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Ⅱ. 고구려의 변천
  • 2. 영토확장
  • 1) 요동 방면

1) 요동 방면

 고구려의 서부방면에 대한 영토확장은 주로 遼東地方을 대상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요동지방을 지배해오던 晉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주변에 있던 鮮卑族인 慕容氏가 그 세력을 급속히 확장시켰다.183)孔錫龜,<高句麗의 領域擴張에 대한 硏究>(≪韓國上古史學報≫6, 1991), 130∼135쪽. 요동성에 주둔하고 있던 진의 東夷校尉 崔毖는 모용씨를 제압하기 위하여 그 주변에 있던 고구려 등과 연합하고자 하였다.184)≪資治通鑑≫권 91, 晉紀 13, 元帝 太興 2년.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 결과 최비가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185)≪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20년. 이어 요동지방은 모용씨의 세력권 내에 포함되었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요동지방에서의 세력변화에 따른 혼란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요동지방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였다.186)≪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20년·21년.
≪梁書≫권 54, 列傳 48, 東夷 高句驪.
이 과정에서 모용씨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자 고구려는 외교적인 측면에서 공세를 강화하였다. 美川王은 서쪽에서 모용씨와 강력히 대립하고 있던 後趙와의 연합을 통하여187)≪三國史記≫권 17, 高句麗本紀 5, 미천왕 31년. 모용씨를 압박해 나갔다. 그러자 중원으로의 진출이라는 야망을 품고있던 모용씨는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였다.188)≪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12년. 즉 고국원왕 12년(342)에 모용씨는 고구려의 國都를 함락시켰는데 이같은 큰 타격을 받은 고구려는 이후 요동지방에 대한 진출노력을 일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189)孔錫龜, 앞의 글, 139∼141쪽.

 이후 요동지방에서는 또 다시 세력변동이 일어났다. 前燕을 세워 제국으로까지 발전하였던 모용씨가 망하고190)池培善,≪慕容燕의 中國化政策과 對外關係≫(延世大 博士學位論文, 1986), 126∼234쪽. 그 뒤를 이어 氐族 출신의 前秦이 요동지방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당시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한 백제공략에 역점을 두고 있어 서방에 힘을 분산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191)≪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원왕 40년·소수림왕 2년 및 권 3, 新羅本紀 3, 내물이사금 26년.
≪資治通鑑≫권 104, 晉紀 26, 孝武帝 太元 2년.
얼마 후 전진의 멸망과 함께 이번에는 後燕 모용씨가 요동지방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세력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요동지방에 대한 진출노력을 재개하여 후연이 요동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기 이전에 요동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고국양)왕은 4만의 병력을 보내어 요동을 습격케 하였다. 앞서 (後)燕王(慕容)垂가 帶方王 (慕容)佐를 龍城에 주둔케 한 바 있었다. (모용)좌는 고구려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司馬 郝景을 파견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아군이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遼東(郡)과 玄菟(郡)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다(≪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양왕 2년 6월).

 즉 고국양왕이 즉위 2년(385)에 요동군·현도군지방을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대한 지배는 5개월여 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192)孔錫龜, 앞의 글, 143∼144쪽. 이후 요동지방은 후연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고, 양국간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이 때 고국양왕은 후연으로부터 ‘遼東帶方二國王’이라는 봉작을 받았다.193)≪北史≫권 94, 列傳 82, 高麗.

