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2) 발전
  • (1) 국가체제의 정비

(1) 국가체제의 정비

 고구려는 계루부가 각 지역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를 那部로 편제하면서 국가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계루부왕권과 이의 통제를 받는 나부가 국가권력의 양축을 이루었다. 따라서 초기 국가체제는 계루부왕권과 나부의 역관계를 조정하고 이들이 원활하게 통치력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074)삼국 초기 國家體制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여호규,<중앙정치체제와 권력구조>(≪한국역사입문≫①, 풀빛, 1995) 참조.

 나부는 원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였기 때문에 다양한 세력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沸流部長이 3인이었다거나075)≪三國史記≫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15년. 椽那部에 4椽那가 있었다는076)≪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2년. 기록은 나부가 3∼4개의 세력집단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 준다.077)이 사료는 那部의 分化過程으로 이해되기도 한다(金賢淑,<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慶北史學≫16, 1994, 26∼37쪽). 3세기 전반 消奴部 곧 沸流那部의 下戶는 약 3만 구였으므로078)≪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비류부장 1인은 만여 구 정도를 거느린 것으로 추산되며, 大武神王 5년(22) 고구려에 내투한 부여왕 從弟집단과 고구려 閔中王 4년(47) 낙랑으로 투항한 蠶支落집단이079)≪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高句麗. 모두 만여 명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들 독립세력의 규모는 대체로 만여 명 전후로 여겨진다. 이는 2∼3천 호 정도의 馬韓 小國에080)李賢惠,<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 8∼11쪽. 대비되는 규모이므로 원래 나국과 같은 존재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나부의 개별 독립세력 내부에는 나집단이나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지역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부는 나집단으로 성장하지 못한 개별지역집단, 나집단, 나국, 다른 나국을 복속시킨 중심 나국 등 여러 세력집단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계루부왕권이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나부 내의 다양한 세력집단을 일원적으로 편제하여야 했는데, 이는 고구려 국가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원적인 편제기준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封王·封主·賜姓 등의 방법으로 각 세력집단을 편제하였다. 봉왕과 봉주가 비류국 송양집단이나 부여왕 종제집단과 같이081)≪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2년 및 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5년. 독자적인 운동력을 지닌 단위정치체를 복속·편제하는 방법이었던 반면, 사성은 다양한 집단에게 주어졌다. 사성은 각 세력집단을 편제하는 정치적 조직방법으로 일종의 지배기능을 지녔지만,082)金光洙,<高句麗 建國期의 姓氏賜與>(≪金哲埈博士華甲記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에서는 사여자인 국왕을 중심으로 일관된 체계를 지닌 제도로 파악하고 있다. 각 개인의 신체적 특징을 징표로 성씨가 사여되거나 사성집단의 규모와 성격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일원적인 편제기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일원적인 기준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루부가 주변 지역집단을 편제하여 다른 단위정치체 보다 우월한 세력기반을 확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곧 일원적인 편제기준은 계루부가 각 지역의 독자적인 단위정치체를 나부로 편제하면서 비로소 확립될 수 있었다. 초기 관계조직은 이러한 점에서 주목된다.083)초기 官階組織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다음 글들이 참고된다.
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앞의 책).
武田幸男,<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朝鮮學報≫86, 1978).
盧重國,<高句麗 國相考>(상·하)(≪韓國學報≫16·17, 1979).
李鍾旭,<高句麗 初期의 中央政府組織>(≪東方學志≫33, 延世大, 1982).
金光洙, 위의 글.
林起煥,≪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琴京淑,≪高句麗 前期의 政治制度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5).

