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1) 성립
  • (1) 나집단의 성장

(1) 나집단의 성장

 이상과 같이 압록강 중류지역에는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2세기 초경 사이에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주민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문헌자료상 기원전 2세기 후반경에는 ‘薉君南閭’·‘句驪’ 등과 같은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예군남려’·‘구려’를 구성한 지역정치집단은 대체로 기원전 2세기 중엽경에 성장하였다고 파악된다. 이 지역정치집단은 이후 여러 단계의 통합과 복속을 거쳐≪三國史記≫고구려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那’를 이루었다. 那는 음이 奴·內와 통하고 川·讓으로도 기록되는데, 地 또는 川·川邊의 평야라는 뜻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집단을 가리킨다.034)三品彰英,<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朝鮮學報≫6, 1954), 16∼24쪽.≪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나의 용례로 태조왕 20년(72)과 22년 고구려에 통합된 藻那와 朱那를 비롯하여 沸流那部·桓那部·貫那部·椽那部 등이 나온다.035)余昊奎, <高句麗 초기 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韓國史論≫27, 서울大 國史學科, 1992), 8·9쪽의 도표. 비류나부 등의 ‘那部’가 중앙국가권력의 통제를 받는 나라는 의미에서 部를 冠稱한 반면, 조나와 주나는 중앙국가권력의 통제를 받기 이전의 독립적인 단위정치체라는 의미에서 부를 관칭하지 않고 있다. 또한 주나와 조나는 정복되기 이전에는 왕과 왕자로 상징되는 독자적 운동력을 가졌고 상당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지역정치집단을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那國’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용례는 없지만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이전의 那는 ‘那國 이전 단계의 지역정치집단’이라는 의미에서 ‘那集團’이라 할 수 있다.036)余昊奎, 위의 글, 11∼13쪽.

 나집단은 철기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장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보급된 철기는 기존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히 도끼와 낫은 농업생산력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쇠도끼는 무기의 성격도 지녔지만 개간을 위한 벌목에도 많이 사용되어 토지이용효율을 향상시켰고,037)일반적으로 鐵製農器具 특히 鐵製手農具가 보급되던 초기에는 개간이 생산량 증대에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崔德卿,≪中國古代 鐵製農具와 農業生産力의 발달≫, 建國大 博士學位論文, 1991, 4쪽). 쇠낫은 수확작업의 효율을 제고하였다. 특히 선철제 주조도끼의 위약성을 보완한 강철제 도끼가 보급되면서 개간작업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038)황기덕,≪조선원시 및 고대사회의 기술발전≫(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4), 47쪽.
崔德卿, 위의 책, 11∼14쪽.
그런데 대규모 개간과 일시적인 파종·수확작업은 상당한 규모의 경작지 점유, 노동도구의 집적, 노동력의 동원을 필요로 한다. 농업생산력 발달은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의 약화와 사회경제적 분화를 초래하여 계층화의 진전과 세력집단의 형성을 촉진하였고, 그 결과 농업생산력은 더욱 급속히 발달하였다.

 기단적석묘 축조집단의 등장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주목된다. 적석묘는 대체로 무기단에서 기단으로 발전하면서 축조재료도 강돌 등 자연석에서 다듬은 돌(切石)로 변화한다.039)적석묘의 외부구조는 無基壇에서 基壇(方壇·階段)으로, 내부구조는 石壙(槨)에서 石室로 변하였다. 무기단에서 기단으로의 발전은 기원 이전, 석광에서 석실로의 변화는 3세기 중·후반경에 이루어졌다. 특히 최근 발굴된 桓仁 望江樓 적석묘는 길이 10.5m, 너비 9m, 높이 1.5m의 장방형으로 기원전 2세기 중엽∼기원전 1세기초로 편년되는데, 형식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규모로 보아 기단적석묘 또는 그에 버금가는 무기단적석묘로 추정된다(梁志龍·王俊輝,<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硏究≫1994-2). 그런데 기단적석묘는 축조기술의 발전뿐 아니라 채석·가공·운반·축조를 위한 노동력의 동원을 필요로 한다.040)정찬영,<기원 4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5, 1973), 30쪽. 기단적석묘는 무기단적석묘 축조지역 가운데 충적평원이 비교적 넓게 발달된 지역에 자리잡고 있고, 철제 농공구도 주로 이 지역에서 출토된다. 이 지역은 개간 가능한 대지가 넓을 뿐 아니라 生口·牛·馬 등 동산적 富도 상대적으로 풍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철제농공구의 보급에 따라 사회경제적 분화가 상대적으로 빨리 진전되었고, 특정세력이 철제농공구를 다량 집적하고 넓은 대지를 점유하여 읍락민의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면서 우세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읍락민을 통제하는 한편 주변의 후진적인 지역집단을 장악하여 지역정치집단 곧 나국의 모체인 나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중엽경 衛滿朝鮮의 압력과 함께 漢의 영향력이 압록강 중류일대로 뻗어왔다. 특히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초 眞番과 臨屯 등을 복속시켜 대세력을 형성한 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주변 집단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과의 교통을 통제하였다.041)≪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이에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들은 유력집단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는데, 기원전 128년 한에 투항한 薉君南閭집단은 이를 보여준다.042)≪漢書≫권 6, 本紀 6, 武帝 元朔 원년. 南閭의 투항을 받은 한이 滄海郡을 설치하고 도로개설에 나섰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예군남려의 집단은 요동군에서 동해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분포하였다. 28만 명이라는 집단의 규모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제1현도군의 인구가 약 4만5천 호·22만 구였고, 3세기경에도 고구려 3만 호, 동옥저 5천 호, 동예 2만 호였던 것으로 미루어 예군남려의 집단은 이들 전체를 포괄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예군남려의 집단은 강력한 통치조직을 갖춘 국가체라기 보다는 각지의 세력집단이 외압에 대응하여 완만하게 결집한 연맹체로 파악된다.043)李丙燾,<玄菟郡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173∼176쪽.
盧泰敦,<三國의 成立과 發展>(≪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7), 147∼148쪽.
다만 각 지역별 집단규모로 보아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연맹체의 중심지역인 압록강 중류일대의 나집단은 여전히 끊임없는 교류와 상쟁을 진행하였다. 특히 기원전 126년 한의 창해군 설치 계획이 좌절된 뒤044)≪漢書≫권 6, 本紀 6, 武帝 元朔 3년 春 및 권 24, 志 4下, 食貨. 나집단들은 대외적 결속보다 내적인 통합과 복속을 더욱 활발히 벌여 주변 요새지마다 ‘溝漊’나 ‘忽’이라고 불린 성을 축조하였는데,045)今西春秋,<高句麗の城 ; 溝漊と忽>(≪朝鮮學報≫59, 1971). 여기에서 ‘句驪’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은 대외적으로 예맥 혹은 예라는 일반적 명칭이 아니라 ‘구려’라는 특정한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진번군·임둔군을 설치한 다음 기원전 107년에는 압록강 중류일대에 玄菟郡을 설치하였는데, 현도군의 여러 현 가운데 高句驪縣이 보인다.046)≪漢書≫권 28, 志 8下, 地理 玄菟郡. 이제 압록강 중류일대는 대외적으로 구려 내지 고구려라는 단일 정치사회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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