 한편 만리장성 이북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선비족 拓拔氏가 고구려 고국양왕 3년에 盛樂(내몽고 呼和浩特 부근)에서 魏王을 자칭하고 서서히 후연 모용씨를 압박해 왔다. 후연은 탁발씨와의 전투에서 계속 참패당하고 수도를 中山에서 요서지방의 龍城(朝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후연의 영역은 요서·요동지방으로 축소되었다. 이처럼 서방으로의 진출이 막히게 된 후연은 이전까지는 비교적 소홀하였던 동쪽으로의 진출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고구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양국 사이에 유지되었던 소강상태가깨졌다. 그것은 후연의 先攻으로 나타났는데 후연왕 慕容盛은 광개토왕 10년(400)에 왕의 무례함을 구실로 내세워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194)≪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9년.
이 때 후연은 고구려의 新城, 南蘇城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5천여 호의 포로를 잡아가지고 돌아가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이 해는 고구려가 신라 구원병 5만을 낙동강 유역에 파견한 해여서(영락 10년) 혹시 후연에 대한 패전이 이 사실과 연관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고구려는 후연의 침공에 강력히 대처하였고 나아가 후연에 대한 응징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참고된다.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宿軍城을 공격케 하니 (後)燕의 平州刺史인 (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11년).

 고구려가 광개토왕 12년 후연의 평주자사가 주둔하고 있던 숙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는 것이다. 숙군성은 이 때의 고구려작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그 위치는 遼河 서편의 大凌河유역에 있는 오늘날의 義縣·廣寧부근으로 비정된다.195)前內互,≪晉代の滿洲≫1(丸善株式會社, 1913), 277∼278쪽. 또한 숙군성에 있던 후연 평주자사의 도망사실에서 고국양왕 2년(385)에 요동지방의 平郭에 설치된 바 있던196)≪資治通鑑≫권 106, 晉紀 28, 孝武帝 太元 10년. 후연의 평주 치소가 그 사이에 대릉하유역의 숙군성으로 이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요동진출 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공세는 광개토왕 14년에도 이어져 역시 요하를 건너 대릉하유역에까지 미치고 있다.197)≪晉書≫권 124, 載記 24, 慕容熙. 이처럼 고구려의 공격이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이 당시 고구려는 이미 요동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적극적인 공세에 대하여 후연 역시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빼앗긴 요동지방에 대한 수 차례의 공격으로 나타났다.198)後燕의 고구려 공격에 대하여는≪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14년·15년 참조. 그러나 후연의 공격은 대부분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는데199)孔錫龜, 앞의 글, 147∼148쪽. 이는 광개토왕에 의한 강력한 요동진출정책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200)<廣開土王陵碑>에는 당시 고구려와 후연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확실치 않으나 광개토왕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비문의 일부가 결실되어 광개토왕의 작전 대상이 불분명한 永樂 17년조 기사를 對後燕戰 기사로 이해한 견해는 경청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千寬宇,
<廣開土王陵碑文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一潮閣, 1982, 546∼555쪽).

 후연과의 치열한 투쟁 끝에 요동지방을 확보한 고구려는 후연에서 내부반란으로 새로이 高雲이란 인물이 등장하여 北燕을 세우게 됨에 따라 북연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운은 고구려인인 高和의 손자로서 慕容寶의 양자가 되었다가 이 때 즉위하였다.201)≪晉書≫권 124, 載記 24, 慕容雲. 광개토왕은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하였고, 고운이 이에 답례하는 등 양국간에 우호적 관계가 성립되었다.202)≪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광개토왕 17년. 그러나 고운이 2년 만에 피살되었고 이어 북연에서는 馮氏가 집권하게 되었다(409). 북연은 서쪽에서 서서히 압박해 오는 北魏에 의해 계속 위축되어 갔고 마침내 고구려 장수왕 20년(432)에 이르러서는 북연왕 馮弘이 고구려로 망명하였다.203)≪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24년. 당시 고구려는 풍홍의 망명의사를 확인하고 군대를 파견하였다.204)≪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장수왕 23년·24년. 북위군과의 대치 끝에 먼저 북연의 수도인 和龍城에 들어간 고구려군은 풍홍을 고구려로 호송해 왔다. 이 때 북위군은 고구려군의 위세에 눌려 정면으로 대응·공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요동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고구려는 북연을 멸망시키고 요서지방을 장악한 북위와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요동지방 지배는 이후 고구려의 멸망시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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