 ≪三國志≫魏書 東夷傳 고구려조에 3세기 전반경의 관명으로 相加·對盧·沛者·古鄒加·主簿·優台·丞·使者·皂衣·先人 등이 나온다. 이 중 상가는 최고 관직인 國相으로 비정되고,084)盧重國, 위의 글(상), 24∼25쪽. 고추가는 계루부의 대가를 비롯하여 소노부의 適統大人과 절노부의 대인에게 수여된 封爵的인 것이었고,085)余昊奎, 앞의 글(1992), 54쪽. 대로는 패자와 교치되었으므로 초기 관계는 대로=패자·주부·우태·(승)086)오기로 보기도 한다(金哲埈, 앞의 책, 126쪽).·사자·조의·선인 등 7등급으로 파악된다. 실제 沛者·(大)主簿·于台·(大)使者·皂衣 등은≪삼국사기≫에 官階名으로 나온다. 특히 조의는 우태로 승진하고 우태는 대주부·패자로 승진하는 것으로 보아087)≪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차대왕 2년.≪삼국지≫의 관명은 등급순으로 기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패자는 左·右輔나 國相 등 최고위직에 취임한 최고의 관계로 왕명을 받아 나부의 군사력을 거느리고 대외전쟁에 출전하기도 하였다. 우태는 패자 보다 한 단계 낮은 관계로 독자적인 군사력이나 운동력을 거의 상실한 曷思國과088)≪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16년. 같은 나국세력에게 수여되었다. 즉 패자가 다른 나국을 복속시켜 독자적인 군사력을 유지한 나부의 핵심세력에게 수여된 것이라면, 우태는 이들에게 복속된 나국세력에게 수여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大)主簿는 패자와 동격의 官階로서 왕과 함께 외국의 詔書를 받고,089)≪三國志≫권 47, 吳書 2, 吳主傳 嘉禾 2년. 왕의 입장에서 대가의 군사활동을 통제하는090)≪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등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각 대가는 사자·조의·선인을 설치하였는데, 이들은 각 지역의 중심적인 단위정치체가 나부로 편제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관계로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초기 관계조직은 나부세력의 편제기준으로 작용한 관계, 계루부왕권을 뒷받침한 관계,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한 관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계루부왕권은 나부세력에게 관계를 수여하여 일원적으로 편제함으로써 이들을 매개로 통치력을 관철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091)余昊奎, 앞의 글(1992), 50∼60쪽. 또 나부세력은 관계를 수여받아 자신의 세력기반을 인정받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092)那세력의 중앙정계로의 진출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형성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李鍾旭, 앞의 글(1982a), 105∼109쪽). 계루부왕권과 각 나부세력은 관계의 수수를 통해 역관계를 조정하고 통치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국가중대사는 계루부왕권과 나부세력들의 협의기관인 諸加評議會에서 결정되었다.093)尹成龍,<고구려 貴族會議의 성립과정과 그 성격>(慶北大 碩士學位論文, 1995), 10∼19쪽. 대외전쟁은 계루부왕권이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복속민에 대한 지배 역시 대가와 같은 독자적인 세력이 계루부왕권의 통제를 받으면서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통치방식과 국가체제는 기본적으로 나부체제기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이러한 국가체제는 제사체계에도 반영되어 있다. 3세기경까지 계루부를 제외한 다른 집단도 독자적인 시조전승을 보유하고 제사를 거행하여 집단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소속원의 일체감과 단결을 도모하였다. 계루부뿐 아니라 다른 집단도 國中大會의 제사대상인 東明과 河伯女를 제사지냈던 것으로 상정되는데,094)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Ⅹ, 1981), 66∼68쪽.
盧泰敦,<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3세기 전반경 소노부가 종묘를 세우고 靈星과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나095)≪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전하는 각 세력집단의 시조전승은096)徐永大,<高句麗 貴族家門의 族祖傳承>(≪韓國古代史硏究≫8, 1995). 이를 반영한다. 각 집단의 제사는 국중대회를 통해 국가차원으로 통합되었다. 국중대회인 동맹제에는 계루부를 비롯한 5부의 지배층이 모두 참석하여 고구려족 전체의 신인 동명과 하백녀(隧神)에 대한 제사를 모셨다. 이 때 각 나부의 대표들은 계루부왕실의 시조를 고구려의 공동시조로 인정하고, 계루부왕권에 대한 복속을 약속하였을 것이다. 국중대회는 나부통치체제의 운영원리가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장이었던 것이다.097)盧泰敦, 앞의 글(1975), 34∼40쪽.

