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1. 체제정비
  • 2) 소수림왕대의 체제정비
  • (1)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

(1) 불교의 도입과 태학의 설립

 小獸林王은 이처럼 지배층들이 공통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시기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그는 구체제의 잔재를 일소하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새로운 체제로 정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소수림왕은 재위 2년(372)에 불교를 도입하고 태학을 설립하였다.

 고구려에는 前秦으로부터 승려 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가져오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 이후 소수림왕 4년에는 승려 阿道가 왔고, 다음해에는 省門寺와 伊弗蘭寺가 창건되었다.143)≪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소수림왕 2년 6월·4년·5년 2월.
申東河,<高句麗의 寺院造成과 그 意味>(≪韓國史論≫19, 서울大 國史學科, 1988).
그러나 그 이전에 東晋의 승려인 支遁道林이 高麗道人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전래 이전에 이미 사회일각에서는 불교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144)≪梁高僧傳≫권 4, 竺潛·法深傳.
≪海東高僧傳≫권 1, 釋亡名傳.
李基白,<三國時代 佛敎 受容과 그 社會的 意義>(≪歷史學報≫6, 1954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5쪽).
미천왕대 후조와의 교류나 낙랑·대방지역의 편입 등을 계기로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45)全虎兌,<5세기 高句麗 古墳壁畵에 나타난 佛敎的 來世觀>(≪韓國史論≫21, 서울大 國史學科, 1989), 52∼54쪽.

 이러한 상황에서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나는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백제와의 전쟁이 더욱 빈번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서쪽 국경의 안정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불교를 받아들인 것도 그와 같은 외교행위의 일면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北朝불교의 호국사상이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교도입 이전까지는 여전히 각 정치집단별로 전해 내려온 다양한 재래신앙이 고구려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대외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국가공동체의식을 새롭게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민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고차원적이고 보편적인 신앙체계이면서 국왕 중심의 호국불교인 북조불교를 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는 소수림왕 이후의 왕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三國史記≫에 의하면 故國壤王 9년에는 “불교를 받들고 믿어 복을 구하라”는 하교를 내렸고, 廣開土王 2년에는 평양에 9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크게 장려하였다. 그 결과 불교는 점차 고구려인에게 파급되어 지배층의 對民觀 변화와 고구려인의 화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등종교인 불교를 믿게 되면서 국내에 공존하는 이질적 성격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상호 배타적 태도를 지양하고 서로 융합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이 마련되었다. 또 불교는 국가공동체의식을 우선으로 해서 전고구려인이 국왕을 중심으로 결집할 수 있게 하였다. 새로운 구성원과 기존의 집단예민 그리고 이전의 5나부민이었던 존재들 모두 국왕의 동일한 백성이 됨으로써 국가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동시에 국왕권을 뒷받침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당시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한 지방민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불교는 業이나 윤회사상을 통하여 신분제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실사회에서의 노력에 따라 내세의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능동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게 하는 일면도 있었다.146)南希叔,<新羅 法興王代 佛敎受容과 그 主導勢力>(≪韓國史論≫25, 서울大 國史學科, 1991), 32∼34쪽.

 당시 지방민들은 전대에 비하여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지위가 향상되었으므로 의식적인 면에서의 성장도 필요하였다. 즉 중앙권력과 연결지어 자신의 지위를 개선해 가면서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고구려인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해갈 필요가 있었다. 4세기 이후는 삼국이 총력전을 벌이는 시기였으므로 왕을 비롯한 지배층으로서도 이들의 협조와 긍정적인 현실대응의 자세를 필요로 했다. 불교의 인과응보사상은 이런 면에서 지방민 특히 재지지배층의 현실인식과 생활자세의 변화를 이끌어줄 수 있었다. 이들은 舊族長출신의 귀족들보다 오히려 국왕의 지지층으로 부각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요컨대 4세기에 도입된 불교는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여 고구려국 주민의 융합과 신흥세력의 등장을 뒷받침해 주면서, 동시에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147)李萬烈,<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가지 檢討>(≪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 26쪽.

 한편 太學은 국가차원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그 정치제도의 운영에 능숙한 인재를 키우고자 창설한 교육기관이다.148)盧重國,<高句麗律令에 關한 一試論>(≪東方學志≫21, 1979), 110쪽.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여 확대된 영토와 복잡다양한 성격의 내부 구성원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태학설립은 유교정치이념을 도입하고자 하는 고구려정부의 적극적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유교사상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운영에 필요한 정치이념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학에서의 교육내용은 유교의 전반적인 면을 심도있게 망라했다기보다는 「忠」을 강조하는 데 치중했을 가능성이 크다.149)李基白,<儒敎受容의 初期形態>(≪韓國民族思想史大系≫2, 1973 ;≪新羅時代의 國家 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129쪽).
金哲埈,<三國時代의 禮俗과 儒敎思想>(≪大東文化硏究≫6·7, 1970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195∼197쪽).

 그리고 태학에서의 유교적 소양교육으로 중앙집권적 체제를 제도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변화된 체제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있는 인재로 만들면서 동시에 의식 자체도 관료적 성격으로 서서히 전환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학설립은 다음해에 행해진 율령반포를 위한 포석으로 그와 상호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