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1. 체제정비
  • 1) 체제정비의 배경

1) 체제정비의 배경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유역의 정치세력들이 연맹체를 결성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 초기에는 자체 운동성을 가진 정치집단이 다수 존재했으나 桂婁部 왕실이 확립되면서 이 다수의 정치세력들은 那部로 편제되었다. 각 나부 내부의 정치는 諸加들이 나부의 長으로서 중앙과는 별도로 자체의 관인을 두고 반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제가들은 나부를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하여 중앙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제가회의에 참여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협의·결정한 후 집행케 함으로써 국왕보다 하위지만 그와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왕은 그 자신 가장 유력한 나부인 계루부의 장으로서 다른 나부 안의 일에 대해서는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다만 諸加를 통해 간접적, 집단적으로 나부민을 통치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왕의 官人과 각 나부 제가들의 관인은 서열이 달랐다. 그리고 제가는 자신이 스스로 설치한 관인들의 명단을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다. 왕족과 다른 귀족들은 존재 자체에서 차이가 났고 왕의 우위는 확정된 상태였다.

 따라서 국내외문제에 대한 통치는 왕의 주도 아래 대표적 귀족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형태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 전기의 정치운영체제를 나부통치체제라 한다.133)盧泰敦,<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韓國史論≫2, 서울大 國史學科, 1975).
余昊奎,<高句麗 初期 那部統治體制의 成立과 運營>(≪韓國史論≫27, 1992).
林起煥,≪高句麗 集權體制 成立過程의 硏究≫(慶熙大 博士學位論文, 1995).
金賢淑,<高句麗 前期 那部統治體制의 運營과 變化>(≪歷史敎育論集≫20, 慶北大, 1995).
이 나부통치체제는 大武神王代에 기초가 놓였고 태조왕대에 완성되었다.134)金賢淑,<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大丘史學≫47, 1994), 26∼27쪽. 나부체제의 성립 후 고구려족은 통합된 힘을 바탕으로 국력을 급속하게 팽창시켜 나갔다.

 그런데 3세기말이 되면 나부가 자체 운동성을 상실하고 소멸되었다. 나부의 해체는 몇 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빈번하게 치루어진 정복전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복전쟁은 고구려의 생존권 유지를 위하여 필수적인 요소였다. 중국 군현세력과의 투쟁과정에서 성립된 고구려는 분열책을 써서 군현지배를 지속하려고 하는 중국측에 대항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국가를 발전시켜야 했다. 그리고 취약한 생산기반을 보충하기 위하여 경제적 기반이 될 지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나부체제가 완성된 이후 고구려는 대중국 투쟁과 대외정복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대외전쟁에는 국왕측 군사와 제가들의 병력이 함께 동원되었다. 이 때 軍의 최고지휘자로서 전쟁을 수행하고 전리품을 분배함으로써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고 부도 축적되었다. 반면 제가들은 독자적으로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하지만 군통수권자인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참전자들의 희생이 당연히 있었을 것인데, 이 경우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왕에 비하여, 제가들은 병력 손실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들 스스로 戰士로서 참전했으므로 자신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 빈번하게 발발할수록 왕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제가들의 세력기반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리고 전쟁과정에서 전사나 보급 담당자로 참여한 那部民이 희생되거나, 포로나 유이민 등이 나부로 편입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5나부의 배타성과 공동체적 유대가 점차 약화되었고 나부의 독자적인 자체 운동성이 줄어들어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다음으로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읍락민의 계층분화를 나부분열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3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철기의 대량 생산으로 철제농기구가 보편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발견된 숫자가 극히 적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대형 철제보습이 集安지역에서 출토되므로 이 때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고 토지의 가치가 높아졌으며 이에 따라 토지확보를 위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토지를 상실한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135)여호규,<3세기 고구려의 사회변동과 통치체제의 변화>(≪역사와 현실≫15, 한국역사연구회, 1995), 162∼163쪽. 그 결과 읍락민들도 호민층과 자영농민, 소작민, 용작인 등으로 분화되었다.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각 읍락에 남아 있던 공동체적 유제는 점차 소멸되었다. 이에 따라 나부의 기존 지배자들의 통치권도 정상적으로 읍락에 미칠 수 없었고, 나부의 자체 운영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나부에 대한 소속의식과 운명공동체의식도 희박해졌고 나부별 독자적 운영을 뒷받침해주던 경제적 관계도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나부 해체요인으로는 국왕측의 의도적인 나부분열 노력을 들 수 있다. 국왕측에서는 특정 나부의 지나친 세력비대를 막기 위하여 나부내의 통치행위에 대해 간여하거나 다른 나부의 정치적 역량을 키워서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다. 이전 맹주국이었던 沸流那部를 견제하기 위하여 탐학을 이유로 部長을 교체해 버리거나 椽那部 출신과 지속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어 계루부 왕실의 협조세력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나부의 세력이 강화되자 東川王과 中川王代에는 관나부 출신의 여자를 小后로 맞아들였고, 美川王代에는 연나부 출신이 아닌 周氏를 왕비로 삼기도 하였다. 이외에 나부 내부의 통합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部 내부세력들을 개별적으로 분리·조종하기도 하였다. 國相은 明臨氏에서, 왕비는 于氏나 椽氏에서 배출토록 한 것은 부 내부세력들의 결집을 막아 연나부의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136)金賢淑,<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慶北史學≫16, 1993), 38∼ 40쪽.