 그렇지만 이후 고구려 국가체제는 계루부왕권이 강화되는 반면 나부의 독자성은 점차 약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次大王은 貫那部 于台 彌儒, 桓那部 于台 菸支留, 沸流那部 皂衣 陽神 등과 모의하여 태조대왕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이들의 관계를 패자나 우태로 승격시키고 左輔·右輔·中畏大夫 등의 고위직에 임명하였다.098)≪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80년 및 차대왕 2년. 차대왕을 시해하고 新大王을 즉위시킨 椽那部 皂衣 明臨答夫는 패자로 승격되고 최고직인 국상에 취임하였다.099)≪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차대왕 20년 및 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나부체제의 기본골격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각 세력의 나부 혹은 중앙정계에서의 위치는 왕권과의 친밀도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다.

 3세기 전반경에도 소노부(비류나부)나 절노부(연나부)는 여전히 자치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가들이 설치한 관원의 명단은 왕에게 보고되어 나부 내의 동향이 낱낱이 통제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은 왕의 관원과 차별 대우를 받았다. 또 고추가라는 칭호도 왕의 종족인 계루부의 대가를 비롯하여 소노부의 적통대인과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의 대인만 칭하였고 순노부나 관노부는 칭할 수 없었다. 이처럼 3세기 전반경이 되면 계루부왕권은 강화된 반면 나부의 독자성은 약화되었고, 또 나부간에 우열이 발생하여 우세한 나부는 독자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지만 세력이 미미한 나부는 독자성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100)여호규,<3세기 고구려의 사회변동과 통치체제의 변화>(≪역사와 현실≫15, 한국역사연구회, 1995), 139∼149쪽. 좌우보제가 2세기 후반경에 國相制로 변화하는 것도 이러한 양상을 보여준다. 좌우보가 연맹체적 정치체제의 모습을 보다 많이 간직하였던 반면, 국상은 왕권강화에 따라 왕권을 뒷받침하고 왕과 제가세력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이해된다.101)李鍾旭,<高句麗 初期의 左右補와 國相>(≪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1979).
盧重國, 앞의 글(1979).
金光洙,<高句麗의 ‘國相’職>(≪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 1991).
琴京淑,<고구려 초기의 중앙정치구조>(≪韓國史硏究≫86, 1994).
林起煥, 앞의 책(1995), 39∼49쪽.
다만 盧重國은 국상을 諸加會議의 議長으로 본 반면, 李鍾旭이나 琴京淑은 官職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金光洙는 專制王權을 전제로 한 集權的 官制構成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중앙정치조직은 점차 왕권 중심으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2세기 말경부터 일어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故國川王대에는 傭作農이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일부는 힘써 농사지어 자급할 정도의 계층으로 상승하였다.102)≪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3년·16년. 지배층의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함으로써 계층분화는 가속화되었다.103)≪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2년. 3세기 전반 고구려사회는 대가와 소가를 포함한 지배층인 坐食者(大家)가 전체 3만 호 가운데 만여 명이나 되었고, 부여의 예에서 보듯이 각 읍락은 豪民과 下戶로 분화되었다. 3세기 말경에는 용작농과 유이민이 광범위하게 발생하는104)≪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즉위년 및 봉상왕 9년. 등 계층분화는 더욱 심화되었다.105)洪承基,<1∼3世紀 「民」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63, 1974).
文昌魯,<三國時代 初期의 豪民>(≪歷史學報≫125, 1990).
이러한 사회변동의 기본동인은 농업생산력 발달이었지만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양상을 알 수 없다. 다만 毌丘儉이 침입할 때 東川王이 鐵騎 5천을 동원하였다는 기록에서106)≪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동천왕 20년. 철기의 대량생산으로 철제 농기구의 보급이 일반화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또한 후한대의 대형 철제보습이 집안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3세기경에는 犁耕이 일부 지역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7)耿鐵華,<集安高句麗農業考古槪述>(≪農業考古≫1989-1), 99쪽.
李賢惠,<韓國古代의 犁耕에 대하여>(≪國史館論叢≫37, 1992), 2∼4쪽.
대외전쟁을 통한 정복과 약탈 및 공납의 징수에서 오는 부의 증가도 계층분화를 가속화시켰다. 이처럼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각 읍락에 유제로 남아 있던 공동체적 관계는 거의 소멸되고, 유력계층의 예민으로 전락하는 無田農民이나 용작농이 늘어났다. 娶嫂婚의 소멸에서 보듯이 각 친족집단의 결속력은 약화되고 이들 사이의 분화도 한층 심화되었다.108)盧泰敦,<고구려 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일고찰>(≪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그리하여 각 나부세력이 읍락민에 대하여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은 거의 상실되고 나부체제는 해체되어 나갔다.

