海貝塚 출토 토기자료로 이곳에서 나온 打捺文硬陶 즉 회청색 혹은 적갈색의 타날문이 있는 硬質토기가 김해토기로 명명되면서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간주되어 왔다. 이후 남해안 일대의 패총유적들과 한강유역의 風納洞土城의 발굴로 토기자료가 증대되면서 돗자리무늬(繩蓆文)를 가진 硬質회색토기 이외에도 삼한지역에서는 무문토기가 개량된 풍납동식 무문토기, 軟質의 회색 또는 적갈색 때린무늬(打捺文)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제작 사용되고 있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812)金元龍, 앞의 책, 133쪽.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 경상도지역에서 瓦質土器가 출토되면서 삼한의 토기문화에 대한 활발한 논쟁과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삼한시기 토기문제에 대한 논쟁의 개요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래의 가장 대표적인 설은 다양한 토기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중의 하나인 회색 경질의 繩蓆文土器를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설정하는 것이었다.813)위와 같음.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삼한토기=김해토기=회청색 경질토기라는 종래의 설을 비판하면서 삼한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와질토기이며 삼한은 와질토기시대로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와질토기의 형식학적 분류를 토대로 삼한 토기문화의 발전과정과 편년체계를 세우고 있다.814)申敬澈,<釜山 慶南出土 瓦質系土器>(≪韓國考古學報≫12, 1982).
崔鍾圭,<陶質土器成立前夜와 展開>(≪韓國考古學報≫12, 1982).
林孝澤,≪洛東江下流城 加耶의 土壙木棺墓硏究≫(漢陽大 博士學位論文, 1993).

 그러나 와질토기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그 하나가 타날문토기를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원삼국시대의 토기에는 硬質無文土器와 타날문토기의 두 종류가 있으나 경질무문토기는 타날문토기와 共伴하면서 갑자기 硬質化하므로 타날문토기와 같은 窯에서 燒成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타날문토기가 명실상부한 삼한시대의 表識的 토기라는 주장이다. 비록 胎土에 혼합한 石粒의 양에 따라 粗質과 精質의 구분이 있으나 원삼국 초기부터 새로운 토기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타날문토기이며, 색의 차이는 還元焰系 低火度 소성과 酸化焰系 저화도 소성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종래 원삼국기의 표지적인 토기로 간주되어 온 회청색 경질토기도 타날문토기의 일종으로 연질 타날문토기보다 비율은 낮으나 원삼국 초기 단계부터 제작되었으며, 와질토기 역시 연질 타날문토기의 영남판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회전판을 사용하여 마무리 성형을 하고, 등요에서 구워내며, 異物質이 없는 고운 점토를 사용하는 등 戰國系 製陶기술을 채용하여 만들어진 삼한지역의 새로운 토기는 타날문토기로 통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815)崔秉鉉,<鎭川地域土器窯址와 原三國時代土器의 問題>(≪昌山金正基博士華甲紀念論叢≫, 1990), 565∼573쪽.

 이러한 견해 차이는 토기제작상에 나타나는 기술적 변화의 배경에 대한 견해 차이로 연결되고 있다. 와질토기론에서는 새로운 토기문화의 시작을 漢式 토기의 영향으로 보는 데 비해 타날문토기론에서는 이를 戰國系 灰陶 제작기술과 연결시키고 있어 이 점에 있어서도 양설은 대조를 이룬다. 戰國 회도의 제작 기법을 주목하는 견해는 漢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이전 위만조선 철기문화의 영향이 작용하던 일정 시기를 전제로 하는 경우로 위만조선 철기문화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古式 와질토기는 전국계 회도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낙랑계 토기의 제작기술과 器形의 영향이 삼한지역 토기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기원후 2세기 초 新式 와질토기부터라는 견해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 속한다.816)李盛周,<原三國時代 土器의 類型·系譜·編年·生産體制>(≪韓國古代史論叢≫2, 1991), 251·272쪽.

 이상의 견해들이 삼한지역 토기문화의 발전 과정을 일원적인 체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인데 비해 단계별로 각 유형의 토기들이 공존하면서 계기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새로운 토기문화의 시작을 경질무문토기의 출현으로부터 잡고, 이어 경질擦文土器, 적갈색 軟質土器(타날문토기), 와질토기, 회청색 경질토기 등 각종 토기들이 출현시기와 유행시기를 조금씩 달리하면서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전부터 조금씩 나타나던 타날문토기와 와질토기는 기원후 1세기 중반∼2세기 전반에 이르면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며, 회청색 경질토기의 유행시기는 타날문토기보다 늦은 기원후 2세기 말 내지는 3세기 초 이후라고 한다.817)전남지방에서는 원삼국 1기(기원전 1세기 초∼기원후 1세기 중반경)에는 경질 무문토기가 주류를 이루며, 타날문토기는 2기부터 조금씩 등장하여 3기(기원후 2세기 후반∼3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일반화된다고 한다(崔盛洛, 앞의 책, 158·213·238쪽). 이와 비슷한 접근 방법을 시도하되 여러 가지 유형으로 細分되고 있는 토기들을 대별하여 단순화시킨 경우도 있다. 한강유역 원삼국시대의 토기자료들을 기술적 유형별로 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회흑색 無文樣土器의 셋으로 나누고, 각 토기 출토의 상대적 빈도를 근거로 세 종류의 토기가 모두 나오는 유적들을 전기(0∼200년)로, 경질무문토기가 소멸하고 타날문토기와 회(흑)색 무문양토기만이 나오는 유적을 후기(200∼300년)로 편년하였다.818)朴淳發,<漢江流域 原三國時代의 土器樣相과 變遷>(≪韓國考古學報≫23, 1989), 23쪽.

 이처럼 삼한의 토기문화도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연구하는 기준이나 각 토기의 출현 시기에 대한 편년차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타날문토기의 출현 시기에 대해서도 기원전 1세기, 기원후 1∼2세기로 서로 다르며, 종래 원삼국시대의 대표적 토기로 간주되어온 회청색 경질토기의 출현 시기에 대해서도 기원전 1세기로부터 기원후 3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하다.819)金元龍:기원전후(앞의 책, 1986, 128∼134쪽), 崔秉鉉:기원전 1세기(≪新羅古墳硏究≫, 一志社, 1992, 570쪽), 崔盛洛:기원후 2세기 말∼3세기 초(앞의 글, 1992, 213쪽), 崔鍾圭:3세기 말∼4세기(앞의 책, 128∼134쪽).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마한지역의 유물 유적에 대한 조사 자료의 증가를 통해 해결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삼한의 토기연구는 토기의 형태나 질에 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고, 토기의 생산규모나 생산방식 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고식 와질토기는 半專業的인 생산체제에 의해 생산되었고, 2세기 초 신식 와질토기의 제작으로부터 전업적인 토기생산체제가 성립되었을 것이라는 시론적 연구가 있어 이 분야 연구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주고 있다.820)李盛周, 앞의 글, 236∼286쪽. 앞으로 토기 요지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자료의 축적이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문제도 점차 해소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고고학 자료를 통한 삼한문화 연구의 기본방향은 철기문화가 유입된 이후 高塚古墳이 나타나기 이전까지의 다양한 문화 현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특정 유물 유적에 근거한 단선적 이해 방식보다 종합적인 문화성격의 부각에 역점이 두어져야 할 것이다. 삼한의 문화성격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는 특정지역이나 유물 유적에 치중되지 않고 분묘·생활유적·생산유적 등 각 부문에 걸친 유적들이 고루 조사 연구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李賢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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