 이와 같은 요인들로 인하여 나부의 해체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국왕측은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귀족들은 자신의 기존 세력기반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양자간의 관계는 점차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에 귀족들은 왕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관료적 귀족으로 전신하거나, 아니면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하여 왕에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전자의 경우 중앙귀족이 되어 계루부로 옮겨가 방위부에 거주하면서 관등제에 의해 등급지워져 왕 아래 개별적으로 편제되었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세력기반인 나부에 머물다 점차 중앙정치에서 배제되고 끝내는 낙오됨으로써 나중에는 나부의 지배권조차 상실하게 되었다.

 나부 귀족들의 이주로 계루부는 확대되어 방위부로 편제되었고, 정치권력과 부의 중심지인 王京으로 발전하였다.137)林起煥, 앞의 책, 55∼60쪽. 그러나 나부들은 단위정치체로서의 통합력과 독자성을 점차 상실하고 몇 개의 친족집단들로 분열된 후, 다시 가문별로 세분화되어 감으로써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는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배하였다. 이에 따라 국왕 주도하의 공동정치 운영방식인 나부통치체제도 3세기 말경에는 사실상 기능이 정지되었다. 요컨대 반자치적인 정치집단들에 의한 다원적이고 간접적인 통치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이고 중앙집권적 정치운영방식으로 변화·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부통치체제의 해체는 사회 전반의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나부체제에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의 교체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즉 나부의 분해와 독자성의 소멸, 나부내로의 국왕권 침투가 진행되면서 점진적으로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다. 영토의 확장으로 인한 국력팽창은 그것을 가속화시켰다.

 4세기초의 미천왕대에는 낙랑과 대방 등 漢郡縣을 마침내 축출하고 西安平을 확보하였다.138)≪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12년 8월. 그리고 後趙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말갈계 종족 일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으며, 慕容氏세력을 성공적으로 견제하였다.139)≪晋書≫권 105, 載記 5, 後趙石勒 建平 원년.
≪梁書≫권 54, 列傳 48, 東夷 高句驪.
이러한 대외군사활동의 성공에 따라 국제적 위상이 강화되고 수취기반이 확대되었다. 이에 힘입어 내부적으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질서의 구축이 더욱 활발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 故國原王 12년(342)에 前燕王 慕容皝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수도가 거의 파괴되고 남녀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 가는 등 심한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모용씨세력은 고구려의 재도전을 막기 위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실어간 후 그 다음해에야 돌려보내고, 왕모 周氏를 끌고가 13년 동안이나 인질로 잡아둠으로써 고구려로 하여금 굴욕적인 외교를 감수하게 하였다.

 前燕은 370년에 前秦에게 멸망당하였다. 이 때 고구려로 도망온 太傅 慕容評을 전진에 보냄으로써 고구려와 전진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140)≪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12년 11월·13년 2월·25년 12월·40년. 이에 따라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한동안 안정되었으며, 西進政策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141)朴性鳳,<廣開土好太王期 高句麗 南進의 性格>(≪韓國史硏究≫27, 1979). 그리하여 고구려는 영역확대의 주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신흥세력인 백제와 帶方故地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국원왕이 백제병의 流矢에 맞아 전사하였다.142)≪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41년 10월. 이같은 대외전쟁에서의 잇따른 패배로 인하여 고구려의 내부적 발전도 한동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국원왕대의 이같은 군사활동의 실패는 단순히 전술상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즉 사회변화에 따라 나부체제가 해체된 이후 전반적인 면에서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정비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상황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꾸준히 전개되어 온 영토확장과정에서 편입된 동예, 옥저, 말갈계와 거란족 일부 집단, 요동지역의 유이민, 낙랑과 대방지역민 등과 본래의 고구려민 등 복잡하고 다양한 구성원들의 배타적이고 분리적인 인식과 태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전쟁과정에서 통합된 힘을 강력하게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왕이 전사한 위기상황에서 집권세력들은 국왕측이나 귀족측 구분없이 모두 체제정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확대된 영토와 인민을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의식적인 변화와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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