 나부체제의 해체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나부세력의 분화와 중앙귀족으로의 전신이며, 다른 하나는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이다.109)여호규, 앞의 글(1995b).

 2세기말 이후 나부세력 사이에 우열이 발생하여 소노부(沸流那部)와 절노부(椽那部)의 세력은 확대된 반면 순노부(桓那部)와 관노부(貫那部)의 세력은 약화되어 하부단위정치체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소노부는 독자적인 제사체계를 보유할 정도로 본래 國主로서의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고, 절노부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면서 세력기반을 확대하였다.110)李基白,<高句麗 王妃族考>(≪震檀學報≫20, 1959). 그리고 절노부의 지배세력은 과도한 수탈을 통하여 기반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관나부는 山上王의 소후 酒桶村后女나 中川王의 소후 貫那夫人과 같은 小后만 배출하였고 주통촌후녀가 ‘史失其族姓’하고111)≪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동천왕 즉위년. 관나부인이 왕비 椽氏로부터 ‘田舍之女’라는 모욕을 받을 정도로 세력이 미미해졌다. 이처럼 계루부왕권에 밀착하거나 사회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나부는 세력기반을 유지·확대한 반면 그렇지 못한 나부는 세력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그런데≪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3세기 중엽경부터 동부·서부 등 방위부 출신 인물이 증가하는 반면 那部 출신 인물은 감소하다가 중천왕대를 지나면 나오지 않는다. 방위부는 대체로 왕도 및 기내의 방위별 지역구분 내지 행정구역으로 파악되므로 방위부명을 관칭하는 인물은 왕권하의 중앙귀족으로 볼 수 있다. 3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고구려 지배세력은 나부명 대신 방위부명을 관칭하면서 자치권을 지닌 나부세력에서 왕권하의 중앙귀족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는 2세기말 이래 계루부왕권의 강화와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로 나부의 자치권이 상실되면서 나부가 지녔던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이 중앙국가권력으로 귀속된 결과이다. 나부세력들은 대체로 가문별로 족단을 이루면서 중앙귀족으로 전신하였다.112)林起煥,<6·7세기 高句麗의 政治動向>(≪韓國古代史硏究≫6, 1992), 26∼27쪽.
余昊奎, 앞의 글(1995b), 163∼167쪽.
尹成龍, 앞의 글, 27∼31쪽.
3세기 후반 서천왕의 장인이었던 西部 于漱는 원래 연나부의 우씨출신으로서 방위부 소속의 중앙귀족으로 전신한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113)≪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서천왕 2년. 이와 같이 나부세력이 왕권하의 중앙귀족으로 전신하면서 나부체제는 점차 해체되어 나갔다.

 나부체제의 해체에 따라 집권적 국가체제가 점차 정비되어 나갔다. 고국천왕이 다른 사람의 토지와 노동력을 과도하게 수탈하던 연나부 세력을 억누르고 비교적 한미한 출신인 西鴨淥谷 左勿村의 乙巴素를 國相으로 등용한 것은 집권적 국가체제의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고국천왕과 을파소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계층분화의 심화로 용작농이 발생하는 등 농민층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이들이 유력세력의 예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賑貸法을 실시하였다. 이는 기존 나부세력의 이해와 상반되는 조치로서 국가의 공민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들 공민은 집권적 국가체제의 가장 중요한 인적·물적 기반을 이루었다.

