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2) 발전
  • (2) 영역의 확대

(2) 영역의 확대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국가체제의 정비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이루어졌다. 정복지역에 대한 지배방식 또한 국가체제의 변천과 함께 변화하였다. 4세기 전반까지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크게 나부체제 성립 이전 시기, 나부체제기, 집권적 국가체제의 성립 초기 등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나부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는 주로 주변 異種族 집단을 복속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기원을 전후하여 선비족의 일부를 복속하였다고 한다.121)≪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11년. 고구려 모본왕 2년(49)에 선비족의 異種인 萬離集團이 고구려 예하를 이탈하여 요동군으로 투항한 것으로122)≪後漢書≫권 20, 列傳 10, 祭遵. 보아 선비족에 대한 복속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太子河 상류일대의 梁貊,123)≪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33년. 힘의 공백지대였던 함경남북도 산간지대의 荇人國·蓋馬國·句茶國과 두만강 하류의 북옥저도 이 무렵에 정복하거나 복속하였다.124)≪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6년·10년 및 권 14, 高句麗本紀 2, 대무신왕 9년. 즉 동명성왕에서 대무신왕대의 주변 이종족이나 독립소국에 대한 정복·복속 기사는 대체로 나부체제가 성립되기 이전 고구려의 대외정복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는 계루부왕권이 강력한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이전이므로 대외정복은 대체로 계루부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왕이 친정하거나 동명성왕 이래의 舊臣인 烏伊·摩離·扶芬奴·扶尉猒 등이 왕명을 받아 정복을 수행한다는 기록은 이를 반영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아직 주변 복속집단에 대하여 강력한 지배를 행사하지 못하고 대체로 영향권 안으로 포섭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1세기 중엽경 나부체제가 성립되면서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계루부왕권은 각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대외정복을 전개하였는데,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동해안 방면의 옥저와 동예를 복속하고 이 지역의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여 확고한 배후기지로 삼았다. 고구려는 내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한군현의 성쇠 및 邊民지배정책의 추이를125)權五重,<樂浪郡의 支配構造>(앞의 책), 42∼46쪽. 면밀하게 살펴 1세기 후반경에는 동옥저를,126)≪三國史記≫권 15, 高句麗本紀 3, 태조대왕 4년. 2세기 중·후반경에는 동예를12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濊. 복속하였다. 그런데 3세기 전반경 고구려는 옥저의 사회질서를 유지시킨 채 공납을 징수하는 속민지배·집단예민지배를 실시하고 있었다.128)盧泰敦, 앞의 글(1975), 30∼32쪽.
林起煥, 앞의 글(1987), 22∼32쪽.
고구려는 옥저의 大人을 使者로 삼아 읍락사회를 통솔하도록 하는 한편 고구려의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책하도록 하였다. 이는 3세기 전반경 고구려사회에서 대가의 위치와 함께 1세기 후반경 대가들이 옥저정복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을 보여준다. 대가들은 계루부왕권의 통제 아래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옥저를 정복하고 그 대가로 조세수취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나부체제기의 대외정복은 대체로 계루부왕권이 나부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통제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전에 복속한 이종족집단에 대한 지배도 강화하였는데, 신대왕대 연나부의 明臨答夫가 梁貊을 통제하는 데서129)≪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신대왕 2년. 보듯이 대체로 나부세력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한편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군현과 직접적인 군사대결을 전개하였다. 1세기말∼2세기초경 현도군을 蘇子河유역에서 渾河유역의 瀋陽―撫順 방면으로 퇴축시킨 뒤,130)≪後漢書≫권 23, 郡國志 5, 玄蒐郡條에 인용된≪東觀書≫“安帝卽位之年 分三縣(高縣·候城·遼陽-필자보충)來屬”. 2세기 전반에는 현도군과 요동군 공략에 나섰다. 이 때 고구려는 나부의 군사력뿐 아니라 예맥·선비 등 주변 종족집단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태조왕 53년(105) 요동을 공격하여 6개 현을 약취한 이래 현도군과 요동군을 계속 공략하여 태조왕 69년(121)에는 선비 8천 인을 거느리고 요하유역의 군사 요충지인 遼隊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차대왕 1년(146)에는 요동과 한반도 서북을 잇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의 西安平을 습격하여 帶方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한군현 공략은 동해안방면 진출과 달리 인민을 노획하고 재물을 초략하는 약탈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한군현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이겠지만, 고구려 또한 한군현지역에 진출하여 직접 지배할 만큼 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계루부왕권은 한군현 공략에서 획득한 포로와 재물을 전쟁에 참여한 각 나부세력이나 이종족집단에게 분배함으로써 왕권의 기반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때로는 한군현과 타협하여 보상을 받고 반환하여 대외적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2세기말 후한이 혼란에 빠지면서 한군현의 지배력은 현저히 약화되었으나, 이 틈을 타 公孫氏세력이 흥기하여 요동일대에 세력권을 구축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요동방면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특히 고구려는 2세기말 이래 사회경제적 변화에 직면하여 대내적인 개혁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활발한 대외정복을 벌일 수 없었다. 그러나 3세기 전반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어져 병립하게 되자 고구려는 공손씨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의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처음에는 남중국의 吳와 통교하였으나,131)≪三國志≫권 47, 吳書 2, 吳主傳 2. 魏가 요동방면으로 영향력을 뻗어오자 오의 사신을 참수하여 위에 보내는 등 위와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동천왕 12년(238) 위의 司馬宣王을 도와 공손연세력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요동방면에서 위와 국경을 직접 맞닿으면서 위로부터 보다 강한 압력을 받았다. 이에 동천왕 16년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동천왕 18·19년에 위의 幽州刺史 毌丘儉의 침략을 받아 丸都城이 함락되고 왕은 북옥저로 피신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매우 위축되었는데, 관구검 침입시에 입은 피해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3세기 중엽경 나부체제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 수립이 시급하였던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고구려는 3세기말까지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주력하는 한편 위·진의 간헐적인 침략을 방어하고, 서천왕 21년(290)경부터 선비 慕容部의 침략에 대비한 방어책을 수립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3세기 후반 새로운 집권적 국가체제의 단초를 열고 이를 기반으로 5호16국시대라는 국제적 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강력한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132)집권적 국가체제의 성립 초기 곧 4세기 전반의 영토확장은 이 책 Ⅱ편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생략하였다.

<余昊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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