 계루부왕권은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왕권강화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뀐 것은 왕권강화의 구체적 표현이다.114)李基白, 앞의 글(1959), 90∼94쪽.
한편 일찍부터 부자상속제가 성립하였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金光洙,<高句麗 初期의 王位繼承 문제>(≪韓國史硏究≫55, 1986).
崔在錫,<高句麗의 王位繼承>(≪정신문화연구≫32, 1987).
李道學,<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검토>(≪韓國學論集≫20, 漢陽大, 1992).
또한 연나부와 같은 특정 나부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계루부집단 내에서 왕권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왕권강화책과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는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보다 확고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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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초기 관계조직의 변화
<표 1>초기 관계조직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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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1>에 따르면 3세기를 전후하여 패자나 우태 등 나부세력의 편제기준이던 관계는 소멸하는 대신 兄系官階가 새로이 대두하고, 왕권을 뒷받침하던 使者系官階는 분화되고 있다. 형계관계는 흔히 족장적 출신을 누층적으로 편제한 것으로 파악되는데115)金哲埈,<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앞의 책), 130∼132쪽. 어원적인 측면에서 그러한 면은 충분히 인정되지만 문헌상 3세기말부터 등장하므로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계관계는 3세기 중엽경부터 나부세력이 가문별로 족단화되어 중앙귀족으로 전신하자 이들을 세력의 대·소에 따라 편제하면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또 사자계관계는 왕권강화와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로 왕권을 뒷받침하고 실무를 수행할 인원의 수요가 증대되면서 분화되었다.116)金哲埈, 위의 글, 135쪽. 형계관계와 사자계관계를 축으로 하여 성립된 관계조직은 중기 이후 관계조직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117)武田幸男,<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朝鮮學報≫86, 1978), 20∼23쪽.
林起煥, 앞의 글(1995), 85∼114쪽.
초기 관계조직을 대신한 새로운 관계조직의 성립은 나부의 해체로 중앙귀족화한 지배세력에 대한 편제원리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집권적 국가체제의 단초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나부가 자치권을 행사하던 지역에 대한 지방통치조직도 정비되어 나갔다. 2세기말에 나부와 성격을 달리하는 서압록곡 좌물촌과 같은 谷·村명이 등장하고 있으나 지방행정구역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3세기 말경 미천왕 乙弗이 도망다닌 압록강 중류일대의 거의 모든 지명은 ‘村’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촌 위에 ‘谷’이 설정되어 ‘宰’라는 지방관이 파견되었다.118)≪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즉위년. 이는 烽上王대에 동북과 서북의 新城에 ‘宰’·‘太守’가 파견된 것과 합치하는 것으로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谷·村 지방제도가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119)武田幸男,<廣開土王陵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東洋文化硏究所紀要≫78, 東京大, 1978).
林起煥, 앞의 글(1987), 56∼68쪽.
余昊奎,<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韓國史硏究≫91, 1995).
그리하여 두만강 하류일대나 신성과 같은 정복지역에도 점차 지방제도가 실시되어 국가권력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게 되었다. 이 시기 지방통치조직은 각 교통로상의 일반 城·谷을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로 설정하여 재라는 지방관을 파견하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는 守·太守라는 상급지방관을 파견하는 2단계 구조로 정비되었다. 각 방면의 교통로를 매개로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였던 것이다.120)余昊奎, 위의 글.

 이상과 같이 집권적 국가체제는 3세기 중·후반경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그 단초가 열렸다. 4세기 전반 고구려의 급격한 대외팽창은 5胡16國시대라는 국제적 여건과 함께 새로운 집권적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강력히 추진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의 집권적 국가체제는 아직 초보적인 성립단계로 제도적으로 완비되지 않았다. 집권적 국가체제는 율령반포를 비롯한 소수림왕대의 일련의 체제정비를 통하여 비로소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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